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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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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전쟁국가 미국] NSC-68과 한국전쟁 <상>

2차 대전 후 미국의 세계 패권이 완성된 결정적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한 전면적 재무장에 의해서였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미국은 국방비를 일거에 4배 가까이 증액했고 군사 물자 생산도 7배로 늘렸다. 서독과 일본 등 과거 적국의 재무장을 단행했다.

미국이 대대적 재무장에 나선 것은, 그것만이 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수립할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의지를 세계에 관철시키려면 압도적 군사력이 필요했다. 이를 위한 청사진이 1950년 4월 작성된 국가안보회의 문서 68(NSC-68)이다.

그러나 전시도 아닌 평시에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치 기적과도 같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이것이 가능해졌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 주도에 의한 세계 공산화의 시발점으로 간주한 미국 지도층은 국민들에게 전면적 재무장을 설득했고 이를 실현할 수 있었다.

미국은 재무장을 통해 압도적 군사력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유럽과 일본 등 자본주의 선진국을 미국의 경제권에 통합했으며,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을 봉쇄했고,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제3세계의 혁명운동을 진압했다.

이후 미국은 영구 전쟁 국가로 변모했다. 건국 이후 처음으로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등 세계 수백여 곳에 미군 기지를 운용했다. 또한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 아프간전쟁, 걸프전쟁 등을 수행했으며 아직도 중동지역에서 18년째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 경제는 핵무기를 비롯해 폭격기와 미사일 등 전쟁물자 생산이 계속되지 않으면 지탱될 수 없는 전쟁경제로 전환됐다. 이러한 미국의 전쟁 국가적 면모는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 2010년 림팩 훈련에 참가한 미군 함정들. ⓒnavy.mil

2차 대전 발발 직후부터 전후 목표 구상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떠올랐다. 절대무기인 원자탄을 독점했고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확보했다. 미국은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에야 2차 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전쟁 발발 직후인 1939년 9월부터 전후 목표를 구상하고 있었다. 정부가 아닌 재계 주도에 의해서였다.

2차 대전 발발 열하루만인 9월 12일, 미 재계의 두뇌집단(Brain Trust)으로 불리는 외교협회(CFR)가 국무부에 대해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추구해야 할 목표들에 관한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공동연구는 12월 6일 록펠러재단이 첫해 연구비 4만 5000달러 지원을 약속하면서 1940년부터 본격 시작됐다. '전쟁과 평화 연구(The War and Peace Studies)'가 그것이다.

'전쟁과 평화 연구'에는 주로 CFR 소속의 학자, 지식인, 언론인, 관료 등 100여 명이 참여했으며 1940년부터 45년까지 6년간 362차례 회의에서 682개 정책문서를 작성해 대통령과 국무장관 등 최고위 관리들에게 보고했다. 연구보고서는 대통령 2부를 비롯해 모두 25부만 작성됐을 정도로 고도의 비밀 속에 진행됐다. 록펠러재단은 6년간 30만 달러의 연구비를 지원했다.

'연구'의 핵심 목표는 처음부터 미국 경제의 세계적 확장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을 겪은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의 과잉 농산물과 공산품, 그리고 과잉 자본이 진출할 해외 시장을 원했다. 수요 부족, 즉 시장의 결핍이 대공황의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과잉 상품과 자본을 받아들일 해외 시장을 확보해야 미국의 자유와 안보,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 등의 배타적 폐쇄적 경제권을 해체해야만 했다. 배타적 경제권으로 인한 세계 시장의 분열은 곧 2차 대전의 원인이기도 했다.

'연구'의 처방은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었다. 즉 미국의 상품과 자본이 세계 어디로든 진출할 수 있는 국제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1899년 미국의 중국 시장을 목표로 발표한 문호개방(Open Door) 정책을 전 세계로 확대한 것이다.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은 모든 국가들이 공평하게 상품과 자본을 수출할 수 있는 체제가 만들어진다면 단연 미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이미 1차 대전 이후부터 세계 최대 채권국이자 농산물 생산국이었으며 2차 대전 이후에는 세계 공산품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세계적 자유무역 체제의 수립이란 곧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원을 의미했다.

