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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때문에 선진국 진입 못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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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때문에 선진국 진입 못 한다고?"

[법치의 표리(表裏)] 헌법 탓 좀 하지 말자

우리 사회에서 개헌은 이제 잊을만 하면 정치권이 가끔씩 꺼내드는 진부한 카드가 되어 버렸다. 3년 쯤 전에는 당시 국회의장이 개헌에 관한 연구자문위원회를 구성해 권력구조 개헌 논의에 불을 지폈었다. 재작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는 대통령이 선거구제도 및 행정구역제도 개편과 아울러 권력구조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상당기간 잠잠하던 정치권의 개헌 논의가 작년 말에 여권 일각에서 다시 고개를 들더니, 지난 주에 대통령이 신년 방송 좌담회에서 올해가 개헌의 적기라고 언급했다.

이번에는 권력구조 뿐만 아니라 남녀동등권 등 기본권이나 기후 분야, 남북 관련 문제 등도 개헌을 통해 손보는 포괄적 개헌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받아 여당이 지난 8일부터 개헌에 관해 끝장토론을 벌이자며 개헌 의총을 열었다.

그러나 이 의총은 개헌에 대한 치열한 토론 없이 맥 빠진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고, 사흘 일정을 이틀로 줄이면서 일부 의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내에 개헌논의 특별기구를 구성할 것을 박수로 결정하면서 막을 내렸다는 전언이다.

일부 여당의원들을 중심으로 정치권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개헌 논의를 촉발시켜 보겠다는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으나, 좀처럼 개헌 논의에 탄력이 붙지 않고 있는 형국이다.

▲ 지난 1일 좌담회에서 개헌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청와대

헌법 제정권과 개정권은 국민이 갖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해서, 나는 이러한 정치권 주도의 권력구조 개편 개헌논의는 이제 중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개헌의 논의 '주체'가 국민이 아니라 정치권이라는 점이 우선 큰 문제다. 개헌 논의에 국민이 빠져있다. 국민은 정치권의 권력구조 개헌타령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와 전세값에 도시 서민은 생활이 고달프고, 구제역과 살처분에 농민들은 상실감과 시름이 깊다. 이런 국민들의 눈에 민생문제 해결은 뒷전이고 큰 정쟁의 불씨가 될지도 모르는 권력구조 개헌을 계속해서 들고 나오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어떻게 비칠까?

현대의 대의제 민주국가에서 일반 법률은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만든다. 주권자인 국민이 가지는 입법권이 국회에 위임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법인 헌법에 대한 제정권과 개정권은 국민이 직접 가진다. 헌법학에서는 이를 "헌법제정권력과 헌법개정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 헌법도 국민이 헌법을 제정하고 헌법의 개정도 국민투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하고 있으며, 미국 헌법도 "우리들 합중국 인민들이(We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헌법은 국민이 제정한 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일반 법률에 대한 개정은 국회가 이를 주도하고 결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만, '국민의 법'인 헌법의 개정은 국민들에 의해 그 논의가 주도되고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우리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개헌의 절차는 대통령이나 재적과반수 국회의원의 발의, 공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국민투표에 의한 확정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개헌의 발의나 국회 의결은 정치권의 몫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개헌 발의권과 국회 의결권은 국민이 진정으로 개헌을 원할 때 대통령이나 국회가 이런 국민의 뜻을 담아서 국민을 대신해 행사해야 하는 것이다. 국민들은 권력구조 개헌에 아무 관심이 없는데, 대통령이나 국회가 이 권한이 헌법에 의해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한이라며 마구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우리 헌법과 현실의 간극이 큰가?

물론 헌법도 필요부득이한 경우에는 개정이 되어야 한다. 헌법과 현실의 간극은 벌어 질대로 벌어져 헌법이 현실적합성을 완전히 상실했는데도 불구하고 헌법개정에 나서지 않고 기존 헌법을 붙잡고만 있다면, 사회 내의 불만세력들이 폭력적 방법으로 헌법을 파괴하는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헌법 개정을 주장하는 그룹이 헌법파괴 그룹으로 바뀌어 헌정질서 자체가 종언을 고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헌은 필요부득이한 경우에는 해야 한다. 그러나 개헌은 반드시 헌법과 현실의 괴리가 이미 현저하고 대다수 국민이 개헌을 원할 때에만 이루어져야 바람직하다. 헌법이 한 나라의 최고법인 까닭에 헌법조항 하나의 개정은 다른 많은 일반 법률들의 개정을 낳으면서 그 나라 법질서나 국민 생활에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이 그런 땐가? 현행 헌법의 권력구조 조항과 정치현실의 간극이 현저해 그 조항들이 현실적합성을 완전히 상실했는가? 대다수 국민들이 간절하게 분권형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로의 개헌을 원하고 있는가? 국회의원들은 이번 설 연휴를 통해 개헌에 대한 국민들의 차가운 시선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국민의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들만의' 개헌타령에 시간을 허비하는 정치인들을 국민들은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헌법에 대한 정치권의 천박한 인식도 문제다. 헌법을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타산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하위법률 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헌법은 여러 정치세력 간 정치투쟁의 결과물이다. 그 정치투쟁은 때로는 유혈을 수반하기도 한다. 헌법조항 하나하나의 이면에는 그래서 피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현행헌법만 하더라도 오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고 대통령 선거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어 민주적인 '국민의' 정부를 세우고자 한 국민들의 피의 투쟁이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헌법은 우리가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로 대해야 할 우리의 최고법이다. 정치인들의 이해관계 때문에 함부로 손 대어선 안 되는 소중한 법인 것이다.

