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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후배 순영이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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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영화 <1987>, 후배 순영이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기고] 1987년, 기억나는 것들과 기억해야 할 것들

영화 <1987>이 화제다. 페이스북 등 SNS에 관람평이 쏟아지고 있다.


나 역시 영화 개봉을 하루 앞둔 지난해 26일, 시사회에서 영화 <1987>을 봤다.

지난 한 해 6월민주항쟁 30년사업추진위원회 일을 거들면서 많은 행사 준비, 진행에도 참여했지만, 정작 나는 1987년 6월에 거리에 나서본 적이 없다.


1986년 초에 터진 조직 사건으로 수배 중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소위 '위장 취업'으로 서울 성수동의 모 철공소(당시에는 흔히 '마찌꼬바'라고 했다)에서 기름밥 먹고 있을 때라서 평일 낮엔 거리에 나갈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제로 6월의 직접적인 기억이랄까 추억은 그닥 없지만, 영화에도 등장하듯 가두시위와 백골단과의 쫓고 쫓기는 급박한 달음질 경험이야 그 전에도 익숙했던 것이니 만큼 감정이입하는 데 별 어려움은 없었다.

다 같이 1980년대 거리의 경험을 공유하는 세대끼리도, 의식이나 경험에서 1980년대 전반 세대와 후반 세대는 또 차이가 있다.


80, 81, 82 학번으로 이어지는 세대는 엄혹했던 전두환 독재의 공포정치를 몸으로 체험했다면, 상대적으로 85, 86 학번 이후 세대는 소위 '유화국면'의 연장선에서, 그리고 한편으로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던 '민족해방 노선'(NL)의 영향으로 운동권 문화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예컨대 내가 속한 80년대 초 학번 세대는 4학년만 되면 시위를 주동하고 학교를 정리(제적)하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였고, 농담으로 후배들이 "형은 언제 나가요?"하고 은근히 압박 아닌 압박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에 비하면 1980년대 후반 전대협과 한총련을 거치면서 학생운동 지도부가 졸업하지 않은 채로 말하자면 5학년, 6학년이 되어 여전히 학생운동 지도부를 맡는 식의 시스템은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간간이 접하는 '의장님'에 대한 예우를 강조하는 문화는 솔직히 거부감도 들어서 과연 내가 그 시대에 학교를 다녔다면 어땠을지 쉽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광주학살로 국민을 죽이고 집권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야만성, 잔악무도한 공포정치 속에 사회적으도 '재야'라고 불리는 일군의 양심적 지식인들 외에는 노동운동도, 그 어떤 사회운동도 유의미한 정치적 저항세력이 되지 못하던 시절에, 학생운동의 지향은 사회주의 혁명 외에는 달리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연장선에서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든 제적이 되든) 마치고 노동운동으로 '존재 이전'을 통해 혁명의 주력으로서 노동자들을 각성시키고 조직화해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장래에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든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은 전혀 없이, 오직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만이 유일한 선택지였다.


어떻게 하면 '학생'이라는 특수한 사회계급적 존재로서 갖는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이 언제든 혁명적 노동자로서의 계급성이 아니라 기회주의적 프티 부르주아인 지식계층으로 변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우리의 고민이자 토론 주제였다.


그 실천은 당연히 합법적 공간에서는 불가능했고 학생운동의 주력은 비합법 지하조직이었으며, 소위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 현장으로 존재를 이전해서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지하전위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순수하지만 한편으로 순진하기도 했던 열정은 당연히 노회하고 악랄한 공안권력의 표적이 됐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가고 고문 당하고 감옥살이를 했다. 일부는 자신을 희생하거나 희생 당함으로써 열사가 됐다.

1987년을 전후한 그 시대의 비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흔히 누군가를 극도로 증오하면 상대를 닮게 된다던가. 그 시절의 (학생)운동을 평가하면서 '군사독재와 싸우는 과정에서 군사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조차도 당시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었다.


아니, 교정에 일반 학생들과 구분하기 어려운 사복전경들이 우글대고, 심지어 학생들 중에도 경찰의 프락치가 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에서, 운동권의 보안의식과 경직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었다. 언제 경찰에게 잡혀가서 (박종철 열사가 선배의 은신처를 불도록 고문 당했듯이) 동료를 배신하도록 고문 당할지 알 수 없는 일상적 공포는 영화에서도 담아낼 수 없는, 그 시대 운동권 학생들만의 특유한 경험이자 원초적 의식이었다.

