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주교회의가 '낙태죄 폐지'에 집단적으로 반발하자, 청와대 관계자들은 천주교 주교회의를 직접 찾아가 '낙태죄에 대한 결론이 정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하며 한 발 물러섰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29일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에 있는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이용훈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장과 이동익 신부, 지영현 신부 등과 면담해 고개를 숙였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천주교를 방문한 것은 천주교계가 조직적으로 '낙태죄 폐지 반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지난 28일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 서명 운동'을 지시했다.
앞서 조국 민정수석은 '청와대 국민 청원'란에 한 달 새 서명자 20만 명을 돌파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서 지난 26일 "2018년에 실태 조사부터 재개하겠다"고 답했다. 조국 수석은 인공 임신중절에 대해 "태아 대 여성, 전면 금지 대 전면 허용식의 대립 구도를 넘어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단계"라고 했다.
현재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한 위헌 여부를 심리하고 있다. 청와대는 찬반 결정을 내지 않음으로써 헌법재판소 결정을 지켜보되, 사회적으로 '낙태죄 비범죄화' 논의에 한 발 더 나아가겠다는 입장을 낸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일부 천주교계는 '낙태죄 폐지 반대'에서 더 나아가, 강간당하거나 장애가 있을 경우 예외적으로 허용했던 임신중절수술 자체를 전부 허용하지 말자고 나서고 있다. 임신 초기의 임신중절수술을 허용하는 미국이나 유럽 대다수 국가들의 결정과는 정반대로 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천주교 주교회의는 표면적으로는 조국 민정수석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잘못 인용했다고 지적하며 반발하고 있다. 조국 민정수석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임신중절에 대해서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고 말했는데, 천주교 주교회의는 "교황은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면서 발끈했다.
박수현 대변인은 이날 면담 뒤 브리핑을 통해 "생명 존중이라는 천주교회의 입장을 겸허하게 청취했다"며 "청와대의 청원 답변 내용 중 교황님의 말씀은 <아이리시 타임스> 기사를 압축하는 과정에 실수가 있었음을 말씀드렸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교황이 낙태를 찬성한 것은 아니지 않나. 교황이 '낙태를 반대하지만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는데, 인용을 일부 빼먹은 점에서 실수를 인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국 민정수석이 인용했던 2013년 9월 <아이리시 타임스>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 교회가 동성애자, 이혼한 사람들, 낙태한 여성들에 대한 비난을 줄이고, 주요 의사 결정에서 여성의 참여를 늘려야 한다고 주문함으로써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적혀 있다.
이 인터뷰의 원 질문은 "목회자는 이혼한 사람들, 동성 커플, 다른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였고,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자나 임신 중절 수술을 한 여성에 대해 가톨릭계가 전향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적 상처를 입은 동성 커플들이 '교회가 우리를 항상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교회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다. 선한 의지를 가진 동성애자가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감히 나는 재단할 수 없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해 영적으로 간섭하는 건 가능하지 않다"고 답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에 결혼에 실패하고 낙태를 했던 한 여성이 이혼 후 재혼했고, 지금은 다섯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때의 낙태 경험은 그녀의 양심에 큰 짐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후회하고,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고해 신부는 뭘 하면 될까?"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외신들은 일제히 해당 인터뷰가 천주교 내 낙태죄나 동성애에 대한 전향적인 변화를 시사한다고 해석했다. <뉴욕타임스>는 "낙태와 동성애 결혼, 피임 등에 대한 투쟁을 정책의 우선 순위처럼 여겼던 전 세계 사제들에게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고, <로이터>는 "그동안 동성애나 낙태에 대해 단호히 반대해왔던 목사들에게 어조를 바꾸라고 강요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박수현 대변인은 "청와대가 낙태죄에 대해 어떤 예단을 하거나, 결정을 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도 "낙태죄에 대해 실태를 조사해보고 논의해보자는 것이지, 찬반을 논한 게 아니다"라고 거듭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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