한국에서 예술인복지와 관련한 대부분의 글은 최고은 작가의 비극적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최고은 작가의 죽음 이후, 한국 사회가 비로소 예술인의 처참한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예술인복지법이 세상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예술인복지법은 최고은법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과정에서 예술인복지법은 여론의 관심만 쫓던 일부 정치인들과 행정적 기준에 맞춘 제도 설계에만 급급했던 관료들로 인해 예술인의 근로자 의제 적용 문제나 사회보험 가입 문제, 재원확보를 위한 제도 설계 등 핵심적인 내용이 빠진 채 반쪽짜리 법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고 5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예술인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고 예술현장의 착취와 고통은 여전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과연 우리가 놓친 조각이 무엇인지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또 다른 예술가의 죽음이 있다.
구본주 작가는 2000년 대한민국문예진흥원 미술작가 500인에 선정, 2002년 서울예술의전당 젊은 작가로 선정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통해 주목할 만한 조각가로 인정받았으며 <갑오농민전쟁>, <미스터 리>, <샐러리맨> 연작 등을 통해 날카로운 시대의식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줬다. 하지만 2003년 9월 안타깝게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한 예술가와의 헤어짐을 추모할 틈도 없이 우리는 처참한 현실의 벽을 만나게 되었다. 사망보험금 지급을 놓고 해당 보험사가 구본주 작가의 경우 지속적인 수입이 없어 소득 입증 자료가 불분명하고, 예술활동을 경력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 일용직 노임 기준에 준하여 보험료를 지급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문화예술계는 당연히 발칵 뒤집어졌다. 촉망받던 미술작가에게 일용직 노임을 적용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원초적인 분노도 있었지만 존경받는 예술가란 외피를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사회적 지위와 직업적 권리도 인정받지 못하는 예술인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쓰디쓴 자각이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예술인들은 기자회견을 열고 일인시위를 조직하며 “예술은 사회적 노동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예술인의 '노동'이 올바로 평가받고 예술인의 생존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다뤄져야 함을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법원의 조정에 따라 구본주 작가 측과 보험사 간의 소송이 종결되면서 이러한 논의들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이후 문화예술정책 영역 안에서는 예술인복지 정책의 수립이라는 일련의 흐름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공론장에서의 논의는 지지부진한 채 수년간을 보내다가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이르러서야 예술인복지법의 제정이란 형식으로만 다시 우리 앞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예술인복지법과 제도가 만들어졌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예술은 배고픈 것이며 가난과 비극 속에서 예술이 탄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일부 예술인들조차도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가난을 감수 할 수밖에 없다고 이야기하고, 어떤 원로 예술인은 경제적 보상 보다는 존경을 택하라고 후배들에게 일갈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인식은 예술활동의 자율성과 열정, 미적가치에 대해 과도한 환상을 부여한다. 예술은 경제적 보상체계의 외곽에 있을 때 그 순수성이 보장되고 예술작업을 ‘노동’이라 부르는 것은 예술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 여긴다. 때문에 많은 예술인들이 자신의 예술작업을 ‘노동’으로부터 분리하고, 예술인을 ‘노동자’로 호명하는 것에 반대한다. 하지만 예술인의 가난을 당연시하는 이러한 풍토는 예술인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하는 잘못된 근거에 불과하다.
예술인의 가난은 선택 이전에 구조화되어 있다. 낮은 보수, 불안정한 일자리, 사회안전망에서의 배제는 예술인의 가난을 재생산하고 있다. 예술인 스스로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예술은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구조 위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예술인의 가난과 생존, 그리고 나아가 창작환경의 문제는 예술을 둘러싼 사적 영역을 벗어나 사회적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하며 시혜나 지원의 개념보다는 직업적 권리의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 공공영역과 민간영역 가리지 않고 예술인을 동원하고 착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인의 생존 문제를 개별 예술인을 대상으로 한 지원제도 수준에서 접근하는 것은 아무런 해결책도 되지 못한다. 예술노동은 이 문제의 본질로 접근하기 위한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예술노동은 단순히 예술을 노동으로 치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술노동은 사회적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예술인 개개인의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창작 활동이란 점에서 일반적인 노동의 정의로부터 비껴난다. 하지만 예술노동은 그 생산된 가치가 공유되고 확산되며 축적되어 사회적 가치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노동의 성격을 갖는다. 이와 같은 예술노동의 이중적 특징을 함께 고려했을 때 예술인의 빈곤과 생존의 문제는 올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
현행 예술인복지법과 예술인복지제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와 같은 예술노동의 관점이 빠져 있다는데 있다. 예술인의 복지 문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예술인의 가난과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정의하고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가 우선 해결되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구본주 씨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에서 예술인에 대한 사회적 지위는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못하다. 개별 법령상의 예술인에 대한 정의도 제각각일뿐더러 예술분야의 직업분류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예술인고용보험 도입을 둘러싼 논란도 현행 예술인복지제도의 이러한 한계로부터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예술인에 대한 근로자 의제 적용 문제나 직업적 권리란 측면에서 사회보험 적용이 가능하도록 예술인복지제도가 처음부터 만들어졌다면 현재와 같이 예술인을 별도의 대상으로 하는 예외적인 제도 설계를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쪽짜리도 되지 않는 예술인복지제도의 틀 안에서 예술인복지의 가장 핵심적인 정책이라 할 수 있는 고용보험 적용 문제를 풀기 위해 좌충우돌해야 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예술인고용보험 제도의 설계는 현실적인 장벽을 우회하는 그럴듯한 정책적 아이디어를 모아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가능한 예술인복지제도의 재설계란 관점에서 분명한 원칙과 기준을 확인하고 합의하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예술노동이 예술인들의 문제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예술노동에 대한 제대로 된 논의조차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술노동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예술인의 위기와 예술인 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삶 자체의 위기에 봉착한 예술인에게 다양한 경제적 지원을 통해 희망을 보여주는 일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루하루의 삶과 창작활동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잘못된 구조를 먼저 걷어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어쩌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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