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심
바다로 가고 싶었다. 항구도시를 갖고 싶었다. 해양국가가 되고 싶었다. 따뜻한 남해부터 향했다. 명분도 그럴싸했다. 이스탄불로 전락한 콘스탄티노플을 쟁탈하고자 했다. 1695년과 1696년, 흑해 원정을 단행한다.
그러나 대패했다. 흑해 건너 오스만은 서유라시아 최강의 제국이었다. 지중해의 패자였다. 시기상조였다. 도양광회(韜光養晦)를 도모한다. 빛을 감추고 힘을 길러야 했다. 방향을 선회하여 북방으로 나아간다. 남해를 거두고 북해, 발트해로 진출한다. 건너편에는 스웨덴이 있었다. 오스만에 견주면 만만한 왕국이었다. 1703년 삭풍이 몰아치는 허허벌판에 요새를 짓는다. 네바 강이 핀란드만으로 흘러나가는 습지에 군사도시를 건설한다. 이름을 상트페테르부르크라고 지었다. 북위 59도, 오늘날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자리한 도시가 탄생한 사정이다.
1696년 패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다. 1697년 250명 대규모 사절단을 꾸린다. 유럽 견문에 나선 것이다. 프로이센과 네덜란드, 영국 등 서유럽 국가들을 시찰했다. 애당초 목적은 유럽과 연합하여 오스만제국에 맞서려는 것이었다. 기독교와 정교회가 합세하여 이슬람을 무찌르려고 했다. 그러나 모두 손사래를 쳤다. 어느 나라도 감히 오스만에 도전하려 들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러시아의 유럽화를 꾀한다. 이스탄불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파리와 런던에는 버금가는 도시를 만들고자 했다. 귀국길에 1000명에 달하는 기술자와 군인을 고용했다. 학자와 예술가들도 초빙했다. 러시아 전역에서는 석공들을 징집했다. 러시아의 모든 대리석을 끌어 모았다. 어마어마한 토목공사가 진행된다. 하면 된다, 불도저 정신으로 밀어붙였다. 1712년 아예 본인의 거처마저 바꾼다. 현장을 진두지휘하기 위하여 궁전을 옮긴 것이다. 독단적으로 수도를 이전한 셈이다. 러시아의 중심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신수도가 들어선 까닭이다.
변방의 혁신도시는 개혁개방의 거점이 되었다. 1725년 과학 아카데미가 창립되었다. 1757년 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1764년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건립되었다. 1783년 마린스키 발레 극장이 들어섰다. 속도전, 르네상스 이후 서유럽 300년의 변화를 반세기만에 따라하고 따라잡았다. 게르만 혈통의 예카테리나 여제 집권기(1762-1796)에 절정을 구가한다. 유럽인들도 러시아의 문관과 무관으로 채용되었다. 프랑스혁명을 피해 망명한 고급인력들도 대거 흡수했다.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다채로워졌다. 명실상부 제국에 값했다. 제도(帝都)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바로크와 로코코,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들로 독특한 경관을 이루었다. 회회와 조각 등 서유럽 작품들도 족족 구입했다. 그리스, 로마, 이집트 등 서유라시아의 문명적 유산을 집대성, 집약시켰다. 역사가 부재한 인공도시의 약점을 왕성한 수집벽으로 만회한 것이다. 만물을 분류하고 정리하고자 했다. 세계를 장악하고 지배하려 했다. 서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모델을 구축하려고 했다. 항구도시와 군사도시는 과학도시이자 문화도시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의 빈에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는 동유럽 최고의 글로벌 도시가 되었다.
