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 900쪽이 넘는 대작이 나왔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자 법전편찬위원장을 역임한 그는 '한국 사법의 창조자'다. "지난 10년 동안 '가인과의 시간 여행'을 통해 책을 썼다"는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한민국의 법제-사법-입법-윤리의 네 기둥을 세운 그는 대한민국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평한다.
김병로 전 대법원장의 일생을 살펴보면, '대법원장'이라는 자리를 뛰어넘는 그의 인간됨에 고개가 숙여진다. 그는 법률 전문 지식이 풍부한 '관료'에 머무르지 않았다. 1900년대 항일 의병 활동에 참여하고, 일제 하에서 신간회 활동을 주도했다. 또 1921년 변호사 활동을 시작한 뒤 안창호, 여운형, 이재유, 박헌영 등 좌우를 가리지 않고 항일 독립 투사들에 대한 변론을 도맡았다. 그는 식민지 법정에서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2000만 조선인 전체가 가졌다"는 주장을 거침없이 펼쳤고, 이런 사실이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 보도되면서 일제의 폭정에 신음하는 조선 민중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일제강점기 항일 변론 활동으로 대중적 인지도와 신망을 얻은 그는 이승만 정부에서 초대 대법원장이 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김규식의 사람'이라며 탐탁지 않아 했지만, 국무회의 과정에서 이범식 총리를 비롯한 다수가 그를 지지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끝까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 교수는 "가인 선생은 스스로 '이승만 정권의 대법원장'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발췌개헌, 4사5입 개헌, 특조령에 대한 위헌 결정 등 이승만 정권의 헌법 파괴 행위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그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남용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1957년 말 그의 퇴임 이후 일어난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고 <경향신문>을 폐간하더니, 야당 지도자 조봉암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시켰다. 결국 3.15 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획책하다 몰락했다.
스스로 나라를 되찾기 전에는 거리의 사람에 불과하다며 '가인(街人)'이라는 호를 썼던, '선공후사'를 넘어서 '지공무사'를 공직자의 자세로 여기며 평생을 강직하게 살아온 그의 삶을 우리의 삶에 그대로 투영시키기는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돌아보는 '사표(師表)'로 삼을 만 하다.
1910년대부터 1963년까지를 아우르는 역사책이기도 한 <가인 김병로>(박영사 펴냄)를 보면서, 역대 독재정권들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협소화' 시켰는지 새삼 깨닫는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은 항일 독립운동을 한 공산주의자를 변호했고, 농지개혁을 찬성하고, 반민특위 활동을 통해 친일파 청산에 적극 나섰으며, 국가보안법을 폐지되어야 할 법률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에겐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기 마련이다. 한 교수는 "우리의 사고는 대안적인 상상력에 낙인을 찍으며 계속 협소해진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저자인 한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1일 서울대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가인(街人)은 거인(巨人)이다
프레시안 : 가인(街人) 선생은 평생을 선공후사(先公後私)보다 엄격한 지공무사(至公無私)의 자세로 살았다. 6.25 한국전쟁 당시 현직 대법원장의 부인이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가인 선생의 공인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가인 선생의 삶을 들여다보면, '과연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한인섭 : 가인 선생처럼 살면 너무 힘들어서 안 된다.(웃음) 부담스럽다. 다만,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나 세속적인 유혹에 흔들릴 때 가인 선생의 삶을 떠올리며 한 번쯤은 마음을 다잡고 그의 삶을 참조하는 레퍼런스(referance)로 삼으면 된다.
프레시안 : 책을 내기까지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다면?
한인섭 : 처음부터 10년 걸릴 것을 예상했다면, 시작도 못 했을 것이다.(웃음) 이만할 줄 알았는데 파고 들어가니 이런 사실도 나오고 저런 사실도 나오고, 그렇게 10년 가인 선생과 시간 여행을 했다.
