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내 경우부터 이야기하자. 나는 글을 써서 책을 내 그 인세 수입으로 먹고 사는 전업 작가다. 나는 소설이나 동화, 그림책에 어울리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원고를 판다. 책 한 권이 팔릴 때 마다 계약서에 명시된 비율의 인세를 지급받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매절로 원고를 넘기기도 한다. 매절이란 원고의 출판권을 몇 년의 한시적인 기간 동안 출판사에 전적으로 위임하는 행위다. 내가 쓴 책이 매절료로 받은 금액보다 더 많은 수익을 낸다한들 나는 그 돈에 대한 아무런 권한이 없다. 계약서에 명시된 기간 동안은 말이다.
글을 판다는 일은 부동산 거래만큼이나 명확하고 현실적이다. 내 원고를 받아 든 출판사 관계자들은 전문가의 눈썰미를 총동원해서 내 글의 무게를 단다. 얼마나 팔릴 수 있는가, 즉 얼마만큼의 수익을 낼 수 있는 글인지 저울질해서 계약금이든 인세 비율이든 매절료든 정해서 내게 흥정을 붙는다. 이렇게 묘사하면 고매하고 향기로운 문학 작품을 시장 좌판에 깔린 물건처럼 폄훼하는 기분일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비자연 하는 문학인들의 속사정은 너나할 거 없이 다르지 않다. 예술가도 창작자 이전에 생활인이기 때문이다. 금수저가 아닌 이상 생존의 기본 조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나저나 글 값으로 생계가 유지된다고? 이 분야에 대해 작은 이해를 갖춘 분이라면 내심 놀랄 것이다. 그러실 필요 없다. 내가 말하는 생계유지란 오로지 나 한 사람, 내 한 몸의 호구지책이 가까스로 가능한 수입을 일컫는 말일 뿐이다. 이 정도의 수입을 가지고 한 가족을 부양하거나 나이든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면 거기서부터는 다른 얘기다. 되레 그들에게 짐이 아닌 짐이 되어 부양을 받는 처지가 되기 일쑤다.
밥벌이의 고단함에 지칠 때 가끔 자조 섞인 농담처럼 이렇게 말하곤 한다.
"글쓰기란 피 팔아서 빵 사먹는 짓이야."
나의 이런 푸념에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먹일 닭곰탕을 끓이시며 담담하게 말씀하시곤 한다.
“예술가는 다 가난 한 거야. 돈 벌자고 들면 예술 하면 안 되지. 예술가는 돈에 연연하는 거 아니다.”
작가인 나보다 더 강한 멘탈을 자랑하시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고개가 숙여지곤 하지만 뭔가 뒤끝이 개운치 않다. 정말 나는 가난한 게 정상인가?
예술가를 가장 빈번하게 수식하는 단어는 ‘가난’이 아닐까 싶다. 가난은 모더니즘 사조가 예술계를 지배하던 시기부터 예술가들을 따라다녔던 꼬리표였다. 누군가(작품을 의뢰하고 사주는)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예술품으로서가 아닌 ‘예술 그 자체만을 위한 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가난은 예술작품의 고결함과 깊이를 더해주는 혹독한 주문이 되었다. 예술가는 항상 깨어있고 부패하지 않으며 삶의 깊은 철학을 구비하기 위해 천형처럼 가난을 끼고 살아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진지 오래다. 그럼에도 현실은 상위 5%의 스타급 작가가 전체 소득의 95%를 가져가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재의 승자독식 시스템 속에 있다.
상위 급에 끼지 못한 작가는 예술 창작의 동인으로 금전적인 보상을 대신한 ‘심리적 소득’ 혹은 ‘내적 보상’이라는 기제를 작동시킨다. 즉 재능 있는 예술가, 선택받은 자 라는 자기만족으로 스스로를 설득하여 가난의 자발적 수용이라는 덫에 빠지곤 한다. 닭곰탕 그릇을 내밀며 부디 당신의 딸이 불후의 명작을 써내기를 응원하는 어머니 역시 이런 논리로 나를 설득하고 계신 것이다.
예술인 고용보험의 시행을 앞두고 논의가 다시 일고 있다. 예술 행위가, 창작 행위가 노동이이냐 아니냐를 따져봐야 한단다. 이 원론적인 질문에 웃음이 났다. 이 고단하고 지난한, 그러나 가성비 형편없는 글쓰기 작업이 노동이 아니면 무엇인가 말인가? 할 줄 아는 일이라곤 겨우 글짓기라는 볼품없는 재주이며,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재주로 푼돈을 벌어 입에 풀칠을 한다. 쓰고 싶지 않은 글이라도 양심과 정의에 위배되지 않는 한 쓴다. 돈이 된다면 말이다. 이러한 내 삶이 노동자의 삶이 아니면 무엇이 노동이고 노동자일까?
다른 질문도 듣는다. 스스로 좋아서 예술 하는 사람에게 대가가 왜 필요한가, 라는 말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예술은 취미이자 유희일 수 있다. 하지만 대가가 정해진(혹은 약속된) 작업, 내 스스로의 만족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향유하고 소비할 대상을 염두 해 두고 진행되는 모든 예술 작업은 노동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작가가 되기 위해 글쓰기를 연마하는 지망생들과 작품 합평회를 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혼자서 읽고 만족할 글이라면 일기장에 쓰고 서랍에 넣어 두십시오. 독자와 만나기를 기대하고 독자와 소통하기를 원하는 글을 쓰겠다면 이러저러한 기본을 갖추십시오."