밤 열시가 되어도 온통 환하다. 하얗기보다는 푸르다. 북방의 푸른 밤을 즐기며 넵스키 대로를 따라 걷는다. 서쪽으로 쭉쭉 뻗어났다. 구불구불하지 않다. 시원시원 나아간다. 모스크바와는 판이한 장소이다. 크렘린을 중심으로 성대한 구심력을 응축시킨 곳이 모스크바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세계로 확산되는 원심력의 공간이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운하(水道)를 포함하여 강의 면적이 10%를 차지하는 물의 도시(水都)이기도 하다. 도심의 아름다운 풍경이 강 표면에 아름드리 비친다. 지상이 수상에 반사된다. 보여주기 위한 도시이다. 비추어보는 도시이다. 거울도시이다. 나르시시즘과 콤플렉스가 교착하는 도시이다. 변신(變身)과 변심(變心), 유럽을 의식하고, 유럽과 비교하며 자문자답하는 18세기 러시아를 함축한다. 즉 유럽으로의 창,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중적이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윈도(window)이자, 외부의 시선으로 내부를 응시하는 쇼윈도(show-window)이기도 하다. 이 안과 밖의 거울상이 러시아의 근현대사, 300년의 코스모스(문명)와 카오스(혁명)를 연출했다.
2. 회심(回心)
눈을 감은 밤 10시도 환했는데, 눈을 뜬 새벽 4시도 이미 밝았다. 검은 밤, 칠야(漆夜)는 서너 시간에 불과한 모양이다. 지난 밤, 복닥복닥 거렸던 사람들이 사라졌을 뿐이다. 동화 같은 도시를, 영화 같은 도심을 홀로 만끽할 수 있었다. 유유자적, 백야보다 백조(白朝)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미이다.
망국과 건국을 번갈았던 파란의 20세기, 도시의 이름 또한 여러 차례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 무렵 페트로그라드로 불리었다. 독일풍 도시 명을 지우고 슬라브풍으로 바꾼 것이다.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200년 수도의 지위를 박탈당한다. 지명 또한 레닌그라드로 변경되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나서야 본명을 되찾았다. 백년의 혼란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되돌아간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이 출범한 것은 1997년이다. 특출난 부시장이 기획한 것이다. 푸틴이었다. 옐친 집권기 어수선함 속에서도 상트페테르부르크만은 기틀을 잡았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 2000년이다. 2003년 건도 300주년 행사를 성대하게 치른다. 2005년부터는 국제경제포럼을 직접 챙기기 시작한다. 도시행사에서 국가행사로 승격시킨 것이다.
외신만큼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면도 없다. 특히 정보를 생산하는 기능이 거의 없이 영어 기사 번역에 급급한 한글 공론장은 그 편향이 더욱 심하다. 푸틴이 미국 대선을 좌지우지 한 것처럼 호도한다. 경제 제제로 러시아가 고립된 양 왜곡한다. 2017년 국제경제포럼은 화려했다. 카자흐스탄의 유라시아주의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선봉에 섰다. 유라시아경제연합에 족하지 않았다. 유라시아경제연합(EEU)과 유럽연합(EU)의 합작을 주창했다. 맞장구를 친 것은 그리스의 치푸라스 총리이다. 그렉시트가 단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렉시트 이후의 대안이 비로소 짐작이 되었다. 유럽연합에서 이탈하여 유라시아경제연합으로 진입할 수 있다.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심이 이미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러시아는 나날이 긴밀해지고 있다. 준동맹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동로마제국, 비잔티움제국의 후예로서 갈수록 돈독하다. 추임새를 넣은 것은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다. 사실상 NATO에서 이탈했다. NATO와 아귀가 맞지 않는 러시아의 무기 시스템을 전격 도입했다. 군사 독립노선을 천명한 것이다. 더욱 흥미진진한 것은 터키가 치고나가자 유럽마저 뒤따른다는 점이다. 브렉시트 직후 테이블에 올랐던 유럽연합군 창설 논의가 연말부터 본격화되었다. NATO에서 자율성을 갖는 독자적인 유럽군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미합중국과 유럽연합이 제 갈 길을 간다. EU와 NATO의 구조조정, 21세기 서유라시아의 새판 짜기이다.