그동안 가인 선생을 연구한 책은 김진배 전 국회의원이 <경향신문> 기자 시절 가인 선생의 구술을 옮긴 '수상단편'을 정리해 낸 <가인 김병로>와 정치학자 김학준 씨가 쓴 <가인 김병로 평전> 등이 있지만, 법률가라는 가인 선생의 본령(本領)을 다루었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프레시안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과 초대 대법원장을 맡아 일종의 건국 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인섭 :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일제의 법률을 그대로 썼다. 민법은 1959년까지도 사용됐다. 너무 창피한 일 아닌가. 가인 선생은 "일본법은 우리의 형극 같다"며 "이를 국민에게 적용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심통할 일이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449쪽) 그는 정부 수립 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민법·민사소송법·상법·형법·형사소송법·헌법 등 사법 체계의 근간을 세웠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가인 선생이 만든 골격이 고스란히 내려오고 있다. '한국 사법의 창조자'라는 평이 과한 말이 아니다. 해방을 기준으로 70년이 지난 현재까지 영향력이 가장 큰 사람(거인)이 누구인가 하고 묻는다면, 당연히 가인 선생이다.(웃음)
프레시안 : '거리의 사람'이라는 의미의 '가인'을 뛰어넘는 호가 있을까?
한인섭 : 정신을 제일 잘 담은 호는 '백범(白凡)'인 것 같다. 백정과 범부, 보통사람이라는 뜻이다. 김구는 옥살이하면서도 '내가 지금은 감옥 바닥을 쓸고 있지만, 조선이 독립이 되면 정부 청사의 문지기가 돼 바닥을 쓸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도산(島山)' 안창호 역시 반도 강산을 줄인 말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의 자세가 그대로 보이는 좋은 호인 것 같다.
김병로의 '가인'은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 집이 없는 걸인이나 노숙자와 자신을 일치했다. 해방 후에는 바꿔야지 했다는데, 남북으로 갈라진 채 단독정부를 설립하게 되자 '가인'을 계속 썼다. '거리의 사람'이라는 호, 정말 흔치 않다.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쓰면 틀린 것이다.(웃음)
조선 제일가는 좌경 변호사, 법정에서 '조선 독립'을 외치다
프레시안 : 안창호, 여운형, 이재유, 박헌영 등 가인 선생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변론했다. 지금이라면 '빨갱이'라며 공격받을 일 아닌가?
한인섭 : 항일 변론의 정점은 1927~8년 사이 조선공산당 사건이다. 당시 조선공산당에 가담한 20대~30대 청년들을 변론한 것인데, 조선인 변호사 10여 명에 일본인 변호사가 가담해 변호인단이 많을 때는 2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그렇게 총 48회 재판을 끌고 갔다. 상상해 봐라. 얼마나 치열했겠는가.
당시 <조선일보>가 해당 사건을 가장 활발하게 대서특필했는데, 책 376쪽을 보자.
"예전 변호사 시절이나 신간회 시대에 법정에서 혹은 사회에서 일본관헌들과 싸울 적에 공산주의자를 늘 비호하였고 암묵리에 그네들과 공동전선을 펴서 日 관헌에 대항하여 왔지요. 그때의 우리 묵계가, 우리는 조선사람 독자의 '민족국가'를 만들려 함에 있었지요. '민족국가'! 주권을 찾아 우리 손에 쥐고, 아무 타력他力에 침범받은 바 없는 민족국가를 만든 뒤에, 3천만의 민의를 물어서 사회제도나 경제제도를 점진적이요 비혁명적인 합법적 방법으로 개혁하여 나가자 함이 나의 목표였지요. 오늘도 이 신념은 마찬가집니다. 나는 이 신념 밑에서 이 의자(대법원장)에 앉았고 또 일을 해 나갑니다."(1948년 10월 1일 <삼천리> 제6호 '회견기 : 반민법 실시와 대법원측 구상, 신법전의 발포와 기타에 대하야')
대법원장이 되고 난 뒤에도 "오늘도 이 신념은 마찬가"지라며 "이 신념 밑에서 이 의자(대법원장)에 앉았고 또 일을" 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가는 좌경 변호사'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지 않나?(웃음)
일제 치하에서 언론은 "유조리 최열렬한 김병로 씨의 주장"이라며, 가인 선생이 "목청을 돋우어 가지고 법정이 떠나갈 만치 소리를 지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책 87쪽을 보자.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사상은 조선인 전체가 가진 것이다. 피고 등의 한 일을 보면 ... 계획상 어떠한 일을 혹 가담하였다고 할지나 사실은 이천만의 조선민족이 독립사상을 가진 것과 같은 사상에 지나지 못하는 바임은 경찰서와 검사국의 기록을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다."(1923년 5월 13일 자 <동아일보>)
마음속으로 독립을 생각했다고 처벌한다면, 2000만 명을 다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립을 원한다'는 말이 법정 변론을 통해 기사로 대서특필됐다.(웃음)
한인섭 : 정작 본인은 정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정치가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했는데, 책 433쪽을 보자.
