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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기사도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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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기사도 노동자로 인정받고 싶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이동노동자 쉼터사업의 현실과 과제

'늦은 밤, 문이 열린다. 대리운전 노동자 한 분이 쉼터에 들어온다.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은 그는 이내 글로 담아내기 힘든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낸다. 고객에게 엄청난 모욕을 당한 모양이다. 분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동료 기사들은 마치 자기 일인 양 함께 분노한다. 그리곤 각자 자신의 경험담을 꺼내 놓기 시작한다. 열띤 대화는 30분을 훌쩍 넘긴다. 어떨 땐 1시간 가까이 이야기가 계속되기도 한다. 대리운전 경력이 길수록 이야기 소재도 많다. 하지만 말을 하는 이도 이렇게 얘기해봐야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이야기의 끝은 항상 씁쓸하다.'

쉼터를 운영하다보면 위와 같은 장면을 자주 보게 된다. 지난 20년 간 법과 제도의 보호로부터 배제된 채 온갖 갑질과 위협에 시달려온 이들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대리운전 노동 실태

전국에 있는 대리운전 노동자 규모에 대해선 아직까지 정확한 통계가 나온 바 없다. 업계에서도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까지 추정할 뿐이다. 평균 순수입은 2015년 조사(이동 노동 종사자 지원방안 연구)에서 월 151.8만 원으로 나타났다. 총 노동시간(대기시간 포함)과 야간 노동인 점을 고려하면 최저임금에도 한참 못 미친다.

서울에 사는 대리운전 노동자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시간 정도다. 그중 실제 운행시간은 5시간이 채 안 되니 매일 4시간 이상을 길에서 보내는 셈이다. 걷거나 서있는 시간이 길어 근골격계 통증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당사자들이 설문에서 밝힌 '업계가 계선해야 할 점'으로는 운행료 인상(35.4%), 수수료 인하(24.2%), 보험료 인하(17.7%), 콜센터의 횡포 근절(13.3%) 등이 있었다.

이밖에도 심각한 문제는 많다. 우선 산재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차량에서 내려 이동하는 도중에 다치거나 오랜 업무로 질병이 생겨도 보상받을 길이 없다. 야간 노동으로 인한 수면 장애와 감정 노동에 따른 우울증상도 심각한 문제다. 또 취객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 특성상 폭행을 당하는 일도 많다.

현실이 이런데 대리운전업체는 어떤 책임도 지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험사 리베이트, 과도한 수수료와 관리비로 대리기사 피 빨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당사자들도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개인 사업자로 흩어져 일하다 보니 업체의 횡포에 공동으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과 전국대리운전노동조합 등 대리운전 관련 단체 회원들이 2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대리운전기사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로지(연합) 엄단 및 노동기본권 보장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동노동자쉼터가 생기다

이렇게 파편화되었던 대리운전 노동자들이 2016년 3월부터 서울이동노동자쉼터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픔을 공감해줄 동료가 생겼고 단체 활동도 활발해졌다. 서울시가 서초동에 이동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만들면서부터다. 2015년 서울시 노동정책 기본계획에 포함되었던 쉼터사업은 서울노동권익센터의 연구보고서인 <이동노동 종사자 지원방안 연구>가 발간되면서 속도를 냈다.

쉼터는 처음에 이동노동자 휴식과 커뮤니티 공간으로 설계됐다. 이후 수요조사를 통해 다양한 복지서비스와 교육프로그램이 추가되었다. 쉼터에서 운영하는 전문 상담은 법률, 금융, 건강, 주거복지 총 4개 분야로 전문 기관에서 상담사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매월 진행한다. 양재동에 사는 박모 씨는 “주거복지 상담으로 전세 자금을 지원받아 고시원을 탈출했다” “금융복지 상담으로 회생 절차에 들어가게 됐다”며 상담 이후 삶의 질이 한결 나아졌다고 말한다.

