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동네에는 '선 의상실'이 있다. 의상실에 갈 일이 없으니, 몇 년을 살면서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곳이다. 어느 날, 언제나처럼 그 앞을 지나가는데 의상실이 열려 있는 게 보였다. 한두 평 남짓한 공간에는 천 같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아주머니 혼자서 부지런히 무슨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의상실'이 대체 무엇을 하는 곳일까, 궁금해 하며 내 방을 향해 걸었다. 의상실이라고는 갈 일도 없었을 뿐더러, 본 적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의상실의 이름이 제법 철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선'은 주인의 끝 끌자 이름이거나, 진선미(眞善美) 중 한 글자, 아니면 남녀가 '선을 본다' 할 때의 선을 의미할 듯싶다. 어느 쪽이든 해석은 가능하다. 자신의 이름을 딴 경우를 빼고, 앞의 경우는 착한 의상실을 뜻할 테고, 후자의 경우에는 자신을 '선 보이기' 위해 찾는 의상실이라는 의미가 된다. 의상실이 주로 여성의 정장을 팔거나 수선하는 곳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후자의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인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비교적 적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여성 정장이 가장 중요한 곳은 '선 자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선 의상실은 꽤나 당시의 욕구에 적중한 이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의상실이라는 개념이 낯설었던 내게는 '선의 상실'이 아무래도 더 자연스러웠다. 선이 사라졌다든지, 선의를 잃었다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실제로 처음에는 그곳이 '의상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오히려 무슨 캐치프레이즈라 생각하며, 무심하게 지나치기만 했다. 그러다 한 번, 그 단어를 의식하고 나자 그 의미는 내 머릿속 한쪽에 박혀버렸다. 나는 오래된 골목에 살고 있었다. 옛 흔적들이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그러나 기억하기 무섭게 상실되어가는 거리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사를 하고 있던 만화책방이 문을 닫았다. 야채 가게가 있던 자리에는 신축 원룸이 올라가고, 오래된 식당은 편의점이 대체했다. 오랫동안 터 잡고 살던 원주민에게는 선의일 리 없는 변화였다.
한번은 선 의상실에서 멀지 않은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른 적이 있었다. 미용사는 비교적 젊은 편이었는데, '선의 상실'은커녕 선의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는 요구르트 하나를 주고는, 무척 공을 들여 머리를 깎아 주었다. 나는 카드 한 장만 들고 다니는 게 습관이 되어 있어서 아무 생각 없이 내밀었는데, 그는 무척 미안해하며 자기 가게에는 카드 기계가 없다고 했다.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어서, 내가 곧바로 돈을 뽑아 오겠다고 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하며 다음에 돈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약간 당황하여, 다시 금방 돈을 뽑아 오겠다고 말했지만, 그는 그럴 필요가 절.대.로. 없다면서 다음번에 지나갈 때 돈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이름과 휴대폰 전화라도 남기려 했는데, 그는 그러지 말라면서 거의 나를 쫓아내다시피 했다. 외상을 달아본 건 초등학생 때 동네 문방구에서 이후 처음이었다. 더불어 그날은 내가 처음으로 왁스를 사서 머리에 발라본 날이기도 했다. 도저히 그가 깎아준대로는 나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며칠 뒤 이발비를 갖다 주었다.
거리는 상실되어 가고 있었는데, 선의는 남아 있었다. 동네에는 제법 큰 마트가 들어섰지만, 가끔은 작은 채소가게나 과일가게, 구멍가게를 이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진 채소가게 할머니는 상추를 사면 늘 깻잎을 서비스로 주었다. 과일가게에서 딸기를 사면, 수박을 몇 조각 얻어먹었다. 세탁소 아저씨는 옷을 여러 벌 맡기면, 항상 얼마를 깎아주었다. 내가 사는 원룸의 집주인은 늘 고장 난 데가 없는지 물어보고, 사소한 것이라도 고쳐주었다. 감자나 고구마를 쪄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나중에는 집주인이 바뀌었는데, 전 주인은 떠나기 전에 몇 달 밀려있던 관리비도 정산하지 않고 떠났다. 여유라면 여유였고, 선의라면 선의였다.
이 정신없이 나아가는 도시에서, 옛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이 동네가 나는 전혀 싫지 않았다. 꽤나 화려한 시내 근처의 오피스텔 따위로 살 곳을 옮겨보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과거의 흔적은 깡그리 지워내고, 정갈한 카페와 술집들이 골목골목 자리 잡고 있는 세련된 동네로 말이다. 하지만 그런 동네에 살았다면, 내가 이만큼 나의 동네에 정이 들었을지, 혹은 이렇게 동네를 들여다봤을지 모르겠다. 내 소유의 집이 있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여기는 나의 동네라는 느낌이 든다. 지방 출신의 이방인이 낯선 서울 땅에서 그런 기분을 받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공간에 산다. 하지만 단순히 물질적 공간에 사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유대가 만들어내는 평온, 언제까지고 공존이 이어질 거라는 믿음, 이 땅을 넘어선 내가 속한 추상적 세계에 대한 감각 속에 살아간다. 이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선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속한 땅과 나를 둘러싼 세계가 보내는 선의에 기대어 우리는 이 하루를, 이 삶을 버텨낼 수 있다. 반대로, 나에 대한 악의는 물론이고, 완전한 무관심조차 견디기 힘들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과 관계 맺고 소통하는 것이다. 나에 대해 선의를 가진, 호의적인 세계 혹은 타자와 말이다.
세상은 어느덧 선의를 주고받는 공간 보다는, 선의를 돈으로 구매하는 곳이 되었다. 그렇기에 '선의 상실'이라는 말이 그토록 내 머릿속을 따라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타인의 순수한 선의를 믿을 수 없는 세계에 산다. 모든 선의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나 계산이 있을 거라 어렵지 않게 짐작한다. 결국 '더 큰 이익'을 위해 행하는 '계산적 선의'라는 자본주의적 논리를 벗어난 선의를 좀처럼 상상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이발비를 지불하고, 여느 때처럼 선 의상실을 지나다 문득 내가 삶 전체를 통해서 진.실.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순수한 선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근본적으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집요하게 묻다보면, 그 종착지에는 어떤 종류의 ‘행복’이 있다. 그 행복은 타인들을 지배하는 것도, 타인들로부터 찬사를 얻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타인들과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어떤 미래, 그런 선의로 가득한 삶을 꿈꾸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진심을 다해 누군가에게 선의를 주고, 또 그로부터 선의를 받는 것으로 가득한 세상이야말로 유토피아는 아닐까? 나아가 사랑에서 늘 하는 고민이란, 이 사람이 정말로 순수한 선의로 나를 대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저 순수한 선의를 주고받는 삶이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선의가 습관처럼 남아있던 거리는 이제 허물어져 가고 있다. 내가 붙잡고 싶은 것은 옛것이 되어버린 삼색 미용실 표시등이나 추억의 비디오 대여점, 오래된 방앗간이 아니다. 그저 그 사이사이를 이어주고 있던 낡은 선의다. 어쩌면 과거에도 그런 선의란 그다지 순수하게 존재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나의 상상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그런 선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계에 살고 싶다. 또한 자본과 서비스로 환원되는 세련된 거리보다는, 그런 선의의 흔적이나마 엿볼 수 있는, 이 낡은 거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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