" ... 나는 결국 '정치는 죄악이다'라는 단안을 내리게 되었으므로 우리나라가 독립될 경우를 상상하면서도 나로서는 무엇이든지 권력이나 지위나 공리로 투쟁하는 정치적 각축장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상당히 굳게 가졌던 것입니다. 해방 후에도 ... 부득이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하여 정당을 결정하였으나 결국엔 뒤로 물러났었고 또 군정에 사법부장으로 책임을 맡게 된 것도 부득이한 경로가 있었던 것이오."(1958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가인 김병로옹 노변록(6))
프레시안 : 책을 보면서 '우리가 참 협소한 시각으로 대한민국 역사를 보고 있고, 현재 사회 이슈도 마찬가지로 협소한 시각에서 보고 있구나.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쭉 이랬던 것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 그런 면에서 이런 역사를 복원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한인섭 : 당시 시대가 아무리 보수적이었다고 해도 어떤 것은 요즘 시대에 진보적이라고 하는 것보다 더 진보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고는 대안적인 상상력에 낙인을 찍으며 계속 협소해진 것은 아닐까?(웃음)
'한국 사법의 창조자'도 국가보안법 반대했다
프레시안 : 법률이 처음 만들어질 때도 간통죄, 낙태죄, 국가보안법 등은 논란이었다. 간통죄는 2015년 2월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결정을 내렸지만, 낙태죄와 국가보안법은 지금도 논쟁 중이다. 안타까운 점은 해당 법률이 가인 선생의 초안과 달리, 국회 통과 과정에서 후퇴했다는 사실이다.
한인섭 : 가인 선생은 간통죄 폐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법전편찬위원회에서는 간통죄 심의를 거듭한 결과 "현대적인 민주사상으로선 죄의 구성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본 법안에 간통죄를 규정치 않기로 가결"(561쪽)했지만, 당시 정부는 오직 간통죄만 법전편찬위원회와 상반되게 쌍벌주의(부부의 간통을 평등하게 처벌하는 주의)로 변경해 국회에 제출했다.
"심의 중에 있어 가장 논란될 것은 간통죄 및 낙태죄의 존폐문제였는데 간통죄에 있어서는 쌍벌주의를 채택하였으며 낙태죄는 존치케 되었다. 그리고 국가보안법도 그대로 존치키로 되었다."(580쪽에 인용된 1953년 7월 10일 자 <조선일보> '국회, 형법안 통과' 기사 중)
프레시안 :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통해 낙태죄 폐지 논쟁이 다시 불 붙었다.
