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0월 12일 저녁 7시 45분. 세상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눈이 KBS 1TV로 향했다. KBS가 야심차게 만든 교양 프로그램 <세계를 달린다> 제1편이 방송된 순간이다.
당시까지 한국은 세계로부터 고립된 섬이었다. 한국인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했다. 미국의 시선, 일본의 시선, 유럽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당시 <세계를 달린다>는 직접 우리의 눈으로 '무엇이 그 나라를 번영케 하고, 무엇이 그 민족을 활기차게 하는가.' '겉으로 활기있고 번영한 나라에는 무엇이 아킬레스 건인가.' '외국인이 쓴 책으로 읽고, 외국인이 만든 프로그램으로만 보아왔던 세계는 진정한 세계인가.'라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KBS가 야심차게 제작한 프로그램이었다.
<프레시안>에 옛 일제의 만행을 되새기게끔 하는 취재 일기를 여러 차례 연재한 이동석 PD가 <세계를 달린다> 프로젝트의 선구자였다. 당시 이 PD팀은 현대자동차의 지원을 받아 국산차 석 대와 취재팀 9명으로 구성된 인원으로 남미 대륙으로 무작정 건너가, 우리 눈으로 바라본 남미 대륙의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줬다.
이 PD의 당시 여행담을 총 열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제는 세계의 품에 안긴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법한 에피소드도 눈에 띌 것이다. 그러나, 1987년 한국은 영화 <1987>에서 보듯, 지금과는 다른 체제였다. 아직 소련과 중공이 건재했다. 냉전의 한가운데에서 북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에 실질적 테러를 감행한 위험국가였다.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이 펼쳐지기 전이었고, 한국인의 외국 여행은 규제되었다. 고립된 섬에서 출발한 이들이 드넓은 세상을 마주하던 시대를 그린 여행기이자, 누구보다 먼저 큰 지구를 경험한 이들의 여행담을 독자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이 기획을 정리했다. 편집자.
멀고도 먼 길이었다. 벌써 사흘째를 달리고 있었다. 하루에 1000km 안팎을 달렸으니 지금까지 최소한 2000km는 넘었을 것이다. 길 왼쪽에는 지평선 저 끝까지 한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과 실바람에 살랑거리는 풀들, 선 채로 풀을 뜯거나 앉은 채로 오수를 즐기는 듯 보이는 소떼들, 이름을 알 수 없는 휘익 지나가는 새들, 그리고 이따금씩 경계를 표시하는 목장의 철조망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길 오른쪽에도 지평선 저 끝까지 한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과 그 위에 살랑거리는 풀들, 선 채로 풀을 뜯거나 앉은 채로 오수를 즐기는 듯 보이는 소떼들, 이름을 알 수 없는 휘익 지나가는 새들, 그리고 이따금씩 경계를 표시하는 목장의 철조망뿐... 거울처럼 왼쪽과 대칭을 이루는 모습이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그 대칭의 복판으로 지루하게 뻗은 포장길 달리기를 사흘째. 우리는 남아메리카 대륙 아르헨티나의 대초원 팜파스를 달리고 있었다.
기록에는,
소떼가 길을 횡단하면 그 길을 달리는 차량이 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만큼 초원에 소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국경 동쪽 대서양에서 초원길을 일주일동안 달려야 서쪽 국경 안데스산에 닿을 수 있다고 했다. 초원이 그만큼 방대하다는 뜻이었다. 토호의 저택은 정문에서부터 10분 동안 차를 달려야 현관에 이른다고 했다. 그만큼 스케일이 크다는 뜻이었다. 아르헨티나가 그렇고 대초원 팜파스가 그렇다는 뜻이었다. 사흘째가 되는 오늘까지 높건 낮건 정말 산을 보지 못했다. 기록대로면 대륙의 동쪽 끝에 있는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좋은 공기'라는 뜻)를 떠난 우리는 오늘 달리고 또 나흘을 더 달려야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안데스산맥 입구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가 1987년. KBS가 <세계를 달린다>라는 이름으로 한국번호판을 그대로 붙인 한국산 승용차 3대를 대륙으로 수송하여 타고 남미 대륙을 4개월 동안 종횡단취재하는 한국 방송 사상 최대 규모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중이었다. 9명으로 구성된 취재팀이 야성미 넘치는 그 대륙을 가로와 세로로 달리며 부릅뜬 눈으로 '무엇이 그 국가와 민족의 생사를 결정하는가'를 찾아내는 대장정. 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발대식을 생중계방송까지 했던 이 의욕 넘치는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에서 나는 제작을 총지휘하는 메인 PD였다.
