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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EA는 미국의 하수인인가

2007년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의 진상 <하>

2007년 9월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제기된 '북한-시리아 핵협력설'은 당시 진행되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가로막은 중대한 걸림돌이었다. 특히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2011년 5월 발표된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시리아에 영변형 원자로를 지어준 것을 기정사실화 했다. 북한을 핵확산의 주범으로 지목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독립연구자 가레쓰 포터는 1993년부터 10년간 북한 핵시설을 모니터링 했던 IAEA 사찰관 등의 증언을 통해 이스라엘이 공습으로 파괴한 시설은 원자로가 아니라 이미 5년 전 폐기된 미사일 격납고였다고 밝혔다. (☞ 2007년 '북한-시리아 핵 협력설'의 진상 <상> : 북한은 어떻게 악마화되었나) 지난 기사에 이어 포터의 기사 중 2번째, '시리아 핵 개발 증거는 어떻게 조작됐나'를 소개한다. 편집자 (☞ 원문 보기 : How Syrian-Nuke Evidence Was Faked)

최고의 북핵 전문가를 검증팀에서 배제

2008년 5월,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관 유스리 아부샤디는 안전담당 사무부총장 올리 하이노넨에게 곧 구성될 시리아 원자로 검증팀에 자신을 끼워달라고 요청했다. 아부샤디는 CIA가 '시리아 핵개발 증거'라며 공개한 동영상을 면밀히 분석해 불과 이틀 후인 2008년 4월 26일, 문제의 시설이 북한식 원자로일 수 없다는 점을 엘바라데이 사무총장 등에게 알린 바 있다. 그는 북핵 문제가 불거진 1993년부터 10년간 영변 원자로를 감시해 왔으며 이 문제로 북한을 15번이나 방문한 최고의 북핵 전문가였다.

그러나 하이노넨 부총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부샤디를 검증팀에 포함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사찰관은 자신의 조국에 대한 사찰에는 참여할 수 없다는 IAEA의 불문율을 그 이유로 댔다. 아부샤디는 자신은 시리아가 아니라 이집트 출신이라고 항변했다. 이에 대해 하이노넨은 "하지만 자네는 아랍 국가 출신이고 무슬림이잖아!"라고 받아쳤다.

결국 아부샤디는 검증팀에서 배제됐다. 아마도 그가 처음부터 CIA의 이른바 '시리아 핵증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레쓰 포터는 이 문제에 관해 하이노넨에게 논평을 요구했으나 하이노넨은 응답하지 않았다.

2008년 6월 하이노넨 부총장과 2명의 사찰관으로 시리아 핵 개발 검증팀이 구성됐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공습한 알키바르 시설물 인근에서 시료를 채취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첫 보고서를 통해 공습 현장에서 채취된 우라늄 입자들을 분석한 결과 "인위적 가공의 흔적이 보인다"고 밝혔다. 즉 누군가가 우라늄을 가공했다는 말이고, 이는 알키바르 시설이 핵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포터에 따르면 복수의 전 IAEA 사찰관들은 하이노넨의 시료 분석 및 결론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다. 우선 2011년까지 IAEA 검증 및 안보정책 조정국장을 지낸 타리크 라우프는 "우라늄이나 플루토늄의 방사성 동위원소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3, 4개 연구소에 분석을 의뢰해 그 결과가 모두 일치해야 한다는 것이 IAEA의 원칙"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경우, 이 시료들을 분석한 연구소들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시료 채취 3개월 후인 2008년 9월 말,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이 직접 "현재까지 우리는 어떠한 핵물질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후 다른 연구소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이 '처음 발견'됐고 이것이 11월 보고서의 근거가 된 것이다. 이는 IAEA의 핵물질 분석 절차 및 기준을 심각하게 위반한 것이라고 포터는 지적한다.

