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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지성'과의 투쟁, 복지 진영은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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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反지성'과의 투쟁, 복지 진영은 준비가 되었는가?"

[의제27 '시선']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집단지성과 반(反)지성

최근 들어 보편적 복지라는 용어가 고생하고 있다. 온갖 TV, 신문, 시사잡지 등에서 보편적 복지의 실효성에 대해 집중 해부하고 있고, 각종 간판 TV 토론회에서도 이를 주제로 찬반 토론을 벌이고 있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 드디어 복지담론이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환영할 만한 일이다. 언제 한국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인식이 있었던가? 복지는 외롭고 쓸쓸하고 가난해 극심한 고통에 처해있는 불쌍한 이웃에 대한 자선이며, 아름답고 선한 행위로만 치부되어졌다. 국가의 복지정책도 빈곤계층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국한지으며 결코 경제에 부담을 주지 않아야만 하는, 그리고 수많은 정책 분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그러는 사이에도 복지정책은 확대되어, 누구라도 암으로 실의에 젖어 있을 때 제법 든든한 지원을 건강보험에서 행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재작년부터는 직장생활자 중 60세가 되면서 200만원 이상의 연금을 죽을 때까지 받는 연금제도의 진가를 맛보는 국민들도 생기게 되었다. 최근에는 집안 구성원 모두가 경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소진되고 또 소진될 정도로 무거운 짐이 되었던 치매걸린 조부모나 부모님들의 경우에도 적은 부담으로 집에서 아니면 시설에서 좀 더 편하게 모시는 장기요양보험도 잔잔히 국민의 가정을 감싸주고 있다. 매월 25일이면 80%의 노인들에게 9만원 정도의 돈이 꼬박꼬박 통장에 들어와 "자식보다 낫다"는 기초노령연금제도도 시행된 지 4년째를 맞고 있다. 심지어 올해부터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가정의 70%정도가 공식적인 보육료를 면제받게 된다. 즉, 이 모든 사실들은 어느덧 이제 복지제도가 결코 극빈계층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 대부분 삶에 제법 깊숙이 파고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현실의 변화를 국민들은 이미 자각하고 있고 인지하고 있으며 복지의 새로운 경지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극빈계층만이 아니라 중산층 대부분이 자신의 능력으로만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 고달픈 삶에 짓눌려 살아가는 것에 지쳐있던 터에 삶을 받쳐 주는 또 다른 지지대가 있을 수 있다는, 그것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체감되지도 않는 정부의 '○% 경제성장율 달성'보다도 훨씬 살같은 것을 알아채는 일종의 집단지성이 발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강고하기만했던 보수의 담론과 보수의 정치지형이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한방으로 날아가고 보편적 복지에 대한 지평을 성큼 확장시킨 것은 분명 이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 이러한 국민 인식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를 동물적 후각(?)으로 알아챈 정치인들이 너도 나도 '○○○ 복지'로 포장하여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정립하기에 다다른 것이 아니었던가? 심지어 보수를 자처하는 정치인까지도.

산업화 과정에서도, 민주화 과정에서도 항상 한발 앞서나갔던 국민들의 집단지성이 이제 복지국가의 대장정에서도 또 한발 앞서 나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되는 가운데, 오히려 이러한 국민들의 집단지성을 가리고 혼란을 주려는 일부 지식인들의 해괴한 논리와 주장을 접하노라면 씁쓸하지 못해 처연하기까지 하다. 하늘로 해를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처연함 말이다.

바로 최근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논쟁에서 보편적 복지를 반대하고 비난하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몇가지 주장들은 너무나 확신에 찬 논리와 주장이지만 알고보면 사실의 왜곡인지 무지의 소치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심각함이 드러나고 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들추어 보자.