한인섭 : 과거와 현재는 맥락이 완전히 다르다. 6.25 한국전쟁과 같은 전시에서 낙태죄 규정을 만드는 데 특별한 이의가 없었다. 국회에서는 '낙태를 하는 것은 국사범(國事犯)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전시에서는 인구가 가장 중요한데, 낙태를 하면 병력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에 국사범으로 처벌하자는 것이다. 또 낙태를 조장하면 성적 문란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전혀 다른 논변의 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개개인의 자기 결정권이 강조되고 있으며, 조기 임신 여부와 피임 등 기술적인 방법도 발전했다. 또 혼전 성관계에 대한 인식의 변화 등 낙태죄를 법률적으로 건드릴 때가 왔다. 무엇보다 현재 낙태죄가 규범으로써 힘을 발휘하고 있나? 낙태죄 규정은 1960년대 산아제한정책이 관철되면서 사문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시대와 맞지 않다. 억지로 상징적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현재 시점에 적용 가능한 다른 법으로 바꿀 것인가 선택할 때가 됐다.
프레시안 : 국가보안법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라는 군사반란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시 임시입법으로, 제정단계부터 곧 폐지될 운명이었다. 가인 선생도 "다기다난한 특별법적 처벌 필요가 있는 부분을 형법에 흡수통합하면서, 특별법 자체는 폐지하는 것으로 구상하고 있"었다고 했다.(572쪽)
한인섭 : 가인 선생은 국회 본회의에서 형법제정안의 취지를 설명하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목록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국회 형법이 제정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은 폐지되거나 개정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됐다. 자유당은 그가 대법원장에서 퇴임한 이후,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이에 가인 선생은 언론 기고 및 대담, 논문 등을 통해 강하게 비판했다.
"김병로가 보기에, 신국가보안법은 "단순히 공산주의자들의 행동을 엄중히 처단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파생적 조항을 번잡하게 늘어놓음으로서 공산주의자들의 행동 이외에 모든 국민의 사회활동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절대로 자유스러워야 할 언론에 대하여 그것을 봉쇄하거나 또는 위협할 수 있는 조항을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여론과 정의, 기본권 보장의 관점에서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역설하고 있다."(736쪽)
(자유당은 1958년 12월 24일 국회 경호권을 발동해 국회의사당 문을 폐쇄하고 무술경관 300여 명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강제로 내쫓았다. 그리고는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지방자치법 개정안, 1959년 예산안 등을 2시간 만에 통과시켰다. 이를 '2·4 파동' 또는 '보안법 파동'이라고 한다. 편집자)
프레시안 : 변호사를 했던 가인 선생이 아닌 검사 출신의 전문가가 형법을 만들었다면, 훨씬 더 엄격했을 것 같다.
한인섭 : 형법과 형사소송법의 인권 보장 장치를 김병로, 엄상섭 두 분이 만들었다. 가인 선생이 초안을 작성하고 엄상섭 의원이 국회 법사위에서 내용을 조율해 가면서 하나하나 점검했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재정신청(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불복하여 그 불기소처분의 당부를 가려 달라고 직접 법원에 신청하는 제도)은 가인이 미처 성문화시키지 못한 것을 국회 법사위에서 채워넣은 것이다.
프레시안 : 법조문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 생소하다. 일본식 한문 투라는 지적도 여전하다.
한인섭 : 가인 선생은 나름 한글화를 위해 많은 시도를 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범위가 있지 않겠나. 그럼에도 계속 노력했다. 대표적인 것이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얘기하고, 거짓말을 하면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라는 증인 선서문이다. 이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고 한다.
당시 한자가 빼곡히 채워진 법전을 들고 변론하는 법정에서 '은폐', '축소', '왜곡', '허위 사실'이 아닌 '숨김', '보탬', '거짓말' 등 한글을 사용한다는 게 얼마나 낯선 일이겠는가. 하지만 가인 선생은 법정의 증인 선서는 온 국민이 하는 것이므로, 온 국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또 가능한 한 오해가 없게 국민들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바꾸는 작업을 끊임없이 하라는 교훈일 것이다.
프레시안 : 하지만 가족법 분야에 있어서는 전통적 가부장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법개혁운동을 주도한 이태영 변호사와 가인 선생이 대면한 일화는 읽으면서 화가 날 정도였다.
