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으로 이사를 온 건 3년 전이었다. 스무 살 때 이후로, 서울에 살면서 나는 늘 학교 주변 동네에 살았다. 처음에는 기숙사에 살았고, 그 다음에는 정문 앞의 동네로, 이후에는 두 개의 후문 쪽에 한 번씩, 그리고 지금은 보다 가정집이 밀집한 동네로 이사 왔다. 다른 거리에는 원주민 보다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학생들이 주로 살았다. 금방 떠나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에는 역사가 쌓이지 않는다. 그런 거리는 늘 새로운 수돗물로 물갈이 되는 분수와 같다. 하지만 땅을 자신이 오랫동안 살아갈 터전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거리는 동네가 되고, 마을이 된다.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에 대해 말을 하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넨다.
처음 이곳에 이사 올 때만 하더라도, 거리는 옛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10여 년 전, 대학에 입학했을 때 봤던 거리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식당, 술집, 가게, 마트, 건물 따위가 거의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지난 3년여 간, 무슨 일인지 거리는 급속도로 변해갔다. 학생들이 즐겨 찾던 식당과 술집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다. 24시 편의점이 하나 생기더니, 그 맞은편에는 신축 건물과 큰 마트가 생겼다. 나는 집에서 글을 쓰는 일이 많았는데, 매일같이 새로운 건물을 올리며 망치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래서 자주 카페나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곤 했다.
어느 여름 저녁, 평소와 같이 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계속 사이렌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어보니, 복도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방문과 창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섰다. 어두워야 할 하늘은 시뻘건 불빛으로 가득했다. 입과 코로 연기가 들어와 목이 막혔다. 불은 무섭게 타오르며 오래된 건물 두 채를 집어 삼켰다. 수십 년간 가게를 운영해왔던 식당 아주머니가 울고 있었다. 신입생 때부터 몇 번인가 간 적 있던 식당이었다. 닭똥집이나 감자탕 따위를 파는 곳이었는데, 비슷한 식당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이 거리에서 몇 남지 않은 곳이었다. 동네 주민들이 모두 나와, 소방차가 불 끄는 걸 바라보았다. 새벽녘 불이 진화되고, 다시 나가보았을 때 식당 아주머니 곁을 여태 지키고 있는 동네 사람들이 보였다.
그날 뒤로, 어째서인지 거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몇 년을 지나쳤지만, 한 번도 제대로 눈여겨 본 적 없는 가게들이 하나둘 보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수백 번은 지나쳤지만, 나는 이곳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인간의 눈이란 기만적이어서, 철저하게 자신이 보고 싶거나 봐야할 것만을 본다. 어쩌면 그날 봤던 불꽃의 선명함이 전염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불꽃보다 더 생생하고 현실적인 것은 없다. 눈앞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본 사람이라면, 눈이 부시는 선명함과 귓가를 두들기며 타오르는 소리, 온 몸에 번져오는 뜨거움의 생생함을 이해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들에 대해, 흔히 '불꽃같다'고 말한다. 불꽃같던 시절, 불꽃처럼 타오르는 마음, 정념, 열정.