과연 국제경제포럼에도 유럽의 주요기업들이 대거 참여했다. 1000개가 넘었다. BP(영국석유회사)와 셸(Royal Dutch Shell)과 Total(프랑스)은 러시아의 가즈프름과 대규모 사업을 체결했다. 시베리아의 가스가 남쪽으로는 터키의 송유관을 따라 흑해의 그리스까지 흘러들어간다. 서쪽으로는 발트해를 지나 독일과 프랑스까지 유입된다. 유럽 국가들과 북방제국이 공생하는 생명선을 더욱 늘려간다. 미국이 러시아를 제재하는 실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미국산 셰일가스의 주요 판매처로 유럽을 꼽았던 것이다. 러시아와 경쟁 관계이다. 대서양은 멀다. 지중해는 가깝다. 러시아의 가스가 미국보다 더 저렴하다. 동/서유럽 합작이 더욱 자연스럽다. 구대륙의 이해타산이 맞아떨어진다.
특히 공을 들인 것이 프랑스이다. 프랑스가 독일과 연합하여 러시아와 합작하면 판은 전혀 달라진다. 5월 마크롱이 당선되었다. 첫 정상회담의 당사자가 바로 푸틴이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회합했다. 두 사람이 회고한 이가 바로 표토르 대제이다. 2017년은 1717년으로부터 300주년이 되는 해였다. 1717년은 표토르가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한 해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곳곳이 파리에서 영감을 구한 것이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합동 전시회를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 기업들도 대거 국제경제포럼에 등장했다. 경제 합작은 정치 연합과 무연할 수가 없다. 연말 마크롱은 시리아에서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었다. 러시아와 터키와 이란이 주도하는 시리아 재건이 합당함을 인정한 것이다. 푸틴이 중동의 불안정을 평정해가고 있음을 승인해준 것이다.
재차 다급해진 것은 미국이다. 평지돌출, 무리수를 던졌다.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인정한 것이다. 러시아-이란-터키가 주도하는 중동 평화 구상에 말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재차 혼란과 대란을 꾀한다. 그러나 결국 패권 쇠퇴를 재촉하는 자충수로 그칠 것이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고 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서방기독교 국가들과 동방 정교회 국가들과 남방의 이슬람국가들이 대통합을 이루었다. 제1로마와 제2로마와 제3로마가 대연정을 형성했다. 유례가 없던 모습이다. 구대륙이 연합하여 신대륙을 성토한다. 브뤼셀에서는 28개 EU국가들이 미국을 비판했고,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슬람협력기구(OIC) 57개 나라들이 미국을 비난했다. 같은 시기 푸틴은 전용기를 타고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와 앙카라를 순시했다. 오스만제국이 사라진 해가 1924년이었다. 그 후 백년간 중동은 세계의 화약고였다. 2017년 현재 구오스만을 아우르는 지도자로 우뚝 선 인물이 푸틴이다. 다음 임기가 2024년까지다. 애당초 표토르의 목표가 남해를 얻는 것이었음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어느새 러시아의 군사기지가 시리아와 리비아에 들어서고 있다. 흑해는 물론이요 홍해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998년 키예프 루씨 이래 천년 사의 사건이다. 칼리프와 카이사르와 차르의 그림자가 겹겹으로 어른거린다.
2018년 5월, 푸틴은 재임할 것이다. 6월에는 국제경제포럼과 월드컵이 동시에 열릴 것이다. '푸틴그라드'로서 21세기 상트페테레부르크의 위상은 전혀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유럽으로 향하는 창이 아니다. 북해부터 홍해까지, 지중해 세계를 아우르는 서유라시아의 허브이다.