현행헌법이 만들어지고 세월이 23년이나 흘렀다는 사실을 개헌의 이유로 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선진국들일수록 헌법의 개정에는 신중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 일본 등 많은 선진국들에서는 개헌 없이 한 헌법이 오륙십년 씩 가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에 비해 우리 헌법은 1987년 현행헌법으로의 개헌이 제9차 개헌이었다. 1948년부터 1987년까지 39년에 걸쳐 건국헌법을 포함해 10개의 헌법이 있었으니까 한 헌법당 평균수명이 3.9년이었던 셈이다. 너무 잦은 개헌이었다.

이런 과거의 타성에 젖은 눈으로 보면 23년은 개헌이 필요한 오랜 세월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선진 외국들의 경우와 비교하면 23년의 세월은 그것만으로 개헌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개헌의 정당화 근거'가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23'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앞서 말한 대로 헌법과 현실의 간극이 현저히 커졌고 국민들이 그 개헌을 간절히 원하느냐다.

분권형 대통령제야 말로 정치도박이다

정치권에서 이번에 논의되고 있는 개헌의 '내용'에도 문제가 많다. 정치권의 최대 관심은 권력구조 개헌이다. 그리고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정치인들 중에는 정부형태를 현행의 대통령제에서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국회에서 뽑은 국무총리에게도 분산시켜, 외교나 국방은 대통령이 맡고 내정은 국무총리가 책임지는 권력분산형 대통령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프랑스식의 이원집정부제를 모델로 삼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 시도는 국민을 볼모로 성공확률이 낮은 정치실험을 감행하는 일종의 정치도박이 될 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헌정사를 통해 제대로 된 권력 분점의 경험을 쌓은 적이 없다. 그런 상황 하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상호간에 권력 행사를 자제하고 양보하면서 긴밀히 협조해야 운영의 묘가 발휘되고 성공에 이를 수 있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이 땅에서도 별 정치적 혼란없이 잘 정착될 수 있을까? 필자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우리는 1960년의 개헌으로 민주당 정권이 세워져 의원내각제를 통해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잠시 권력을 나누어 가졌을 때도 다시 민주당 구파니 신파니 하는 파벌싸움으로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권력 충돌을 일으키면서 정치적 혼란을 맞았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정치인들, 엄한 헌법 탓 좀 하지 마라

남녀동등권, 기후 분야, 남북 관련 문제 등 이명박 대통령이 내세우는 명분을 위해서도 개헌을 할 필요가 없다. 남녀동등권은 우리 헌법상의 평등조항들에서 이미 명문화되어 있고, 남북 관련 문제도 헌법상의 평화통일조항 등에서 이미 그 틀이 잡혀 있다. 기후 분야는 헌법에서 다룰 문제라기보다는 환경권의 한 세부과제로 일반 법률들에서 다루면 될 문제이다. 따라서 현재까지 정치권이 주장하는 개헌의 내용들에서도 개헌의 시급성이나 정당성은 별로 읽혀지지 않는다.

헌법은 국가의 통치구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중요한 틀을 제시하는 기본법이다. 헌법이 시시콜콜한 구체적인 사항까지 정할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헌법을 '윤곽규범'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헌법이라는 큰 틀 속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가는 것은 헌법조항을 구체화한 하위법률들과 정치인들의 노력, 그리고 정치문화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정치인들이 우리 정치가 후진적인 책임을 헌법에 전가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정치인은 "이 헌법으로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어렵다"는 말까지 하면서 정치 선진화를 위한 개헌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지금껏 평생 헌법 연구를 업으로 삼아온 필자가 보기에 우리 헌법은 '선진헌법'이라 불러 전혀 손색이 없는 훌륭한 헌법이다.

우리 헌법은 130개나 되는 많은 조항들 속에 여러 첨단적인 규정들을 담고 있는 모범적인 헌법인 것이다. 선진국 진입이 어려운 진짜 이유는 헌법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선진적인 헌법을 제대로 지키고 실천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자질과 정치문화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믿는다. 정치인들이 헌법을 탓하며 개헌을 말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과 삐뚤어진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를 되돌아보고 차분히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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