쉼터가 이들의 권익 향상을 목표로 진행했거나 당사자 단체와 진행 중인 사업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책컨퍼런스를 통한 대안 모색이고 다른 하나는 직무 역량 강화 교육이다. 9월에 진행한 정책컨퍼런스에서는 당사자와 전문가들이 대리운전 노동 여건 개선을 위해 다양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12월에 완성한 대리운전 안내서에는 위기 상황 발생 시 대응방법과 직무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노하우가 담겼다. 쉼터는 2018년부터 대리운전 안내서를 바탕으로 직무 역량 강화 교육을 정기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참고로 직무교육과 면허발급, 표준요금제 도입은 대리운전업이 정상화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다.

여전히 바뀌지 않는 '노동 현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리운전 노동자의 '노동 현실'은 전보다 한 뼘도 나아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바로 '대리기사 노동자성 인정'과 '대리운전업법 제정'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1월 대리운전노동조합에 필증 발급을 거부했다. 양주석 노조위원장의 국회 앞 18일 단식 농성에도 불구하고 특수고용 노동자 노동3권 보장을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홍보해온 대리운전 노동자 산재보험 적용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만에 가깝다. 일부 '전속 대리기사'에 한해 노동자와 업체가 50%씩 부담해야 산재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게다가 의무가 아닌 선택이어서 산재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노동자는 극소수다.

무엇보다 업계에 만연한 불법과 착취, 요금제 개선을 위해선 대리운전업법 제정이 시급하다. 허나 국회에선 대리운전 노동자를 대표할 수 있는 당사자 단체의 규모화를 요구하며 대리운전업법 제정을 미루고 있다. 정부는 노동조합 설립 필증 발급을 거부하고 국회는 당사자단체의 규모가 작다는 이유로 대리운전업법 제정에 반대하는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쉼터사업에 대한 근본적 고민

정치적 상황과는 별개로 요즘은 쉼터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근본적 고민을 하고 있다. 올해 9월에 이미 쉼터를 방문한 누적 인원이 2만 명을 넘어서고, 마치 성공 사례인 것처럼 여러 지자체에서 견학을 다녀갔지만, 현장에 있는 실무자로서 지자체 쉼터사업이 지금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이동노동자쉼터에서 진행되는 법률상담 서비스. ⓒ서울이동노동자쉼터

그건 내가 속해 있는 쉼터도 마찬가지다. 따지고 보면 쉼터사업의 성과는 '당사자 커뮤니티 활성화, 복지서비스 제공, 제도적 대안 제시' 정도로 매우 제한적이다. 기능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자체에선 쉼터를 단순히 쉬어가는 공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창원이동노동자쉼터는 작은 조립식 건물 한 동에 운영할 상근 인력도 없어 공익근무요원 1명과 노조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관리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서울이동노동자쉼터를 견학 온 10여 곳의 지자체 관계자들에게 쉼터가 단순 쉼터 기능만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왔다. 핵심은 이렇다. 첫째, 쉼터 기능을 종합지원센터로 확대하고 전문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 둘째, 당사자단체와 지자체 간 긴밀한 거버넌스를 이루어야 한다. 셋째, 지자체와 중앙정부가 정책 협력을 통해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

서울과 광주의 실험에 박수를

서울시가 내년부터 쉼터 상근인력을 2명 늘리기로 했다. 광주광역시도 내년 2월에 이동노동자쉼터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종합지원센터로 확대하기 위해선 예산과 인력을 더 늘려야 한다. 상담역량과 정책역량을 키우고 거버넌스를 강화하는 일 역시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지자체의 꾸준한 지원과 협조가 필요하다.

그 선두에 서울특별시의회와 광주광역시의회가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를 위한 지방정부 차원의 노동정책이 전무한 이때, 쉼터사업이 특고노동자의 노동 현실까지 바꿔낼 수 있는 실질적 대안이 되길 바란다. 돌아오는 2018년, 노동 존중 특별시 서울과 인권의 도시 광주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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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드는 복지국가>는 시민들이 복지국가 만들기에 직접 나서는, '아래로부터의 복지 주체 형성'을 목표로 2012년에 발족한 시민단체입니다. 건강보험 하나로, 사회복지세 도입, 기초연금 강화, 부양의무제 폐지, 지역 복지공동체 형성, 복지국가 촛불 등 여러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칼럼은 열린 시각에서 다양하고 생산적인 복지 논의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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