3. 항심(恒心)
멀리서 온 친구를 만났다. 3년만의 재회였다. 첫 번째 러시아어 선생님이다. 하노이에 머물 때였다. 프랑스 식민지 100년, 소련의 동맹국 50년, 하노이는 서구와 동구의 흔적이 역력하다. 프랑스 문화원과 러시아 문화원도 훌륭하다. 김에 어학공부를 겸했다. 러시아 문화원에서 특별히 소개해준 선생님이 그 친구였다. 처음에는 실망이 컸다. 내심 어여쁜 미녀 선생님을 기대했다. 수염이 덥수룩하고 무뚝뚝한 표정의 남성이었다. 하노이 인문사회대학교에서 베트남학 석사 과정에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에서는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대학교에서는 중국어와 베트남어를 공부했단다. 두 번째 수업 만에 진가를 드러내었다. 러시아어에 남겨진 유럽과 아시아의 흔적을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몽골어와 러시아어의 관련성도 알려주었다. 나는 20세기의 소련이 '붉은 몽골제국'이었다고 본다고 보태었다. 중국, 몽골, 북조선의 동북아 사회주의 국가와 캄보디아, 라오스 등 동남아 사회주의 국가를 매개하는 나라로서 베트남을 연구하고 있다고 커밍아웃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날부터 친구가 되었다. 하노이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식당을 돌아다니며 사이공 맥주를 마시면서 소비에트연방과 인도차이나연방을 토론했다.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역사와 시사 얘기에 흠뻑 빠져들면서 정작 러시아어 수업에는 게을렀다. 영어와 베트남어와 중국어가 뒤섞인 외계어로 나누는 잡담을 사랑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귀국도 미루었던 것이다. '동아시아'라는 기존의 틀로는 베트남조차 온전히 담아낼 수 없었다. 나는 아시아에서 유라시아로 서진했고, 그는 유럽에서 유라시아로 동진했다.
3년 1000일, 나는 유라시아를 쏘다녔고, 그는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러시아판 페이스북이라고 할 수 있는 VK.com을 통하여 간간이 소식을 주고받았다. 국제경제포럼에 참여하는 베트남 대표단의 통역을 맡아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것이다. 상트는 그 녀석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국어와 베트남어를 배운 곳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이었다. 대학시절 은사도 함께 뵈었다. 동양학부에 재직하신다. 영문학과 불문학보다 중문학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한다. 1991년 이후에 태어난 신입생들에게는 <코란>과 <논어>를 읽으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2050년 유라시아 인구의 절반이 무슬림이 된다는 것이다. 2050년 세계 박사학위 소지자의 절반이 중국인이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의 장래가 그곳에 있다고 했다. 수도를 우랄 동쪽으로 옮겨야할지도 모른다고 하신다.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죽이 맞았다. 말이 통했다. 찰떡궁합이었다. 상트의 베트남 식당에서 분짜를 안주 삼아 보드카를 들이키며 하얀 밤을 지새었다.
지난해 국제경제포럼의 주빈이 베트남이었다. 유라시아경제연합과 베트남은 이미 FTA를 체결했다. 베트남은 인구 1억, 동남아시아의 대국이다. 포스트-차이나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세계에서 경제성장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이다. 머지않아 베트남이 아세안의 주축이 된다. 베트남이 앞서자 아세안도 따른다. 올해는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아세안 간 FTA가 논의되었다. 2020년 체결이 목표라고 한다. 냉전기 모스크바와 하노이의 특수 관계를 매개로 탈냉전기 유라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연결시키는 것이다.