이 말인즉 자기 유희로서의 예술과 직업으로서의 창작활동을 구분해 주십사 하는 요청이다. 그리고 직업으로서의 창작활동은 자기만족 이상의 노동을 요구한다.
창작 행위는 육체적 노동을 수반하는 정신적 노동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각종 서비스직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직업적 특성을 ‘감정노동’이라는 단어를 생성시킴으로써 설명하듯 예술 노동 또한 무엇보다도 ‘정신노동’이라는 기본 전제를 그 특징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본질적으로 예술의 미학적 가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의 ‘노동’과는 대항적 위치에 놓여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재 예술가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을 직시하면 예술가처럼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노동 착취를 당하는 직업군도 찾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시간제 아르바이트의 시급에도 못 미치는 대가와 전문적 기능과 기술을 제공하면서도 사회적으로 받는 무시와 편견은 이들로 하여금 자기 직업에 대한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나는 사회적으로 직업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작가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신기한 생물이라도 본 듯 입을 오므리며 “오-! 멋있다, 작가!”라며 낮은 탄성을 내뱉는다. 그러다 내가 내 책을 판 인세 수입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전업 작가라고 부연설명을 덧붙이면 눈을 동그랗게 뜬다. 쉽게 얘기해 취미로 글이나 쓰는 ‘백수’인 줄 알았더니 그 일로 벌어먹고 산다고? 그게 가능하냐는 뜻이다. 나는 매년 5월이면 종합소득세 신고를 한다. 인세를 비롯한 모든 수입에서 원천징수로 갑근세를 떼어 국가에 낸다.
하지만 자영업자로 분류되어 있는 나는 의료보험은 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국민연금이나 실업 보험은 임의가입 대상이다. 산업재해보험은 아예 해당사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지내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4대 사회보험에서 작가인 나는 소외되어 있다.
예술인 복지법 제2조(정의) 2항에 따르면 ‘예술인’이란 예술 활동을 업(業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창작, 실연(實演), 기술지원 등의 활동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로 명시하고 있다.
실제로 내 책은 공공도서관이나 사설 도서관에 장서로 비치되어 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대출되는 내 책에 대한 대여저작권료는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의미에서 받지 못하고 있다. 내 장편동화 일부가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적도 있다. 이 때 역시 국가에서는 ‘공익의 차원에서’라는 설명으로 1년에 1만 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내 작품의 사용비로 지급했다. 언제까지 문학 예술인은 국가와 사회에 대가없이 공헌하는 지상천사로 소비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문체부에서 실시하려는 예술인 고용보험의 가입 적용 대상을 가늠하는 시점에 와있다. 문학의 경우,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요건의 예시는 간단했다. 출판사와 갑을(작가가 갑의 위치)관계로 계약하는 경우, 작가가 출판사에 고용되는 상태가 아니니 고용보험 가입 범위에서 벗어난다. 다만, 작가의 경우 출판사와 보수목적 계약 시, 그 계약기간 동안 고용보험에 가입이 가능하다.
또 다른 예로 소설가가 연재 계약을 체결하고 일간지에 작품을 연재하는 기간 동안을 산정하여 고용보험에 가입하고 연재가 끝나면 3개월 간 실업 급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소설가가 신작을 완성한 후, 출판사와 출판권을 설정 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는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 즉 집필 노동을 하는 시간은 순수한 개인 창작활동이니 고용주와 피고용인 관계가 성립되어야만 가입대상이 되는 고용보험 시스템에는 애초에 맞지 않는 활동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작가가 출판사와 보수 목적으로 계약을 한다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문체부에서는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는 경우를 그 예시로 들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발간되는 일간지는 대략 100종이 되는데, 그 중에 소설을 연재하는 지면을 추려보면 그 수는 더 줄어든다. 결론적으로 신문 연재소설 계약을 해서 고용보험 가입자가 될 수 있는 작가는 대한민국에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재까지 작가가 고용보험에 가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작품을 미리 써놓지 않고 기획 단계에서 출판사와 접촉해 출판권 계약을 먼저 해놓은 경우로 볼 수 있다. 일부의 검증된 유명 작가 이외에 작품을 보지도 않고 출판 계약부터 할 수 있는 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
주변에서는 예술인 고용보험은 문학인의 활동 특성상 처음부터 가입이 불가능한 제도라며 외면하는 분들이 많다. 한 마디로 애초에 문학인을 위한 사회보장 제도가 아니라고 자포자기하는 분위기다. 안타깝다. 저 위에 두서없이 장황하게 늘어놓은 나의 직업 활동을 보자면 작가라는 직업군 역시 저임금 고노동에 시달리는 지식 노동자일 뿐이다. 그리고 잠시 잠깐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사회보장 제도로서 예술인 고용보험이 신설된다는 소식에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준비 중인 예술인 고용보험 시스템은 문학인의 직업 특성을 외면한 채 진행되고 있다. 가난해도 좋으니 글만 쓸 수 있게 해달라는 작가의 외침에 국가의 대답은 무엇인지 궁금해지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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