▲ 이스라엘이 공습한 시리아의 건물. 위성으로 촬영됐다. ⓒ미 정부

알키바르 사찰관의 고백

이보다 더 충격적인 고백이 있다. 하이노넨 검증팀에 참여했던 몽골 출신의 사찰관 오를로흐 도르즈카이다프의 고백이다. 그에 따르면 알키바르 시설물 주변에서 채취된 모든 시료들에서 인공 처리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은 반면 유일하게 양성 반응을 보인 시료는 이른바 원자로 건물 옆 지원 시설의 화장실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그는 최초의 핵처리 증거가 '발견된' 직후 이 사실을 미국 출신의 전직 IAEA 고위 사찰관 로버트 켈리에게 털어놓았다. 켈리는 포터와의 인터뷰에서 도르즈카이도프가 이른바 최초의 핵처리 증거가 나온 직후 너무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누군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전했다. 켈리는 미 에너지부 산하의 원격탐지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으며 이라크에 대한 핵사찰에서 책임자로 일했던 인물이다.

도르즈카이도프는 이후 IAEA를 퇴직하고 몽골로 돌아갔다가 2015년 12월 사망했다. 켈리는 그의 사망 이후에야 그의 고백을 포터에게 전했다.

포터는 이메일을 통해 하이노넨에게 켈리의 증언에 대한 논평을 요구했으나 하이노넨은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포터는 미국의 저명한 핵전문가이자 하이노넨과 몇 차례 논문을 공동 저술한 바 있는 데이비드 올브라이트가 2013년 1월 자신이 속한 연구소의 웹페이지에 알키바르의 우라늄 입자 시료는 "원자로 옆 건물의 탈의실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포터는 만일 알키바르 시설이 원자로이고 여기서 핵활동이 이루어졌다면 방사성 우라늄이 건물 내부에서만 발견될 수가 없으며 건물 외부에서도 다량으로 검출됐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와 관련, 켈리는 포터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가장 합리적 설명"은 '교차 오염', 즉 사찰관의 옷 등 외부에서 묻혀온 우라늄 입자가 내부에 원래 있던 것으로 오인된 경우라고 말했다. 교차 오염에 대해서는 앞에 말한 타리크 라우프도 같은 의견이었다.

1990년대 초 이라크 핵사찰팀의 책임자였던 켈리에 따르면, 당시 IAEA 분석 결과 이라크가 우라늄을 무기급인 90%까지 농축했던 것으로 나타나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는 IAEA 연구소에 있던 우라늄 입자가 실수로 시료에 포함된 결과였음이 밝혀졌다. 즉 교차 오염으로 인한 잘못된 분석이었으며 이러한 사례는 종종 있었다는 것이다.

흑연감속로가 파괴됐는데 방사성 흑연이 전혀 없다?

그러나 2008년 11월의 첫 보고서에서 아부샤디가 가장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은 방사성 흑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었다. 영변 원자로는 흑연감속로이다. 만일 키바르 시설이 흑연감속로이고 이스라엘 공습 당시 가동 중이었다면 수 백 톤의 방사성 흑연이 사방으로 흩어졌어야 마땅하다. 당연히 하이노넨 검증팀이 방사성 흑연을 검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검증팀은 알키바르 현장에서 방사성 흑연을 검출해내지 못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2008년 11월 13일, 보고서 초안을 놓고 벌어진 회의에서 아부샤디는 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하이노넨은 "아직 흑연 시료의 방사성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아부샤디는 "방사성 흑연이 뭔지 모르십니까? 방사성 흑연은 금세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쏘아붙였다.

이 문제에 대한 포터의 질문에 대해서도 하이노넨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첫 보고서가 11월 중 발표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아부샤디는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에게 서한을 보내 현 상태로 보고서가 발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저의 전문가적 소견으로는 (방사성 흑연이 검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검증팀의 분석 결과와 결론은 서로 모순됩니다. 즉 알키바르 시설은 원자로(흑연감속로)일 수가 없습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고서는 예정대로 발표됐다. 그리고 며칠 후 엘바라데이의 특별보좌관 그레이엄 앤드루는 아부샤디에게 "이 문제에 관해 더 이상 (사무총장에게) 이메일을 보내지 말 것"과 "조직의 방침을 따를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IAEA 내에서 누구보다 북한 원자로를 잘 아는 전문가는 이른바 '북한-시리아 핵 협력'의 현장 검증에도 참여하지 못했고, 검증팀의 보고서에 대한 이의 제기도 묵살됐다. 이후 IAEA는 2년 반에 걸쳐 '북한-시리아 핵 협력'에 대한 보고서를 9차례 발표했지만 방사성 흑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다만 2011년 5월의 최종 보고서에서 흑연 시료 입자가 "너무 작아서 제대고 순도 분석을 할 수 없었다"고 해명했을 뿐이다. 그리고 보고서의 결론은 알키바르 시설은 북한 지원 하에 비밀리에 건설된 원자로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오크리지 국립핵연구소에 근무했던 핵공학자 베라드 나카이는 흑연 입자가 방사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반박했다.