세계 패권 수립의 어려움

그러나 미국의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도 세계를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각자도생을 모색했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특히 두 차례 세계 대전이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선진국 간 갈등의 결과라는 점에서 미국이 추구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향하려는 나라는 거의 없었다.

일례로 해방 후 남한 지역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바람직한 사회 체제로 꼽았다. 또한 역대 헌법 중 제헌 헌법이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규정하는 등 가장 진보적 성향을 띤 것도 전쟁 직후의 세계적 분위기를 말해준다.

미국의 세계 자본주의 복원 프로젝트는 세 단계로 진행됐다. 첫 번째는 다자주의적 무역 제도를 수립하는 것이다. 1944년 미국 주도로 수립된 국제통화기금(IMF)과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1995년 세계무역기구 WTO로 개칭)이 그것이다. 미국은 이들 국제기구를 통해 자유무역을 촉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다른 나라들은 자유무역을 할 여력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들 국가에는 미국 상품을 수입할 달러가 턱없이 부족했다. 국제제도만으로는 자유무역을 실현시킬 수가 없었다.

마셜 플랜

다음으로는 서유럽에 대한 대대적 경제원조였다. 유럽 재건 계획(ERP : European Recovery Program)이 그것이다. 1947년 6월 5일 조지 마셜 당시 국무장관이 하버드대 졸업 연설에서 제창했다는 이유로 마셜 플랜으로도 불린다. 1948년부터 51년까지 4년간 130억 달러를 서유럽 국가들에 원조해 자본주의 경제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실상 실패했다. 우선 국내의 반대가 극심했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은 물론 국민들도 퍼주기라며 강력 반발했다. 당초 290억 달러로 책정됐던 원조 액수가 1949년 말 130억 달러로 반토막 난 것도 국내 반발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 4년간의 경제 원조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의 달러 갭(달러 부족)이 해소될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48년 미국의 수출은 134억 달러로 대부분 서유럽에 수출됐는데, (마셜 플랜이 끝난 이후인) 1952년 유럽의 달러 보유액은 고작 20억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예상됐다.

미국 상품을 사들일 달러가 부족한 서유럽의 선택은 자명했다. 계획경제, 배급경제와 같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을 시행하거나 소련 및 동구권과 물물교환 형태의 교역을 할 수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는 곧 자본주의 경제, 미국 세력권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달러가 없는 서유럽은 친소련, 또는 적어도 중립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다. 미국으로서는 결단코 막아야 할 사태이다. 미국은 자본주의 선진국인 서유럽 국가들과 일본을 세계 자본주의 복원의 핵심 파트너로 지목하고 이들을 미국의 세력권 안에 묶어두려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 영국은 1949년 자국 통화의 평가절하로 경제가 휘청거렸다. 또한 프랑스는 서독의 경제부흥에 한사코 반대했다. 숙적 독일의 재기를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1949년까지 서유럽의 통합 및 경제 부흥은 요원한 일처럼 보였다.

당초 미국은 마셜 플랜을 제창하면서 소련 및 동구권에 대해서도 경제 부흥을 위한 자금 지원을 제안했다. 미국의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미국의 경제적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1947년 7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고 동구권 위성국가들에게도 미국의 지원을 받지 말도록 지시했다. 미국의 자금 지원은 자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로써 미소 간 대결은 첨예해진다.

소련의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

세 번째 시도가 바로 대대적 재무장에 의한 세계 경제 재편이었다. NSC-68이 바로 그것이다.

1949년까지 미국 주도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부활이라는 미국의 프로젝트는 실현 가능성이 극히 낮아 보였다. 특히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세계 전략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소련과 중국, 유라시아의 두 공산 대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 공산화의 유령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핵실험을 비밀리에 단행했다. 며칠 후 미국은 이 사실을 탐지했고, 9월 23일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핵실험을 공식 확인했다. 이로부터 열흘이 채 되지 않은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텐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특히 소련의 핵실험 성공은 미국에 큰 충격이었다. 미국의 핵 독점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핵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일방적으로 세계를 경영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이었다. 핵을 내세워 소련의 이해관계와 의사를 무시한 채 일본을 단독 점령하고 독일의 분단을 밀어붙였으며 (에너지 자원의 보고인) 중동지역에 대한 소련의 진출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제 소련도 핵무기를 가진 만큼 더 이상 미국의 일방주의는 통할 수 없게 됐다.

