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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일본군복 입은 조선 여인의 기관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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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남태평양, 일본군복 입은 조선 여인의 기관총이 있었다

[이동석의 남태평양 아리랑 ①] 일제의 '강제 동원', 다시 찾은 태평양 전선

일본과의 역사 청산은 아직 요원하다. 일제에 희생된 이들의 절규가 아직 오늘의 역사로 남아 있다. 아직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피해 사례도 많다.

일제의 강제동원에 의해 태평양전쟁에 휘말린 조선인 피해자 문제 역시 해결이 난망하다. 이 문제가 현재진행형임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 8.15 경축사에서도 확인된다. 당시 문 대통령은 "광복 70년이 지나도록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고통이 지속되고 있다"며 "그간 강제동원의 실상이 부분적으로 밝혀졌지만, 아직 그 피해 규모가 다 드러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강제징용 문제는 과거 노무현 정부 때 이 문제는 한일기본조약에서 해결된 문제이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한국 정부가 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라는 일본 NHK 기자의 질문, 혹은 '반박'에 대한 답변이었다

일본과 시베리아, 남태평양 곳곳에 일제에 강제동원되어 혹사당하다 죽어간 조선인들의 원념이 서려있다. 이동석 다큐멘터리 PD(앤미디어 회장)는 1992년, 남태평양 곳곳에 남은 우리 선조들의 피해 사례를 파헤친 9부작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를 연출해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에 희생된 조선인들의 한을 재조명했다.

이 PD는 KBS와 MBC에서 수많은 장편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특히 우리 다큐멘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역작 시리즈 <인간극장>을 처음 기획·제작해 휴먼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방향을 정립했다. 보통 사람의 삶을 다큐멘터리화한다는 발상은 혁신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 위안부 문제를 졸속 합의함에 따라 일본과의 역사 문제는 다시금 두 나라 외교, 시민 문제에 첨예한 갈등 사안으로 떠올랐다. 이에 이 PD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용을 총 7차례에 걸쳐 재조명해, 잊혀서는 안 될 역사 문제를 환기하고자 한다. 편집자.

다시 기록하는 태평양전쟁 희생자의 발자취

남태평양 여러 섬(남양군도)과 일본열도, 그리고 사할린을 헤집고 다닌 것은 1991년 가을부터였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의 전선(戰線)을 추적하면 거기 아무도 모르는 중에 사라진 억울한 한민족의 영혼이 아직도 구천을 떠돌고 있을지 모르고, 세월의 흙더미를 파헤쳐 곧추 세워야 할 한민족의 통한사(痛恨史)가 이제나 저제나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에서였다.

가설은 맞았다. 그 전선에는 남의 전쟁에 끼여 들어가 억울한 희생을 당했기에 징용, 종군위안부, 학병 등으로 대분류해서 역사의 갈피에 끼워 넣고 접어버리기에는 너무도 분하고 슬픈 한민족의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매 맞아 죽고 총 맞아 죽고 굶주려 죽고 성병으로 죽었다는 참혹한 사례들이 각인되어 있었다. 귀담아 듣고 집중해서 보면 하나하나가 그대로 역사일 듯싶은 기막힌 증언들도 있었다.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숱한 영혼들이 바다 위를 떠돌고 있었으며, 그때 그 비극을 막지 못했던 이 민족의 뼈저린 반성이 공명으로 울려왔다. 매 맞으면서도 굶주리면서도 그 현장 현장에 묻힌 한인의 흔적들이 이끼처럼 달라붙어 있어서 개념 없는 숙제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

1년6개월에 걸쳐 제작된 9부작 다큐멘터리 <잊혀진 전쟁-태평양전선을 따라서>의 답사와 촬영현장에서 발굴한 생생하고 기구한 이야기들을 옮긴다. 시점은 1991년 가을부터 6개월 후까지다.***

펠렐리우의 신사산

"물 반(半) 고기 반입니다. 여기 보세요. 손바닥으로 떠 올리기만 해도 잡힐 것 같지 않습니까?"
모터보트를 운전하며 럭키 김(金)은 연신 자랑이었다. 경치가 좋아서 자랑, 공기가 맑아서 자랑, 그리고 고기가 많아서 자랑. 제 흥에 겨워 떠드는 그의 소리는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융통성 없는 이 연출가는 제가 몰두한 의문이 풀리기 전에는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바다위에 그 가미카제 비행기는 떠 있을 것인가? 아직도 그 원주민 노인은 아리랑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 기관총은 아직도 신사산(神社山)에 남아 있을 것인가?

