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미녀와 야수>, <라라랜드>,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꿈과 사랑은 어떻게 현실이 되는가
<미녀와 야수>의 벨은 이상하다. 그녀는 늘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처음부터 정해진 마을의 삶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생선가게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 생선을 팔고, 매일 조금 다른 빵을 먹고, 한정된 가십거리를 나누는 수다의 삶에 벨은 관심이 없다. 그녀는 책을 끼고 살면서 마을 바깥의 먼 세상을 꿈꾼다. 책은 항상 이곳을 떠나게 하여, 먼 곳의 삶을 살게 해준다. 사람들은 그녀가 독특하고 이상하기만 하다. 깊은 꿈에 잠긴 그녀는 수수께끼 같은 여자이다.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혼자 그를 찾아 떠난다.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성에 당도하는 여정, 아버지를 찾아가는 길은 곧 마을이라는 현실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다. 그곳에는 마법과 야수, 모험과 사랑이 있다. 게스톤으로 상징되는 현실은 그녀를 끊임없이 그 환상의 세계에서 끄집어내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더 환상의 편이 된다. 야수로 상징되는 환상은 그녀를 성에 가두고 옭아맨다. 그녀가 떠나지 못하게 하면서, 그녀 자신이 그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마법의 성이라는 환상에는, 더 많은 환상이 숨 쉬는 서재가 있다. 그녀는 서재가 주는 환상의 매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야수의 성을 거짓으로 몰아세우지만, 그녀가 찾아가 지켜낸 환상은 그녀의 삶이 된다. 현실에서 벗어난 꿈은 그녀가 쟁취하는 사랑과 하나가 된다. 동화의 서사에서 현실은 꿈을 이길 수 없다. 꿈은 늘 사랑과 연합전선을 이루어 현실을 이겨내고 몰아낸다. 하지만 동화에서 한 발을 뺀다면 꿈은 사랑과, 사랑은 현실과, 현실과 꿈은 균열을 일으킨다. 우리는 셋 중 하나를, 혹은 둘을 선택해야 한다.
<라라랜드>의 미아도 벨처럼 꿈을 꾼다. 하지만 벨처럼 꿈을 좇아 태어난 고장을 떠났음에도, 마법처럼 꿈이 펼쳐지진 않는다. 그녀는 벨처럼 손쉽게 현실을 몰아낼 수 없다. 그녀의 꿈이 바로 현실에 발 디디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벨처럼 마을의 군중(현실)을 등지고 환상의 세계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세상의 대중(현실)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실제 삶에서 꿈과 현실은 착종되어 있다. 우리는 현실을 버리기 보다는 지배하기를 원한다.
미아는 꿈속에서 사랑을 얻지 못한다. 꿈과 사랑을 동시에 얻은 게 아니라, 꿈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랑을 잠시 만난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서로의 꿈을 지지해주는 삶의 동반자가 된다. 그럼에도 둘의 꿈은 사랑 안에서 완성되지 못한다. 둘은 서로에게서 사랑의 힘을 수혈 받아 각자의 길을 따라 나선다. 세바스찬은 '이곳'에 머무르며 클럽을 차리는 꿈으로, 미아는 '저곳'에 가서 배우가 되는 꿈으로 분리된다. <라라랜드>는 동화가 되다 만 현실이다. 미아는 사랑을 버리고 꿈을 택한다. 그러나 여전히 둘 중 하나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반쪽자리 동화의 정서가 있다.
미아는 파리로 떠나 새로운 사랑을 한다. 하지만 미아와 세바스찬의 관점에서, 로맨스는 종료되었다. 그래서 보다 현실적으로, 꿈은 얻었지만 사랑을 얻지 못한 미아의 이야기를 상상해본다면 어떨까? 그 이야기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희는 비록 꿈꾸던 배우가 되었지만, 사랑을 얻지 못했다. 그녀는 여자배우가 불륜을 택했을 때 잃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감수하고 사랑을 택했다. 하지만 결론은 동화의 끝이다. 유부남인 감독은 그녀를 택하지 않았다. 반쪽짜리 동화마저도 끝난 현실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영희의 세계에는 더 이상 그녀를 이끌던 빛나는 꿈이 없다. 그녀를 따라다니는 건 검은 환상 뿐이다. 그녀는 사랑을 좇아, 사랑과 꿈이 모두 실현된 세계를 꿈꿨다. 그러나 버려진 사랑과 꿈은 키메라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난다. 영화 내내 '검은 남자' 유령처럼 그녀 주위를 배회한다. 검은 남자는 동화가 끝난 현실의 꿈이다. 그녀는 현실을 마주하듯 바다를 바라본다. 벨이 믿었던 상상의 세계, 미아가 믿었던 꿈은 바다처럼 영원히 자리 잡은 현실 위로 흩어진다. 꿈과 사랑은 동화에서처럼 완결되지 않는다. 그보다 자주, 현실은 그 모든 걸 쓸어가 버린다. 그렇기에 현실을 마주하는 영희의 고독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사랑하는 자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영희는 구원받지 못했다. 그녀는 타인이 말하는 허위의 삶, 가짜 같은 인생 대신 진짜 사랑이 있는 삶을 택하려고 했다.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가짜이므로, 오직 사랑을 택함으로써 진짜 삶을 얻고자 했다. 그 삶을 얻을 수만 있었다면, 그녀에게는 구원과 같았을 것이다. 애초에 벨이 마을 사람들을 거부하며 자신의 환상을 택했듯이, 영희 역시 타인들의 평판보다는 자신의 사랑을 택하고자 했다.