중국의 공산화도 문제였다. 당초 미국은 중국을 영국, 소련과 함께 전후 세계 경영의 주요 파트너로 상정했다. 이른바 '세계의 네 경찰관(four policeman)'이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 장졔스를 참석시킨 것도 루스벨트의 이러한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그랬던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소련 진영에 합류했으니 미국으로선 큰 타격이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일본의 안보와 행로가 불투명해졌다는 점이었다. 미국의 정책 엘리트는 중국보다는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훨씬 더 높게 봤다. 일본의 산업 능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고도의 숙련 노동자와 산업 능력을 가진 일본이 소련에 넘어간다면 공산권의 세력은 엄청나게 강화될 터였다. 반면 미국에겐 뼈아픈 손실이 된다. 동아시아 전체가 공산화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일본이 미국 진영에 남는다 해도 공산 중국이 버티는 동아시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일본 경제를 지탱해주었던 식민지를 잃었기 때문이다. 전쟁 이전 일본 자본주의는 대만, 조선, 만주 등의 식민지를 통해 원자재와 노동력, 그리고 시장을 확보했다. 또한 중국과의 교역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수입의 17%, 수출의 27%가 대중국 교역이었다.

패전으로 식민지를 잃고 중국 공산화로 중국 시장을 빼앗긴 일본 자본주의의 활로는 오직 동남아뿐이었다. 만일 일본이 동남아지역과 경제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메울 길이 없었다. 그 경우 일본이 살 길은 공산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는 미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본을 미국 세력권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는 동남아를 일본의 배후지로 만들어줘야만 했다.

문제는 동남아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뜨거웠다는 점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 영국 식민지 말라야와 네덜란드 식민지 인도네시아 등에서 민족 해방과 사회주의를 향한 혁명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베트남 북부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독립을 선포했으며 1950년 초 중국과 소련은 이를 승인했다. 인도네시아와 말라야에서는 중국계 시민들이 독립투쟁에 대거 참여했다. 중국 혁명의 영향이었다. 방치할 경우 중국 혁명의 여파가 동남아 전역으로 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공산 아시아의 외딴 섬이 될 것이고 생존을 위해서는 공산권과의 공존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NSC-68

미국으로선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우선 1950년 1월 수소탄 개발에 착수했다. 과학계 자문위원들의 일치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결정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데 따른 자신감의 상실을 만회하기 위한 조치였다.

1945년 이후 미국이 자신의 세계 전략을 마음 놓고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핵 독점 덕택이었다. 핵 독점이 무너진 이제 보다 강력한 무기를 가져야만 했다. 그래야만 잃어버린 자신감을 회복하고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무부와 국방부에 소련 핵실험과 중국 공산화가 미국의 대외정책에 미칠 영향과 이에 대한 대응 방침을 연구할 것을 지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단장 폴 니츠를 의장으로 한 연구 그룹은 4월 7일 NSC-68을 작성해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다.

▲ NSC-68 보고서 ⓒTruman Library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한 목표와 계획에 관한 국무 및 국방 장관 보고서'라는 제목의 이 문서는 소련이 세계 정복이라는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이를 막기 위해 미국은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고서는 "소련은 이전의 패권 추구 국가들과는 달리, 미국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새로운 광신적 믿음에 의해 움직이고 있으며 전 세계에 대한 절대적 권위의 확보를 추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소련과의 갈등은 불가피하게" 됐으며 "군사력의 총체적 우위가 확보되지 않는다면 봉쇄 정책은 공허한 허풍이 될 뿐"이라고 밝혔다.

이제까지 소련과의 냉전이 정치외교적 대결이었다면 앞으로는 군사적 대결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니츠는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강조했다.

