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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데자뷰인가 오래된 미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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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 데자뷰인가 오래된 미래인가

[손혁재 칼럼] MB가 원하는 건 개헌? 개헌논의?

데자뷰(déjà vu)라는 말이 있다. '이미 본'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인데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풀이된다. 지금 마주치는 상황이나 장면이 언제, 어디에선가 이미 겪었던 일처럼 친숙하게 느껴질 때 데자뷰라는 말을 쓴다. 개헌을 둘러싼 논의를 보면서 2007년 초 노무현 대통령이 추진하던 원포인트 개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등에 업고 야당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요구하자 내각제로 맞불을 놓았던 제5공화국 때 풍경과 겹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명박 대통령이 제기해서 다시 논란이 되고 있지만 개헌논의가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다. 2002년 대선 때에도, 2004년 총선 때에도, 2008년 총선 때에도 개헌 논의가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포인트 개헌'을 추진하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와서도 김형오 국회의장이 국회의장자문기구로 헌법개정자문위원회를 만들어 헌법개정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2009년 8.15경축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제안한 선거구제 개편도 개헌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 이 대통령은 설연휴를 앞둔 지난 1일 신년 TV좌담회를 갖고 올해 안에 개헌을 하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청와대

헌법은 한 나라의 대표적 규범으로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제반 구조와 상호관계를 기본적으로 틀 짓는다. 따라서 헌법의 변경은 가능한 한 억제하며,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도 신중하게 다루는 것이 국가 사회의 질서유지에 바람직하다. 더구나 우리 국민은 개헌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헌법 개정과정이 국민의 뜻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헌법 개정을 추진했다. 국민투표는 국민의 의사 존중보다는 권력장악의 정당성을 위한 동원용이었을 뿐이다. 제헌헌법 이후 1987년까지 모두 9차례 걸쳐 헌법이 개정되었으나 개헌의 내용은 주로 권력구조나 최고권력담당자의 선출방법의 변경이었다.

현행헌법은 1987년 제9차 개헌으로 성립되었다. 6월항쟁의 성과로 개정된 현행헌법은 장기집권과 독재정치를 막기 위해 대통령 단임제와 대통령 권한의 축소·국회 권한의 확대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에 따라 제6공화국을 거쳐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이명박 정부에 이르기까지 단임과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져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현행헌법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이 부각되었으므로 개헌논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대두되었던 개헌논의는 '5년 단임제'를 '정/부통령(또는 대통령) 4년 중임제'로 바꾸고,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며, '분산대통령제'를 도입하자는 것 등이었다. 대통령 단임제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장기집권의 폐단을 막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단임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단임제는 임기 중 국민의 신임을 묻기 어렵다. 5년의 임기도 짧고 임기말 현상이 너무 일찍 찾아와 소신 있는 국정운용이 어렵다. 4년마다 치러지는 국회의원과 임기가 맞지 않아 정치권과 행정부가 불협화음을 내게 된다. 따라서 중임제 개헌의 명분은 타당성이 있다. 정·부통령제는 고질병인 지역주의 정치의 치료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결선투표제는 어느 후보도 과반수를 얻지 못했을 때 1, 2위 득표자를 대상으로 재투표를 하는 것으로 프랑스 등에서 채택하고 있다. 직선제 도입 이후 줄곧 지지율 3, 40%대의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어려움을 겪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아직 논의가 본격화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권력분산형 정부형태를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 권력분산형 정부형태로 거론되는 것은 이원집정부제이다. 이원집정부제를 낯설어 하는 국민들이 많지만 이미 우리나라 정부형태에는 이원집정부제적 요소가 있다. 대통령제이면서 국무총리를 둔 것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에 이원집정부제가 소개된 것은 1980년이다. 유신체제가 무너진 뒤 개헌논의 과정에서 헌법학자 김철수 교수가 '권력분산형 대통령제'라는 명칭으로 처음 소개했다.