나는 거리 양옆으로 고무신이나 슬리퍼를 쌓아 놓고 파는 신발 가게, 몸빼 바지와 속옷을 파는 옷가게, 직접 짠 참기름이나 고추기름을 파는 방앗간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몰랐다. 그 거리는 집집마다 다른 것을 팔고 있었다. 쓰레기봉투는 쌀가게에서만 살 수 있었다. 달걀을 살 수 있는 집이나, 청소도구를 살 수 있는 가게도 따로 있었다. 편의점과 마트에만 익숙했던 내게, 과일가게나 달걀 집에서 무언가를 사본다는 경험은 그 자체로 낯선 것이었다. 나는 왜 이 거리에 '시장'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전에는 그저 몇몇의 식당이나 술집 정도가 있는 곳인 줄 알았다면, 이제는 확실히 거의 모든 것을 파는 '시장'이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못 보고 살아왔을까? 아니, 안 보고 살아왔을까. 사람들은 늘 새롭고 멋진 동네에 대해 이야기한다. 뜨는 동네, 핫플레이스, 모두가 욕망하고 선망하는 거리로 불나방처럼 몰려든다. 그러한 거리에 '먼저' 당도하여 사진을 찍고 소셜 미디어에 올린다.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그곳 참 좋더라'고 말하면, 또 얼른 가고 싶어 안달이 난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매번 열풍이 이는 국내외의 관광지가 있고, 사람들은 질 새라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타인들이 보는 것을 나도 봐야하고, 그들이 느낀 것을 나도 느껴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아름다움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나 역시 그런 유행에 참여하곤 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다. '핫한' 관광지나 '뜨는' 동네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본 걸까?
한 마리 불나방이 되어 날아간 곳들에서, 내가 본 것이 삶은 아니었다. 서로의 선의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 모든 곳들은 삶을 몰아내고, 박멸하고, 표백하여 만든 어떤 '깨끗한' 공간이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깨끗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세계, 한나절의 커피 값을 지불하면 얻을 수 있는 반짝반짝함이 있는 세계였다.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아닌, 잠시 왔다 떠나는 그 무수한 소비의 거리들이 하찮게 느껴졌다.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우리는 삶을 사는 대신 삶을 소비한다. 우리의 도시는 온통 그런 공간들로 채워지고 있다.
도시는 무섭게 바뀌어 나간다. 자본은 누군가의 삶의 공간이었던 기존의 거리들을 쓸어내며, 그 위에서 소비의 잔치를 벌인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기존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개선되는 게 아니라 발 빠른 업자들이 분양권을 거래하며 이득을 챙기고, 새로운 입주민의 공간이 생긴다. 성장하는 경제, 오르는 집값은 늘 가진 자들이 더 가지는 기회일 뿐이다. 오래된 거리가 '뜨는' 거리가 되면서, 사람들은 또 하나의 '깨끗한 거리'가 생겼음에 즐거워하며 찾아가 사진을 찍고 자신의 행복을 자랑한다. 분명 세상은 더 개발되고 깨끗해지고 정돈되고 있는데, 정작 삶이 있어야 할 공간은 사라지고 있다.
이 거리가 어느 순간 낯설게 보였던 것은 나 역시 한 명의 젊은이로서 익숙하게 된 그런 삶의 방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부지런히 다녔던 거리 어디에도 나의 역사는 머물 곳이 없다. 이 낯선 도시에 내가 새겨진 곳은, 그나마 내가 몸을 담았던, 누추하고 허름한 골목들이다. 나는 복고 지향적의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처럼 늘 새롭고 세련된 것에 매혹되는 소비사회의 현대인이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되돌아보는 삶에서, 종종 마주하는 기억들에서, 자주 내가 삶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무엇이 내 삶을 내 삶이게 하고, 나를 나이게 하는지 이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해답이나 진리를 알 리 없겠지만, 그 단서가 내가 잃어가거나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새겨져 있을 거라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늘 바라는 게 있었다면, 삶을 정확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을 정확하게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많은 순간들이 무엇을 보는지도 모른 채, 무엇을 위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간다. 나는 내가 사는 거리를, 또한 내가 살게 될 거리를 보다 정확하게 응시하며 나아가고 싶다. 이 거리에 무엇이 있고, 또 앞으로의 거리에 무엇이 있을지를 알고 싶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내가 있는 곳에서 보는 것이 그저 화려하고 달콤한 이미지만은 아니기를 바란다. 오히려 쉽게 눈에 띠지 않는, 그러나 우리 삶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깊고 오래된 선의를 보고 싶다. 흩어지거나 사라지지도, 소비되거나 소모되지도 않는 삶의 선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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