대륙에 당도한지 달포나 지났을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대도시 취재를 마친 후 찾은, 좌우가 똑같고 앞뒤가 똑같아만 보이는 이 팜파스는 그저 넓고, 그저 기름지고, 그저 소가 많았다. 그러나, 이런 천혜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여 이들은 축구장에서 불만스러운 심판에게 맥주병이나 달걀 대신 인플레이션으로 가치가 떨어진 동전을 던지는 '가난한 백만장자'가 되었다는 메시지뿐, 더 담을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초원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로질러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건너갈 예정이었다. 도중에 딱 한군데, 20여 년 전 황무지에 농업이민으로 들어온 한국인 이민자를 찾아 그동안 어떤 눈물과 사연을 땅속에 파묻으며 살아왔는지를 들어볼 참이었다.
매일 하루에 1000km를 달린다는 것은 서울 부산을 왕복하고도 200km가량을 더 달린다는 의미다. 9명의 취재팀 모두 처음 겪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무모한 스케줄을 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워낙 드넓은 그 대륙에 숙박시설이 있는 인접도시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1987년 당시는 그랬다). 더하여 그때의 그 대륙에는 관광안내서나 변변한 관광지도도 없었을뿐더러, 예약에 필요한 숙소의 이름도, 연락처도 없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현장에 가서 그저 부딪치고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다. 초원이나 사막지대는 비록 낮에는 볕이 따가울지라도 밤이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 밖에 세워둔 차 속에서 잠들면 목숨을 보장받기 힘든 것도 무모한 스케줄을 짤 수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였다. 어찌하든 숙소로 찾아들어야 하고, 그래서 기를 쓰고 해가 지기 전에 숙소가 있는 도시에 닿아야 한다.
그날 해질 무렵, 우리는 기진맥진한 마라토너가 쓰러질 듯 결승점에 도달하듯 지치고 허기진 몸으로 지도상에 겨우 한 점으로 표시된 작은 도시에 닿았다(25년 전의 그 많은 자료집을 몇 해 전 이사하면서 없애 버렸다. 오로지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때와 장소와 사람 이름을 명확하게 적을 수가 없다.). 맨 앞 1호차(승합차)에 선임 탑승한 나는 '오늘도 무사히'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여관을 더듬기 시작했다. 인원이 9명. 싣고 다니는 장비와 개인 짐이 60여개. 자동차 3대. 우리는 결코 만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방 있습니까? 넓은 방 세 개가 필요합니다."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알겠습니다."
그 다음 여관에서
"방 있습니까? 넓은 방 세 개면 됩니다."
"어쩌죠? 오늘 방이 다 찼는데..."
"아, 그런가요?"
또 그 다음 여관에서
"방이 필요합니다. 넓은 방 세 개쯤요."
"늦으셨습니다. 낮에 다 찼거든요."
"하, 그래요? 이곳에 여관이 몇 개나 됩니까?"
"네 개입니다. 작은 마을이거든요."
"항상 이렇게 찹니까?"
"아닙니다. 내일 이곳에서 포도축제가 열리는데, 인근 재배농가에서 모두 내일 축제에 참가하느라고 몰려들었지요. 해마다 있는 축제입니다. 아마 여관 전부가 꽉 찼을 겁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든 여관 방이 다 나갔다면 지친 우리 몸은 어디에 눕혀야 하나? 몸으로 부딪쳐 해결하는 것이 당시 종횡단 취재의 콘셉트였고 묘미이기도 했지만, 막상 위험이 눈앞에 있다 생각하니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래도 마지막 여관이 남아 있으니 희망을 접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저 멀리 아시아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왔습니다. 직접 차를 싣고 와서 남미 대륙을 종횡단하고 있는데, 지금 칠레로 가는 중입니다. 하루에 1000km이상 사흘 동안 달렸으므로 우리는 몹시 지쳤고 배도 고프며, 무엇보다 지친 몸을 재워야 할 상태입니다."