이원집정부제는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요소를 절충한 일종의 혼합정부이다. 이원집정부제는 평시에는 내각제처럼 운용되다가 비상시에는 대통령제처럼 운용된다. 평시에는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이 행정권을 행사하며 의회해산권이 있고 입법부에 책임을 진다. 그러다 비상시에는 입법부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 대통령이 수상 및 각료의 임면권과 비상대권(또는 국가긴급권)을 갖고 행정권을 전적으로 행사하게 된다. 이원집정부제의 대표적인 형태는 드골 헌법하의 프랑스 제5공화국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원래 이원집정부제는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발달했고 오스트리아, 핀란드,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등이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원집정부제의 기본원리는 첫째,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대통령은 입법부에게 책임을 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국가비상시에 비상대권을 발동, 직접 행정권을 행사할 수 있다. 둘째, 내각은 내각불신임권을 갖고 있는 입법부에게 연대 책임을 진다. 수상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입법부의 동의를 받아 임명해야 하고, 입법부가 내각을 불신임하면 대통령은 입법부를 해산할 수 있다. 셋째, 국가비상시에는 대통령의 권한이 확대되고 수상의 권한이 축소된다.

이원집정부제의 특성은 권력분산체제라는 점에 있지 않고 유연한 가변적 체제라는 점에 있다. 평시에는 내각제처럼 운용되어 입법부와 정부의 대립에서 오는 정국불안을 막을 수 있다. 그러다 비상시에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해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위기를 관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은 동시에 약점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이 국가 위기를 내세워 비상대권을 발동해 독선적으로 국정을 운영해도 입법부나 내각이 이를 효율적으로 견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국민의 대표기관인 입법부의 권한이 축소 제한되어 국민주권주의에 충실하지 못하고 독재화할 위험이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력을 주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원집정부제를 들 수 있다. 대통령은 국가긴급권, 수상임명권, 의회 해산권, 국군통수권을 지닌 국가원수였다. 입법부는 정부불신임권이 있었으며 강력한 입법권을 가졌다. 그러나 히틀러가 수상이 된 뒤 수권법(授權法)을 통과시켜 대통령제를 총통제로 대체시키고 국가 원수가 됨으로써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재국가가 되고 말았다.

프랑스 제5공화국의 이원집정부제도 내각제 요소를 채택하면서 수상 임명권과 수상의 제청에 따른 각료 임명권, 법률안 거부권, 하원 해산권 등 대통령에게 강력한 권한을 주었다. 또 중요한 법률안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와 비상대권을 수상 동의 없이 행사할 수 있는 등 대통령은 지위의 장기성, 불가침성, 무책임성을 바탕으로 통치했다. 수상은 정부의 활동을 지도하고 행정 각 부 및 군대를 지휘감독하고 대통령이 정한 정책을 시행하고 이에 대해 입법부에 책임을 지도록 했다. 대통령 권한이 막강하고 수상 권한은 약하며 입법부의 지위와 권한도 약했다. 정부의 안정성과 능률성을 존립근거로 내세운 이런 집행부제의 이중 구조를 오를레앙형 내각제라 불리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대통령제보다 내각제의 성격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이원집정부제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아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그 대통령이 임면권을 갖고 있는 총리 사이에서 어떻게 권력분산이 가능하겠는가. 권력분산은 국민이 뽑은 대통령과 역시 국민이 뽑은 국회 사이에서 이뤄져야 한다. 입법부와 행정부가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것이 올바른 권력분산이다. 나아가 국민을 통치(government)의 수혜 대상이 아니라 협치(governance)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분권과 자유의 취지에도 맞는다.

개헌의 필요성은 있지만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제기되고 논의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헌법개정문제는 잠복해 있다가 계기만 주어지면 정치의 중심주제로 작용하는 폭발력을 갖고 있다. 개헌을 논의하기 시작하면 다른 현안들이 묻혀버릴 가능성이 높다. 현행헌법이 적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반드시 현 시점에서 개헌을 해야 할 정도로 시급한 문제도 아니다. 더구나 야당은 물론이고, 한나라당의 친박계가 반대하고 있으며 친이계에서도 반대하는 의원들이 적지 않다. 개헌이 이뤄질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끊임없이 개헌이 거론되는 건 개헌을 하겠다는 의도보다는 개헌논의를 시작함으로써 국민과 언론, 야당의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것이 아닐까. 또 친이계를 결집시켜 레임덕을 늦추고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그러나 개헌논의는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의 원포인트 개헌 추진이 지금 상황과 자꾸 겹쳐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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