올해의 초청국은 인도였다. 모디 총리가 몸소 방문했다. 푸틴과 모디가 회담하는 특별 섹션도 꾸려졌다. 귀를 쫑긋하고 경청했다. 브릭스가 탄생한 곳이 바로 상트였다고 한다. 러시아, 인도, 중국, 유라시아 삼국연합으로 출발하여 아프리카와 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대륙간 회합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경제연합과 인도의 FTA도 논의되었다. 응당 인도 일국만으로 그칠 리가 없다. 남아시아 지역협력연합(SAARC)과의 지역 대 지역 FTA로 진화할 것이다. 이미 푸틴의 주선으로 남아시아의 앙숙 인도와 파키스탄이 모두 SCO에 가입했다. 다음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이란이다. 상하이가 유라시아 군사안보기구의 거점이라면, 상트는 SCO를 아우르는 경제무역기구의 허브가 되는 것이다. 러시아와 인도를 세로로 잇는 남북회랑의 청사진도 마련되었다. 북극해부터 인도양을 종으로 엮는다. 이란의 차바하르 항구가 요충지이다. 차바하르 항구는 동서를 잇는 일대일로의 거점 도시이기도 하다. 동서와 남북을 꿰는 교차로, 페르시아의 귀환이 도도하다.
역시나 2018년 국제경제포럼의 주빈이 이란이다. 인도도 이란도 터키도 유라시아경제연합에 합류해갈 것이다. 그 대국들의 동향을 따라 유라시아경제연합과 FTA 논의가 오고가고 있는 나라들의 숫자가 40을 헤아린다. 모디 또한 상트까지 와서 푸틴만 만나고 돌아갔을 리가 없다. 아세안 지도자들도 만났다. 뉴델리가 상트를 보고 배웠다. 인도-아세안 회담이 처음 열린 해가 바로 2017년이다.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겹겹으로 엮여간다. 이 인구 30억의 거대시장이 달러를 사용하지 않는 독자적인 경제권역을 모색한다.
유라시아가 대유라시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동아시아도 합류해야 한다. 선두는 중국이다. 알리바바의 마윈도 등장했다. 지금이야말로 러시아에 투자할 적기라고 강조했다. 중원을 평정한 세계 최대의 온라인 유통망과 전자화폐 결제시스템이 서역과 북방까지 진출한다. 올해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서 회자된 말이 '포스트-웨스트'(Post-West)였다. 그 포스트-웨스트 세계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제경제포럼을 찾으면 된다. 러시아를 제재한다는 미국만 쏙 빠졌다. 유럽도 참여하고, 아시아의 동서남북이 모두 참여했다. 구대륙이 합세했다. 기왕의 세계사회포럼과도 다르다. 장소에 기반한 정치경제학을 모색한다. 문명에 기초한 세계체제 변혁을 궁리한다. 러시아, 이란, 터키, 인도, 중국의 면면이 상징적이다. 공히 유라시아 제국의 후예들이다. 혁명을 거두고 문명의 중흥을 꾀한다. 정교대국 러시아, 이슬람공화국 이란, 신오스만주의 터키, 힌두국가 인도, 중화문명 중국. 지난 백년과는 상이한 다른 백년을, 지난 천년과 유사한 다음 백년을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상트와 교향(交響)하는 도시들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SCO 가입을 처음 논의했던 장소는 타슈켄트였다. 가입을 승인한 곳은 우파였다. 이란과 터키의 가입을 논의한 곳은 아스타나였다. 이 도시들의 위치가 곧장 떠오르지 않는다면 몹시 곤란하다. 지리감각이 후지고 미래감각이 후미진 것이다. 유라시아의 메가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공히 이슬람세계의 거점 도시들이다. 중국의 서쪽, 서중국이 이슬람세계이다. 인도의 북쪽, 북인도가 이슬람세계이다. 유럽의 동쪽, 동유럽도 이슬람세계이다. 러시아의 남쪽, 남러시아 또한 이슬람세계이다. 유라시아의 한복판에 이슬람문명이 자리한다. 아니 이슬람세계의 동서남북으로 중국과 유럽과 인도와 러시아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슬람문명과 통해야 대유라시아연합도 승한다. 과연 정교세계와 이슬람세계의 심포니와 하모니가 가능할 것인가? 21세기 신유라시아주의의 향배를 가늠해보는 실험장이자 시험대가 될 것이다.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 카잔으로 이동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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