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대회가 가져다 준 '기회의 창'은 올림픽과 패럴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활짝 열릴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상당 부분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른 남북정상회담과 그 '여건'에 해당되는 북미 대화 성사 및 진전에 달려 있다.
일단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여동생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 "빠른 시일 내에 평양에서 뵈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작년 한해 "국가 핵무력 건설 완성"을 향해 속도전을 벌였던 북한이 올해 들어 남북관계를 고리로 삼아 국면 전환을 꾀할 것이라는 점은 상당 부분 예측가능했다. 그리고 평창 대회 참가를 계기로 삼아 남북관계 개선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북한의 이러한 행보를 환영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이고 있다. 북미대화 없는 남북대화는 지속가능하지 못한 게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키자"며 차분한 모습을 보인 것이나, "정상회담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는 발언 속에는 이러한 고심이 담겨 있다.
과거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도 북미관계 개선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다. 2000년 6월 첫 정상회담의 배경에는 김대중 정부와 클린턴 행정부가 페리 프로세스로 의기투합한 게 주효했다. 2007년 10월 2차 정상회담도 그해 초부터 북미대화와 6자회담이 선순환을 그리면서 성사되었다.
그런데 3차 남북정상회담은 과거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1차와 2차 정상회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의 해결 가능성과 맞물려 있었지만, 오늘날엔 북한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상태이다.
또한 과거에는 남북관계의 독자적인 영역이 존재했던 반면에, 오늘날엔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가 촘촘하게 짜여 있어 미국과 유엔의 동의 없이는 남북관계 정상화가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에 따라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여부는 북미 대화를 비롯한 핵문제 해결 진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북미 양측에서 희미하나마 긍정적인 신호가 전해지고 있다. 방한 기간 내내 반북 행보로 외교적 결례 논란까지 일으켰던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11일 귀국편 비행기 안에서 주목할 만한 얘기를 내놨다.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병행하겠다"며, 북한을 상대로 탐색적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펜스는 14일에도 "만약 대화의 기회가 있다면 북한에게 미국의 확고한 정책을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 역시 북한과의 탐색적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을 여러 차례 시사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조선신보>의 보도 내용도 주목을 끈다. 12일자 기사를 통해 "북남 대화와 관계개선의 흐름이 이어지는 기간 북측이 핵시험이나 탄도로켓 시험발사를 단행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타당성이 있다"고 밝힌 것이다.
비록 한미 군사훈련을 중단해야 한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 했지만, 남북대화와 관계개선이 이뤄지는 동안에 핵과 미사일 시험 중단 가능성을 내비친 것 자체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핵과 미사일 문제는 북미간의 사안이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북미 양측에서 발신된 희미한 신호를 연결시켜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를 안게 되었다. 아마도 북한은 평창 대회 참가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과 경제발전을 이루려면, 미국 주도의 제재를 완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핵문제와 관련해 유연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북미대화와 관계 개선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다. 미국으로서도 "북한의 핵탄두 장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보유가 수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고 밝힌 만큼, 최소한 북한의 추가적인 핵과 미사일 시험을 막아야 할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는 이점을 주목해 북미대화 및 6자회담 재개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시험 유예 선언을 맞바꿀 수 있는 타협을 도출하는 데에 외교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강경론의 선두에 서 있는 펜스 부통령이 탐색적 대화 의사를 피력한 만큼, 북미간의 대화 기간 동안에 한미군사훈련을 일시 중단하는 문제도 미국과 집중적으로 협의할 필요가 있다. 남북정상회담의 성사 가능성도 이러한 외교적 노력이 성과를 거두면 자연스럽게 그 여건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북미대화에 너무 큰 기대를 거는 것은 위험하다. 미국은 최근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뿐만 아니라 북한의 탄도미사일도 폐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 최대의 압박을 지속할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위협이 근원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한 비핵화를 협상탁에 올려놓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도 큰 이러한 간극은 북미대화 성사 자체도 불투명하게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화가 이뤄져도 자칫 거친 말싸움으로 끝날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다. 과거의 경험과 최근 북미 양측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말싸움으로 끝나는 북미대화는 양측 강경론의 빌미가 될 수 있다. 우리로서는 최악의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북미대화 및 남북정상회담 성사 노력과 함께 세 가지 추가적인 전략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첫째는 북미관계의 '완충지대'이자 '촉진자'로서의 6자회담 재개 노력이다. 북미관계가 가장 험악했던 시기에 시작된 6자회담은 양측 관계의 추가적인 악화를 방지하고 접점을 만들어 협상의 모멘텀을 제공하는 데에 유용했었다. 특히 6자회담 프로세스에선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도 중재 및 조율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로서는 이 점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또 하나는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합의한 이후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는 한반도 평화포럼의 개시이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대체하기 위한 '별도의 포럼'은 뇌사 상태에 빠진 한반도 비핵평화 프로세스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에 따라 문재인 정부는 7월 27일로 65년째를 맞이하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기 위한 회담 개시에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11월 미국의 중간 선거 이전에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어내는 가교 외교의 백미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역사상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야말로 막장으로 치달아온 한반도 드라마의 극적인 반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내일신문> 2월 13일자에 기고한 글을 대폭적으로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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