한인섭 : 가인 선생은 호주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등 부계혈통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근친혼은 불허하지만, 동성동본 간 혼인 여부는 '너그럽게' 즉 개인의 자유에 맡기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법전편찬위원회 위원들은 동성동본 간 혼인과 근친 간 혼인 모두를 반대했으며, 국회에서는 불혼의 범위를 4촌에서 8촌까지 넓혀 통과시켰다.
이 때문에 가인 선생에 대해 전통주의자라는 비판이 있는데, 김병로가 설정한 자신의 시대적 과업에는 사적 영역에서의 남녀평등은 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성과가 가족법 분야에서 두드러진 한계를 보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그는 보수주의자인가?'라고 물으면 '아니오'라고 답한 뒤, '민주주의자다'라고 말한다. 항일애국정신에 충만한 사람은 자연히 민주주의자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항일운동, 누구의 힘을 받아서 하겠는가. 국민의 힘 아니겠나. 그렇다면, 국민이 원하는 체제란 무엇이겠는가. '민(民)이 주인이 되는 나라' 아닌가. 결국 민주주의다.
'Mr. 헌법' , 김병로는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이었다
프레시안 : 가인 선생이 대법원장으로 삼권분립의 원칙에 충실하려고 했던 모습에서 민주주의자의 면모가 엿보인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사법권을 침해하려 했고, 그때마다 충돌이 빚어졌다.
한인섭 : 이승만 전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에게 "요즘 헌법 잘 계시느냐?"라며 가인 선생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가인 선생이 헌법을 내세우며 원칙을 고수하고 비판하는 모습에 몹시 못마땅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이 보기에 가인 선생은 이승만 정권의 대법원장으로는 적임자가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으로는 최적임자였다. 가인 선생은 아마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법원장이다'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이다'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또 '대한민국을 끌고 나갈 공동 책임자다'라는 생각으로, '특정 대통령의 대법원장이다'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굉장히 독특하지 않나.(웃음)
가인 선생은 개인의 존재감과 영향력으로 권력의 절대적 남용을 막아내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삼권분립의 균형추 역할을 했다. 하지만 대법원장 퇴임 후 균형은 바로 무너졌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개정하고 <경향신문>을 폐간하더니, 야당 지도자 조봉암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시켰다. 결국 3.15라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몰락했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가인 선생은 계속해서 권력을 견제했다.
한인섭 : 가인 선생은 생전에 '통합'을 지향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영남 학우회, 호남 학우회, 함경 학우회 등으로 나뉘어 있는 조직을 통합해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만들고, 좌우 합작의 '신간회'에 힘을 보탰다. 그는 해방 직후 한민당 등 우익정당 창당에 앞장서기도 했지만, '토지개혁'에 따른 이견으로 1946년 우익정당이 아닌 좌우 합작운동에 관여했다.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거치면서 가인 선생은 '대동단결'을 정치신조로 삼았다. "농어민, 상공인, 청소년, 노장년 할 것 없이 다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20쪽) 그는 민정당과 국민의당 창당에 앞장서며 야권 단일화에 힘썼다. 목표는 하나였다. 군정에 대항하기 위한 강력한 야당을 만드는 것. 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마지막 기력까지 쏟은 그는 결국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병상에 드러누웠고, 국립의료원의 한 병실에서 지내다가 퇴원하여 다음해 1월 별세하였다."(851쪽)
(1963년 10월 15일 치러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민주공화당 후보는 윤보선 민정당 후보를 15만6000여 표 차이로 겨우 이겼다. 한인섭 교수는 책에서 "야권이 반군정 대오로 단일화하고, 단일화의 감동적인 프로세스를 연출했다면, 선거의 결과는 충분히 뒤집혀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아슬아슬한 표차였다"며 "야권 지도자들이 뒤늦게 땅을 쳤을 결과"라고 말했다.(850~851쪽) 편집자)