"우리가 핵전력의 압도적 우위를 달성하고 제공권을 장악했을 때, 오직 그때에만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억지할 수 있다"

미국이 말하는 억지 정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미국의 정책 수행을 방해하기 위해' 소련이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즉 소련이 미국 정복을 위해 핵 공격을 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핵전력에 대한 니츠의 믿음은 거의 신앙과도 같은 것이었다. 냉전의 고비마다 강경한 군사 대응을 주도했던 그는 1979년 소련과의 2차 전략무기제한협정(SALT2)에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폭력의 최고 단계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면 낮은 단계의 모든 군사 대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한국전쟁, 베를린봉쇄, 그리고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은 전략핵무기의 우세 덕택에 전략적 우위를 누릴 수 있었다"

니츠는 핵전력은 물론이고 재래식 전력의 대대적 증강을 촉구했다. 서유럽에 대한 미 지상군 파병도 요구했다. 미국의 재무장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군사지원과 경제원조, 공산진영에 대한 비밀공작과 심리전 등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마디로 모든 수준의 군사력에서 소련에 대한 절대적 우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NSC-68은 소련이 군사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은 세계 정복을 실현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미 자체 방위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소련은 잘 무장돼 있고 "고도의 준비 태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즉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태이며 그 능력은 서유럽 침공, 노르만디 상륙과 같은 서방측의 반격을 저지하고 영국 공습, 그리고 중동 진출을 동시에 해낼 수 있을 정도라는 것이다. 그러고도 군사력이 남아돌아 "다른 지역에 대한 관심 돌리기 용 침공"을 할 수 있으며 이미 미국에 핵 공격을 가할 수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은 거짓말이다. 소련은 1950년 당시 미국 핵 공격을 위한 장거리 폭격기를 갖고 있지 못했다. 소련이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폭격기를 개발한 것은 50년대 중반이었고 1957년 이후에야 미국에 대한 전략적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1950년 중반 소련 보유 원자탄은 5개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은 299개를 갖고 있었다. 원자탄 탑재 폭격기는 264대나 됐으며 미국 본토는 물론 알래스카, 캐나다, 아조레스, 영국, 아이슬란드,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오키나와 등에 발진 기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츠가 소련의 군사적 의도와 능력을 극도로 과장한 것은 NSC-68의 처방, 즉 미국 및 동맹국의 대대적 재무장을 트루먼 대통령 등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니츠는 소련이 의도적으로 핵 공격을 가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국의 핵 독점 상실에 따른 외교적 주도권 와해를 우려했다. 미국 당국자들을 당혹케 한 문제의 근원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이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배에 따른 힘의 공백을 소련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이었다. 세계 각지에서의 자급자족 경제와 계획 경제의 증가, 공산당의 성장, 그리고 제3세계에서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의 발흥을 두려워했다.

달러 갭, 유사회경제적 혼란에 따른 유럽 통합의 부진, 중국 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 베트남 호치민의 압도적 인기 등 제3세계의 탈식민화 열풍 등 미국의 세계 전략에 불리한 상황들이 쌓여가면서 소련이 이를 이용할 것을 우려했다. 핵능력을 확보한 소련이 보다 대담한 외교 공세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보다 대담해진 소련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핵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야 한다는 게 니츠의 판단이었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다는 것이 니츠의 목표였다. 군사적 우위야말로 소련으로부터 외교적 주도권을 빼앗아오고 냉전을 수행할 다양한 옵션을 확보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국무장관 애치슨도 니츠의 판단에 동의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소련 주위를 봉쇄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선택의 자유는 소련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전쟁 수행에 필요한 것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방비의 대대적 증액이 필요했다. 니츠는 내심 국방 예산의 3!4배 증액을 예상했으나 재무장에 필요한 재원 규모를 명시하지는 않았다. 재정 적자를 극도로 꺼려했던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1950년 당시 미국의 국방 예산은 130억 달러, 니츠의 계산대로라면 400~500억 달러로 대폭 예산을 늘려야 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NSC-68이 제시한 재무장을 원칙적으로 승인하면서도 필요 재원을 산출해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5월 초, '다음해 국방 예산은 기존보다 적어질 것'이라고 공언했다. 니츠 등이 기대했던 국방 예산의 대대적 증액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NSC-68의 실행이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니츠는 6월 7일 휴가를 떠났다. (하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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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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