하지만 영희의 결단은 상대방의 포기 때문에 실패한다. 애초에 그녀가 원했던 '진짜 삶'은 자신의 선택뿐만 아니라, 상대방이라는 타자의 선택 역시 요구했다. 동화는 타자가 개입함으로써 실패한다. 애초에 동화는 두 사람의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동화적 구원은 차이가 아니라 동일성에 의해 일어난다. 두 사람은 같은 세계를 꿈꾸고, 같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러한 동화적 구원의 불가능성은 이미 <라라랜드>에서 예견되어 있었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각기 다른 꿈을 꾸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를 구원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로를 구원의 품에 안아주지 못했다. 오히려 서로를 각자의 구원으로 떠밀었다. 미아는 세바스찬에 힘입어 단막극을 연기하고 스타가 된다. 세바스찬은 미아에 힘입어 원래의 꿈이었던 클럽을 차린다. 하지만 각자가 도달한 구원의 지점에 서로는 없다. 그들은 스스로 구원을 쟁취해야 했다. 구원 이후에는 그에 걸맞은 만남이 있을 것이다. 미아가 새로운 사랑을 만났듯이, 세바스찬 역시 새로운 사랑을 만날 것이다. 둘의 서사에서 구원의 이야기는 지연되거나 파기되어 있다.
하지만 <미녀와 야수>의 두 연인은 확실히 서로를 구원해낸다. 벨은 야수를 저주에서 꺼내어 인간으로 되돌리고, 야수는 벨을 마을(게스톤)로부터 끄집어내어 꿈의 세계에 초대한다. 둘은 모두 환상과 책을 사랑한다. 그들의 성은 사랑과 꿈속에 완벽하게 자리 잡는다. 그들의 동일성은 더 이상 어떠한 타자성도 허용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구원의 서사는 동일한 욕망 아래 용해되는 두 삶의 이야기다.
사랑하는 자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적어도 구원의 관점에서, 가능성은 오직 동일성에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구원은 불가능함을 의미하는 셈이다. 현실의 그 어떠한 존재도 서로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른 두 사람이 동일한 꿈속에서 완성될 수는 없다. 두 존재의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타자성이 개입한다. 서로는 조금씩 다른 꿈을 꾸고, 다른 입장을 가진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삶이란, 동일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껴안고 버티는 것이다.
세 영화는 모두 동일성을 향해 달려가지만, 동일성이 어떻게 꿈과 허구에 불과한지를 알려준다. 영희와 상원의 서사에는 두 사람의 동일성 추구에 타인이라는 타자성이 개입한다. 그들은 두 사람의 동일성을 위해 타자성을 배제하려 했다. 가족의 불행이나 세상 사람들의 평판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은 그 모든 타자성을 제거하고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구원이 불가능함과 마찬가지로 타자의 제거도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희와 상원의 서사는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라라랜드>에는 미아와 세바스찬이 함께했던 아주 짧은 동화적 시간이 있다. 그들은 함께 같은 미래를 꿈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아의 꿈이 여배우가 되어 떠나는 것이었다면, 세바스찬의 꿈은 재즈라는 과거를 복원하여 머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서로의 차이를 보다 섬세하게 파악하고 조율할 의지와 시간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틈과 차이를 껴안을 용기가 필요했다. 그들은 구원의 환상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함께하는 삶을 마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각자의 구원이 아닌 함께하는 삶을 얻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반쪽짜리 동화가 아닌 온전한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반면, 벨과 야수에게는 이 모든 게 비교적 손쉬운 일이었다. 그들은 성에서 같은 책을 읽으며 같은 꿈을 꾸면 되었다. 몰려오는 타인들(마을 사람들)이야 물리치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마을의 밖, 즉 현실의 바깥에서 살아간다. '사랑하는 자가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은 인간이 '타자성에 해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사실, <미녀와 야수>조차 이 물음에 긍정적인 대답을 주지 않는다. 미녀와 왕자가 만나더라도, 그것은 현실(마을) 바깥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 한편의 동화조차 구원이 현실에서 불가능함을 다시 확인케 한다.