"시대에 따라 역할과 좌표가 달라져야 한다"
한인섭 : 가인 선생도 정의를 매우 강조했다. "법관은 무엇보다 '정의의 수호자'이다", "정의의 상징으로서의 법관은 완전무결해야 한다", "세상 사람이 다 부정의에 빠져간다 할지라도 법관만큼은 정의를 최후까지 사수해야 한다" 등 정의를 계속 언급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최근 사람들의 인식에서 법조인은 정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한인섭 : 법무부는 법무부대로, 검찰은 검찰대로, 법원은 법원대로 '우리가 정의부다'라고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에게 그렇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다른 곳은 다 흐린데 사법부만 깨끗하다고 우리 사회가 깨끗해 질 수 있겠느냐 하는 냉소적인 시선이 있을 수 있지만, 김병로는 "다른 곳이야 어떻든 간에 자기가 맡은 위치에서만이라도 깨끗해진다면 그 자리만이라도 깨끗해지지 않겠느냐"는 자세로 일관했다."(540쪽)
가인 선생이 대법원장 시절 사건담당 판사가 변호사로부터 대접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에 그는 "관행이 무슨 관행"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판사와 변호사 간 식사 및 편의 제공이 지속되고 있고, 그 때문에 사법비리와 사법파동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때마다 가인 선생의 목소리, "관행이 무슨 관행이야?"를 기억했으면 좋겠다.(웃음)
프레시안 : 현재 법무·검찰개혁위원회 논의 사항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고, 또 하나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이다. 그런데 국회 법사위 논의가 매끄럽지 않은 것 같다.
한인섭 : 가인 선생이 형사 소송법을 만들 당시에는 일제 치하에서 강대해진 경찰 권력과 인권 유린을 통제해야 했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검찰의 지휘감독 역량이 부족했지만, 검찰이 경찰을 적절히 통제해 경찰의 권력 남용을 억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검찰은 '기소 독점주의', '검찰공화국'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따라서 검찰권 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을 재조정하자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주체가 돼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책임질 때 역량이 올라간다. 현재 경찰이 95% 이상 수사를 하면서도 보조자적 위치에 있다고들 하는데, 앞으로는 경찰이 책임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검찰이 현재 역할을 축소해 지휘감독권 중 지휘권을 약화시키고 감독권은 유지하면서 경찰권 남용을 견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역할과 좌표가 달라져야 한다.
프레시안 : 개혁위에서 낸 공수처안이 법무부를 거치면서 '축소됐다', '후퇴됐다'는 지적이 있다.
한인섭 : 입법 과정은 늘 갈등과 타협, 협상이 끊임없이 지속된다. 개혁위에서 낸 온전한 공수처 안이 있는가 하면, 법무부에서는 국회를 의식해서 조정한 안이 있는 것이고, 국회는 또 여야의 견해 차라는 게 있으니까 또 달라지고….(웃음)
책에 입법 과정에 대한 여러 사례가 나오는데, 중요한 법일수록 물 흐르듯 통과되는 경우가 없다. 설령 통과되었다고 해도 권력이나 방해세력에 의해 저지당한다.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법(반민법) 제정은 신속하게 이뤄졌지만, 특별위원회 활동은 미완에 그쳤다. 법이 통과되고 이에 대한 효과를 최대치로 발휘하고자 노력하는 사람(김병로)이 있는가 하면, 이를 찌그러뜨리기 위해 온갖 술책을 쓰는 사람(이승만)도 있다. 따라서 입법 정신이 온전히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민의 감시와 참여가 필요하다. 권력자에게 맡겨 놓고 '잘 되겠지' 기대하면, 대개는 잘 안 된다.(웃음)
프레시안 : 페이스북에 쓴 글을 보니 재밌더라. 셀프 인터뷰도 있고(11월 3일 자 '페북 자제하라고?'). 페이스북을 통한 소통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즐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인섭 : <가인 김병로> 하고 페이스북은 관계가 상당히 긴밀하다. 대략 1964년까지 과거의 이야기를 쓰면서 과거에만 사로잡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현재 관점에서의 협업을 하고자 페이스북에 책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반응을 살폈다. 전국 각지와 해외에 있는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부족한 지식을 채우는 데 있어 페이스북은 아주 유용한 도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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