멀뚱하게 쳐다보는 마지막 여관의 종업원에게 필요한 설명인지 아닌지, 상대가 들으려 하는지 아닌지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우리는 우리만의 절박함을 호소했다. 동정심을 불러일으켜서라도 어떻게든 방을 얻으려 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방이 꼭 필요합니다. 넓은 방 세 개가 필요한데 두 개도 좋습니다."
몸을 최대한 낮추고 크기를 최대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애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짧고 냉정한 대답이었다.
"방이 없습니다."
"그럼 하나도 괜찮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내일 축제 때문에..."
"임시로 쓰는 방도 없습니까?"
우리는 막무가내로 떼를 썼다. 비록 정치가 혼란스럽고 경제가 어렵다 해도 400년 전부터 유럽문화가 이식되어 문물과 제도가 유럽화 되어있는 대륙에서 다급해진 우리는 스스로 무너져서 문제를 한국식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 방은 없습니다."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우리 아홉 명이 밖에서 자면 어찌 되겠습니까?"
"유감이지만 지금은 도와드릴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혹시 축제 참가를 취소하고 일찍 돌아가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 틈나는 대로 여관들을 돌아보시지요. 그렇지만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가능성은 희박하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고립무원의 이곳에서 그 희박하다는 가능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어찌하든 밥은 먹어야 했다. 여관과 마찬가지로 웬만한 식당도 축제참가자들로 붐볐다. 그저 눈에 띄는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 그 흔한 'Beef Corn Rice'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몽골리안 인디오의 문화가 저변에 깔린 남미의 음식은 딱 한 가지, 짭짤한 간이 우리 입맛에 맞아 아쉬운 대로 매끼 배고픔을 달랠 수는 있었다.
먹는 둥 마는 둥 식사를 마치고, 지치고 초라해진 우리는 다시 세 대의 차에 나눠 타고 2차 여관순회를 시작하였다. 이미 어둠이 깔려 있었다.
"또 왔습니다. 방 있습니까?"
"없습니다."
"방 있습니까?"
"미안합니다."
"나온 방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시키신 대로 또 돌았습니다만, 여관마다 나온 방이 없네요. 여긴 나왔습니까?"
"아니요, 아직...."
"가능성은 있습니까?"
"아무런 징후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방법 없습니다. 기다렸다 또 돌아보는 수밖에는."
달포를 헤매며 이미 반은 집시가 된 우리 몸을 누일 곳이 없다면 어찌 될 것인가? 나는 워키토키를 들었다. 핸드폰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그때, 우리는 통신수단으로 차 하나에 한 대씩 워키토키를 지급하고 이동 중에 필요한 소통을 하곤 했다.
"여기는 1호차. 방법 없습니다. 각자 차에 몸을 기대고 깨울 때까지 한잠 자도록 하세요. 한 시간쯤 후에 다시 일어나 한 바퀴 또 돌아봅시다."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멀뚱멀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대도시에선 겪어보지 못한 숙박의 어려움이 광대한 대륙의 소도시로 나오자마자 현실화된 것이다. 앞으로 지속해야할 70여일의 여정에 이런 고통이 얼마나 더 발생할 것인가. 머리에 뜨거운 스트레스 하나가 더해졌다. 한 시간쯤 지나 스태프들을 깨우고 세 번째 순회를 시작했다.
"나온 방 있습니까?"
"방이 아니라도 몸 기댈만한 곳 있습니까?"
"한 시간쯤 있다가 또 올 테니 방 나오거든 부탁합니다."
거의 애걸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도 물론 방은 없었고 대한민국 방송사상 최대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취재팀 9명은 처량하게도 지친 몸 누일 곳을 찾아 마지막 여관으로 향했다. 그 길은 황무지였다. 건물도 없고 가로등도 없는 비포장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그 괴한과 마주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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