사랑이 권력과 만날 때
구원이 불가능한 현실에 남는 것은 모종의 권력관계다. 동일성의 꿈은 차이 앞에 무너지고, 차이는 동일성의 권력(폭력)에 무릎 꿇는다. 물론, 이때 동일성의 권력이란 실제로 두 존재가 동일해질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권력은 서로 간 차이의 존재를 강제로 동일해보이게끔 가하는 압력이다. 모든 권력은 힘 아래 타자를 복속케 하고 동일하게 만들고자 한다. 애초에 꿈과 구원, 환상과 동화의 일이었던 동일성이 현실에서는 폭력으로 변모되어 작동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는 분명한 권력관계를 내포한다. 영희는 권력을 지닌 유부남인 성원을 일방적으로 기다리는 존재로 묘사된다. 어디까지나 선택권은 현실적 권력자인 성원이 쥐고 있다. 가족과 보다 큰 사회적 지위에 구속된 그의 마음속이 더 복잡할 수 있겠지만, 둘의 관계를 확정지을 수 있는 건 성원이다. 그는 기존의 생활과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권력 없이 사랑을 선택한 영희만이 고독 속에 남겨진다. 그녀는 거의 모든 것을 잃는다.
현실에서 관계는 권력에 따라 움직인다. 동일성은 구원이 아니라 권력으로 실현된다. 영희는 권력을 지닌 남성에 의해 선택을 받거나 그러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영희가 그에게 선택을 받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구원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잃어야 할 평판과 그 밖의 삶이 존재한다. 여기에서 관건은 남자가 '얼마나 권력을 쥐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남자가 그녀가 잃을 평판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다면, 그녀는 그 동일성 안에서 숨 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가 보다 적은 권력을 가진 존재라면, 둘은 현실 밖으로 밀려나 표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어느 쪽이 되든, 그것은 꿈과 구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과 권력의 이야기가 된다.
<라라랜드>의 서사를 결정짓는 것 역시 권력이다. 그들은 모두 거의 권력 없는, 혹은 유사한 권력을 가진 존재로 만나게 된다. 관계는 둘 중 한쪽이 권력을 쥘 때 틀어진다. 세바스찬이 밴드에 들어가 일종의 현실적인 권력을 얻기 시작하자 미아는 혼자 남겨진다. 세바스찬은 레코딩과 투어의 바쁜 여정을 소화하게 되고, 미아는 외로움을 견디며 꿈을 좇는다. 이 관계가 다시 역전되는 때는 미아가 오디션에 합격하는 순간이다. 세바스찬은 남겨지고 미아는 떠난다. 현실에서 권력은 관계를 결정짓는다.
다만, 그들은 여전히 반쪽짜리 동화 속 주인공일 수 있었다. 이는 세바스찬 덕분이다. 그는 현실과 동화, 권력과 구원의 중간쯤에 사는 존재이다. 그는 인기 있는 밴드의 일원이라는 권력의 길을 걷다 말고, 꿈의 세계로 돌아간다. 잊혀가는 재즈가 여전히 남아 있는 세계, 꿈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만약 이 영화가 완전한 현실의 서사를 자처했다면 세바스찬은 그의 새로운 재즈를 위해, 미아는 배우의 삶을 위해 각자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되돌아온 덕분에, <라라랜드>는 동화와 현실의 중간에 위치하게 되었다. 훗날 미아가 되돌아와 세바스찬의 클럽에서 잠깐 조우하는 환상의 시간은 그 덕분에 가능했다.
반면, <미녀와 야수>는 여느 동화처럼 동일성의 꿈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다만, 벨은 확실히 야수보다 우위에 있다. 그녀는 구원의 칼자루를 쥔 존재이기에, 야수를 포함한 성의 모든 존재가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를 단순한 권력관계로 볼 수는 없다. 야수가 그녀에게 선택받는다면, 그는 단지 생명을 얻게 된다. 그가 얻는 것은 정확히 그녀와 함께하는 삶뿐이다.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벨은 그를 통해 서재를 포함한 꿈의 세계를 얻는다. 그녀가 얻는 것은 그와 함께하는 꿈밖에 없다. 그렇기에 <미녀와 야수>는 현실과 관력의 이야기가 아니라, 동화와 꿈의 이야기로 남는다.
영희와 성원의 서사는 결과적으로 권력 없는 여자가 권력 있는 남자에게 버려지는 이야기로 읽힌다. 미아와 세바스찬의 서사 역시 동화를 선택한 남자가 현실을 얻은 여자에게 버려지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그러나 벨과 야수의 서사는, 처음부터 권력도 현실도 바라지 않은 두 남녀가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다. 권력 이야기는 우리를 씁쓸하게 하고, 반쪽짜리 동화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또한 한편의 완성된 동화는 우리를 미소 짓게 만든다.
우리의 삶은 동화와 현실의 중간 어디쯤에 있다. 때로 우리는 권력 앞에 씁쓸해했다가, 잃어버린 꿈과 사랑 앞에 슬퍼지며, 실현된 행복 속에서 미소 짓는다. 벨과 미아, 영희는 모두 각자의 꿈과 사랑을 좇아 떠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항상 타자성과 조우한다. 각각의 서사에 따라, 타자성은 완전히 제거되기도 하고, 일부만 극복되기도 하며, 어찌할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로 남기도 한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꿈이고 현실이며, 종국적으로는 그 모두를 포함하는 삶이다. 꿈이든 사랑이든 현실이든, 그 중 어느 것 하나가 빠진 삶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전혀 다른 지평에 존재하는 듯한 이 영화들에 동시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이토록 우리 삶의 조각들을 찾는 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또 새로운 벨이나 미아, 영희를 찾아 한 편의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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