▲보편적 복지를 둘러싼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보편적 복지를 "부자 급식"이라고 주장하며 비난한다. ⓒ연합뉴스
첫 번째가 '2050년 복지지출 자동성숙론'이다. 이미 DJ정부 들어 복지제도의 발전에 불을 당길 때부터 주로 KDI 등 국책경제연구소에서 등장한 논거였으나 이번에도 예의 KDI나 조세연구원 등에서 이러한 주장과 그 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 핵심은 현재의 고령화속도와 다양한 제도 도입 정도를 놓고 볼 때 2050년경 자동적으로 OECD 국가들의 GDP상 사회지출비 비중 평균치인 20%대에 진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전망이 아니라 현재의 복지제도에 대한 비약적 발전을 주장하는 진영에 대해 재갈을 물리는 목적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키 어렵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지금으로부터 물경 40년뒤 겨우 OECD 평균 수준에 한국 국민의 삶의 수준이 도달한다는 것이 무에 그리 엄청난 일인가? 더군다나 장기재정추계 과정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추정변수들, 예컨대 GDP 증가율, 경제활동참가율, 물가상승율, 인구증가율, 빈곤율, 기대수명율, 재정증가율 등등을 무슨 근거로 어떻게 대입하였는지 그리고 이에 대한 정확성을 어떻게 자신하겠다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또한 OECD 평균치에 한참 모자라는 각종 부문들, 예컨대 의료의 보장성 수준, 빈곤인구의 수혜정도, 사회서비스 충족율, 탈상품화율 등등에 대해 아무런 진전도 못시킨 채 오로지 노인인구의 급속안 증가라는 미래의 재앙적 요소만을 걱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전문가의 권위를 빌어 대중을 겁박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성인과 유아 단순비교 불가론'이다. 이는 기획재정부가 설파한 논리로, 현재의 선진국들은 이미 경제수준과 복지수준이 성인단계에 있고 우리나라는 유아단계에서 성인으로 가고 있는 과정인데 성급하게 양자를 비교하는 것이 무리라는 주장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굳이 말하자면 발달지체아동이라 할 수 있다. 선진국의 1인당 GDP 1만불 시대, 2만불 시대와 비교해 보더라도 턱없이 부족한 복지지출비를 생각하면 유아가 시간이 지나면 의당 성인이 될 것이란 단순한 논리는 전혀 진단이 잘 못된 것이다. 발달이 지체된 아동에 대해 정확히 지체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에 걸맞는 치료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안될 일이 아닌가?

셋째는 '한국의 복지국가 기(旣)진입론'이다. 한국이 복지국가의 초기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되는 설(說)이란 점에서 일면 수용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복지수준을 진입단계에서 확대단계를 거쳐 성숙단계로 빠르게 유도해야한다는 논리의 축이 아니라 '이 정도면 되었기'에 속도를 조절함은 물론 선진국이 걱정하는 복지병을 우리도 염려해야 한다는 논리의 기반으로 삼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GDP의 반을 정부재정이나 사회보장 기여금으로 거두어 들여 그것의 반을 직접적으로 국민 개개인들의 소득보전의 형태인 사회적 임금으로 되돌리는 그런 나라와, GDP의 사분의 일을 거두어 들여 다시 그중에서 사분의 일만 사회적 임금으로 되돌리는 그런 나라를 한묶음으로 취급하는 용감함에 놀랄 뿐이다.

네 번째는 '보편적 복지의 망국적 포퓰리즘론'이다. 복지의 보수담론 중 가장 정치성이 짙은 주장에 속하는 것이니만큼 그 근거도 터무니없다. 이 주장은 보편적 복지가 이분법적으로 분류되는 어느 한쪽의 영역이 아니라 선별적 복지와의 사이에 연속체로서의 다양한 영역이 있다는 사실, 보편적 복지는 결코 누구나에게 공짜로 복지급여를 퍼주자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완전히 묵살한다. 보편적 복지가 인간의 지닌 신성한 사회권에 기초하고 진정으로 사회통합에 기여하며 전국민의 안정적 삶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선진적 제도이며 이미 복지선진국에서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고 발전되어 온 제도라는 사실도 무시한다. 그렇기에 '보편적 복지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는 주장이야말로 포퓰리즘적이며 망국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은 국민들이 이미 보편적 복지에 대해 발동시킨 집단지성과는 엄중히 대별되는 반(反)지성이 아닐 수 없다.

2011년과 2012년은 바야흐로 정치의 해가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지논쟁이 점화되는 것도 이러한 흐름과 연관되어있다. 정치인이나 일부 지식인들의 입에서 등장하는 각종 해괴한 논리와 주장이 집단지성의 눈을 멀게하기 보다는 오히려 집단지성으로 하여금 복지의 본질에 대해 더욱 분명히 눈 뜨게 하고 확실한 주관을 갖도록 하게 될 것이라 예상된다.

그렇다고 복지진영이 이러한 집단지성의 자체 작동만을 바랄 수는 없다. 치열한 반지성과의 투쟁을 통해 마침내 승인받는 고단한 과정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을 위해 복지진영은 준비되어있는가? 조용히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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