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사회는 정치적 대결의 공간으로 밀려들어갔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외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강력한 물리력의 대응이 있었다. 30개월령 이상의 미국산 쇠고기가 이른바 광우병의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원인이 될 수 있는가의 복잡한 과학 논쟁이 언론을 채웠지만 더 중대한 문제는 권력이 국민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시민의식에 있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라는 헌법적 명제로 발현되었다. 노래로 만들어졌고, 시위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불렀다.
헌법 제1조는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헌법적 규정인 민주공화국은 그 역사적 기원에서 근 백년이라는 정치적 시간을 품고 있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쌓여온 시간만큼 정치적 밀도와 견고함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3.1운동 이후, 식민지 한국은 언젠가는 수립할 근대국가의 정체를 공화국으로 확정지었지만, 공화정이라는 정치적 비전은 전근대적 정치체제, 가령 군주제와 같은 기성질서와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탄생한 것은 아니었다. 왕조체제의 복원을 향한 복벽운동이, 식민지 이후의 국가권력구조를 공화정으로 한다는 정치적 비전과 뚜렷하게 경쟁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학과 정치학이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 중의 하나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대한민국의 정체로서 민주공화국이라는 형식은, 보통선거권 만큼 큰 어려움이나 저항 없이 안착했다는 사실이다. 민주공화국은 국민주권을 존중하는 대의제권력으로 충족되는 것이라는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인식이 지배해왔던 것이다.
식민지 기간 동안에 구상된 공화국의 비전은 1945년 해방 이후 정국 주도권을 장악한 좌익세력이 '인민공화국' 선언을 하면서 그 구체적인 정치경제적 원리와 내용을 담게 되지만, 동아시아 반공 블록의 구축이라는 국제적 이해관계 위에서 작동한 미군정의 군사적․정치적 개입으로 그 실험은 중단되는 운명에 처한다. 그 이후 대한민국에서 전개된 민주주의 운동은 공화국의 구체적인 내용을 채우는 과제를 뒤로 물리고, 반독재, 반권위주의 투쟁으로 초점을 맞추게 된다.
대한민국의 정치적 근대화 과정은 왕정, 군주정에 대한 반정립으로서의 정치체제가 공화정이고, 독재와 권위주의가 물러난 정치적 공간에 공화국이 들어선다는 생각이 뿌리박게 되는 요인이었다. 그리하여 공화국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고민보다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병리적 체제를 극복하는 것으로 공화국이 제대로 형성될 것이라는 판단이 자리 잡는다. 그러한 역사적 논리의 연장 속에서,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적인 의사소통을 교정하는 데서, 그리고 국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민주적 정치과정이 정착하는 데서 공화국, 민주공화국이 주조될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다.
그러나 공화국, 더욱이 민주라는 가치와 결합한 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그에 대립하는 존재들을 극복하는 것만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민주공화국은 대단히 견고하고 중대한 정치적 원리 위에서 만들어지는 이상이다. 프랑스 공화주의의 사상적 원천을 제공한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공화국에 대한 사유는 공화국의 실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그리고 그러한 어려움을 돌파해 탄생한 공화국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루소에게서 공화국은 적어도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을 요청한다. 무엇보다 공화국 구성원들로부터 공적인 가치에 대한 헌신의 덕성을 요구한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다음처럼 말했다.
"시민들이 공공의 의무를 자기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게 되고, 그들이 몸소 국가에 봉사하기 보다는 재물을 갖고 국가에 봉사하려고 생각하게 되면 국가는 벌써 멸망에 가까워진 것이다. (…) 정말로 자유로운 나라에서는 시민들이 모든 일을 직접 자기의 손으로 하지 무엇이나 돈으로 처리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의무를 면하기 위하여 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지불하더라도 자기의 의무는 자기가 하려고 할 것이다.(…) 국가가 잘 조직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시민들의 마음속에 공적인 일이 차지하는 비율이 사적인 일보다 더 큰 법이다. (…) 질서가 잘 잡혀 있는 나라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집회에 모여들지만, 나쁜 정부 밑에서는 아무도 집회에 나가려고 발을 떼어놓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도 거기서 행해질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고 또 거기서는 일반의지가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을 모두가 미리 알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모두 가사에나 몰두할 것이기 때문이다. (…) 만약 누군가가 국가의 사무에 대하여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말한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공화국의 운영에 관여하는 공적인 일을 사적인 일보다 우선에 놓은 것, 공적인 일의 가치를 사적인 금전적 이익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 이것이 공화국을 수호하는 덕성이라면 그 반대적 심성은 공화국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그것과 더불어 공화국의 또 다른 토대는 경제적 불평등을 최소화하는 일이다. 루소는 역시 <사회계약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재산은 어떤 시민도 재산으로 다른 시민을 살 수 있을 만큼 부유하지 않고, 어느 누구도 자기 몸을 팔아야할 만큼 가난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큰 쪽에서는 재산과 세력, 작은 쪽에서는 탐욕과 선망에 대해 저마다 자제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공화국 성원들 사이에 넘어설 수 없는 큰 경제적, 물질적 간극이 존재한다면,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면 양극화가 드리워져 있다면, 그것은 공화국의 위기를 초래하는 상황이다.
공적 덕성에 대해 구성원들이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리고 한쪽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상적 두려움 속에 빠져 있고, 다른 한 쪽은 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파는 굴욕을 감당해야 한다면 공화국의 정치미학을 꿈꾸기 어렵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오래전부터 우리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가치다. 여러 독재 권력과 권위주의 권력과의 투쟁을 통해 지켜오려 한 이념이다. 그러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 공적인 정치는 언제나 사적인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파편화되어왔고, 국민들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은 개인들 능력과 노력의 불가피한 결과로 간주되면서 적극적인 교정의 영역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지난 9년간의 보수정권 아래에서 더 적나라해졌다.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현재적 과제는 그 두 지점을 향하고 있다.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해온 긴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고, 국민 사이의 경제사회적 불평등을 줄여보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문재인 정부의 정치는 아마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이념적 두 기둥을 제대로 세우는 시도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거대한 정치적 숙제를 정치 보복으로, 복지 포퓰리즘으로 폄훼하려는 보수-반동 세력의 담론은 그런 점에서 반역사적이고, 반공화국적이다. 허쉬먼(Albert Hirshman)이 통찰한 반동의 담론들, '역효과의 수사', '무용성의 수사', '위험성의 수사'를 돌파해야 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의 규정이 형식적이고 소극적인 언어로만 남지 않으려면 지금의 개혁은 더 넓게, 더 깊게 전개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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