하이노넨은 어떤 사람인가?

알키바르 현장 검증을 책임졌던 IAEA 사무부총장 올리 하이노넨은 2010년 8월 IAEA를 떠났다. 그리고 한 달도 채 안 돼 하버드대의 과학 및 국제문제 벨퍼센터에 자리를 꿰찼으며 이후 이란 핵 협상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는 또한 민주주의수호재단의 과학 및 비확산 담당 선임 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스라엘 리쿠드당 정부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

▲ 지난 2007년 올리 하이노넨 국제원자력기구(IAEA) 부총장(가운데 붉은 넥타이)과 칼루바 치툼보 안전조치국장 등 4명으로 구성된 IAEA 실무대표단이 북한 핵시설 폐쇄를 위한 사전 협의를 위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모습. ⓒ연합뉴스

시리아 핵보고서와 북핵 협상

미 CIA가 북한-시리아 핵 협력의 증거라며 11분짜리 동영상을 공개한 것은 북핵 신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실무팀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2008년 4월 24일이었다. 즉 북핵 협상이 진전을 보이자 이를 가로막기 위한 의도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IAEA의 시리아 핵 검증과 북핵 협상은 관계가 없을까? 시기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IAEA가 시리아 핵 검증에 착수한 2008년 6월 북한은 영변 냉각탑을 폭파했다. 6월 27일이다. 2007년 2.13합의에 따른 북핵 불능화의 첫 가시적 조치였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기로 했다. 그러나 미국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8월 11일로 예상된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실행에 옮기지 않은 것이다. 북한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재가동에 들어갔으며 사용 후 연료봉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방사화학실에 대한 IAEA 감시요원들의 접근도 차단했다.

다급해진 미국은 10월 1일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평양에 급파해 북한과 협상했고 결국 10월 11일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했다. 그리고 11월 IAEA는 북한-시리아 핵협력에 대한 첫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와 관련, 당시 IAEA 수장인 엘바라데이 사무총장의 당시 발언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아스라엘의 공습 사실이 알려지고 한 달 여 후인 2007년 10월 28일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은 이스라엘이 공격한 시설물이 비밀 핵시설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떤 증거도 제공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나아가 "어떤 국가가 핵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으면 우리(IAEA)에게 와야 하는 시스템이 있으며 가서 조사할 권한은 우리가 갖고 있다"면서 "선제 폭격을 하고 나중에 질문을 하는 것은 이 시스템을 허물고 어떤 의혹에 대한 해결에도 이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IAEA의 시리아 핵 검증이 시작된 지 3개월 후인 2008년 9월 말에는 "현재까지 우리는 어떠한 핵물질의 증거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과연 무엇이 IAEA로 하여금 북한-시리아 핵 협력을 확신하게 만든 것일까? IAEA는 1957년 미국 주도 하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연구와 국제적 공동관리를 위하여 설립된 국제기구다. 하지만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예컨대 1993년에는 IAEA 헌장에도 없는 북한 군사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다가 북한의 거센 반발을 샀다. 1990년대 초 이후 이라크에 대한 광범위한 사찰로 이라크가 핵무기 건설을 포기했음을 알고도 이를 빌미로 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막지 못했다.

우리는 북한-시리아 핵 협력을 기정사실화한 2011년 5월 IAEA 보고서가 왜, 어떤 과정을 거쳐 채택됐는지 구체적 사정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이 보고서가 실제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IAEA 보고서가 북한-시리아 핵협력에 대한 국제 사회의 공식 견해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앞으로도 북핵 문제 해결의 중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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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프레시안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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