그 시대의 또 다른 비극은 자신의 능력과 적성을 쫓아 사회로 나갔으면 훌륭한 자기 역할을 했을 사람들이, 이 흐름 속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역할을 스스로 선택해서 적응하지 못하고 '희생'된 사례들이었다.

당시 학생들이 노동현장으로 위장취업할 때, 보통은 팀을 짜서 이미 노동운동에 진출해 있는 선배의 지도를 받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물론 개별적 결단으로 홀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선배의 지도 없이 동료들끼리 팀을 짜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를 흔히 '이전팀', 혹은 약자로 '이전티(T)'라고 불렀다.


개인적으로 내가 담당했던 어떤 후배들의 이전팀에서, 봉제공장에 취직한 여자 후배가 있었다. 똑똑하고 착한 심성의 후배였지만 마음이 모질지 못하고 여렸고, 무엇보다 손이 느렸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신분증을 위조해 위장취업했기에 실제로는 자기보다 훨씬 어린 여성 노동자들 밑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공장에서 이 후배의 이름은 위조된 신분의 '아무개'라는 이름조차 아닌 '바보'로 불렸다.


"바보야 이거이거 해, 바보야 이것도 못 하니? 바보야 이 멍청아!"


어린 선배들보다 실제로는 더 많은 지식을 쌓았고 심지어 더 성실하다는 것으로도 이 간극은 애당초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요즘 말로 비유하자면,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던 셈이라고나 할까.

후배의 스트레스는 공장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전팀은 함께 모여서 합숙을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힘들게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팀원들이 모여 하루 한 일을 보고하고 평가하는 자리를 가졌다.

현장에 잘 적응해 다른 노동자들과도 친분을 쌓는 경우는 칭찬의 대상이 됐지만, 이 후배는 사실 나를 포함한 팀의 골칫거리였다.


당시의 엄혹하고 치열한 분위기에서, 이 후배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따뜻한 분위기는 애당초 존재할 수 없었다. 평가회 때마다 후배는 팀원들의 단골 비판 대상이 되었고, 나 역시 한편으로 안타까워하기는 했지만 안타까움만으로는 후배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었다.

결국 후배는 적응하지 못하고 팀을, 그리고 노동현장을 떠났고, 그 뒤로 전혀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참담한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죽음에는 당연히 우리의 책임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가, 독재정권의 잔혹한 탄압이, 그것들만이 그녀의 죽음에 모든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런 비극적 사례는 다소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꼭 이런 사례까지는 아니라도 결국 운동에 적응하지 못하고 우울증이나 어쨌든 후유증으로 고통 받은 사례들을 내 주변에서도 여럿 알고 있다. 아니, 아마도 그 시절에 나름 치열하게 운동했다는 사람들 모두가 주변에 그런 사례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미워졌다"는 구절에서 항상 감정이입으로 마음이 먹먹하게 무거워진다.


영화 1987을 보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참기 힘들게 아팠던 이유는 단지 영화 속에 그려지는 상황, 사건들에 대한 단순한 감정이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동시에 같이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그 많은 희생들, 피해자들.

나는 운이 좋게 살아남아 지금까지 운동을 하고 있다는 죄송함. 그리고 지금까지도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수구 적폐세력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

차마 글로 표현하기 힘든 그 복잡다단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영화 <1987>을 보는 내내 영화의 스토리, 완성도와 무관하게 나는 정말 기분이 더러웠다.

사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정말이지 영화를 보고 싶지 않았다.


예전부터 이런 류의 영화나 영상물을 볼 때마다 겪었던 감정이고, 그래서 광주항쟁을 그린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됐을 때도 한편으로 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보지 못했다.

세월호 참사 때 다들 진도에, 팽목항에 내려갈 때도 정말이지 가서 어떤 기분이 들지 자신할 수 없어서 망설이고 망설이던 끝에 몇 달이 지나서야 단체 방문에 끼어서 다녀왔던 기억이랄까.

그래도 이젠 어느 정도 좀 적응이 돼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볼 때도 살짝 그런 '더러운'(달리 뭐라고 해야 할지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기분을 느끼긴 했지만 나름 참을 만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영화 <1987>을 보면서는 아예 정면으로 그 기분이 나를 덮쳐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괴로웠고,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늦었지만, 애꿎게 희생된 후배의 이름을 불러본다.
누군가는 그녀를 기억해줘야 하기 때문에.

순영아,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지내고 있기를.


"살아남은 자의 슬픔"

-베르톨트 브레히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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