불과 닷새 동안의 답사기간에 섬과 섬, 섬을 돌아다니며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확인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았음에도 이 낙천적인 안내인은 애타는 내 속은 아랑곳없이 저 사는 곳 자랑에만 열을 올렸다. 가까스로 내 기분을 알아 차렸던지 그는 속력을 높여 분재 같은 섬과 섬 사이를 질주하며 신사산이 있다는 그 섬 펠렐리우(Peleliu)로 향했다.

탐험가 마젤란은 집어 삼킬 듯이 거칠고 사나운 대서양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칠레 남단해협을 지나게 되었다. 마젤란의 눈앞에 펼쳐진 바다는 지금껏 지나온 대서양과는 달리 잔잔하고 태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절로 감탄이 쏟아져 나왔다.

"아, 태평한 바다!" 그래서 그 바다는 太平洋(Pacific Ocean)이 되었고 그 해협은 마젤란해협이 되었다. 정말 태평양은 태평하고 태평한 바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400년이 지난 뒤 마젤란의 감탄은 착각으로 입증되었다. 천둥 번개보다 무섭고 격렬한 20세기의 집단 히스테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이 발발하면서 태평양은 대서양보다 더 거세게 출렁거렸다.

남양군도(南太平洋)의 이 섬나라 팔라우(필리핀 동남방, 괌 서남방)에도 전쟁의 광풍은 무섭게 몰아쳤다. 일본군의 태평양함대사령부가 있던 팔라우에서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연합군과 일본 쌍방 간에 대 혈전이 전개되었다. 사흘 동안 집중적인 공격을 감행한 연합군은 일주일치 탄약을 한꺼번에 쏟아 붓는 융단폭격으로 일본군을 궤멸시키고 마침내 이 섬나라를 점령했다.

유엔이 지정한 세계적인 청정지역 팔라우에는 그런 평가에 어울리지 않게 종전 50년이 가까워진 취재 당시까지도 곳곳에 전쟁의 흔적과 상처가 즐비했다. 포탄을 맞아 너덜너덜해진 일본군 지휘소 건물들이 정글 속에 방치되어 있었고 쌍방의 탱크와 기관총들은 아무데서나 눈에 띄었다. 섬 섬 섬마다 동굴 속에는 일본군의 기다란 대공포가 바다를 향해 설치되어 있었고, 바다 속 산호초위에는 일본군 가미카제 비행기가 물위에 떠 있었다. 이따금씩 정글에서는 해골과 갈비뼈, 등뼈가 발견되었으며 늙은 원주민들은 일본군가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보였다.

나는 그 속에서 한국인들이 머무른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동굴을 파고 대공포를 설치한 현장, 모래 대신 산호초를 빻아 활주로를 만든 정글속의 비행장, 포탄을 피해가며 등짐을 날라 건설했다는 다리, 음습한 동굴 속에 위치했었다는 종군위안소 현장…. 그런 중에 정글 속에 있는 신사산(神社山) 위에서 저 혼자 기관총을 들고 눈 아래 연합군에게 미친 듯이 총격을 가하다가 비참하게 사살 당했다는 일본군 조선 여인의 기관총이 아직 그곳에 남아있다는 원주민의 증언을 들었다. 그곳은 이 나라 300여개의 섬 중에 끝에서 두 번째 섬 펠렐리우였다. 나와 안내인 럭키 김은 그 현장으로 배를 몰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 팔라우 정글 속에 방치된 옛 일본군 지휘본부.

▲ 정글 속의 옛 일본군 중화기.

▲ 옛 일본군 전차.

불과 40여 년 전에 벌어진 손에 잡힐 듯한 실화(實話)를 여기 와서 처음으로 듣게 된 다큐멘터리 PD에게 그것은 정말 피가 거꾸로 흐를 만한 이야기였다. 그 산위에 정말 그녀가 쏘아댔던 기관총이 남아 있다면 나는 그 비극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구체적인 증거 하나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그런 뒤에야 팔라우 바다에 물이 半 이고 물고기가 半인지, 아니 물고기가 물보다 더 많다고 야합을 해줘야 할지 생각해 볼 일이었다.

"저기 잠깐 내려서 한사람 태우고 들어가야 합니다. 정글이 무성해서 우리끼리만 들어가면 길을 잃습니다. 엄청 큰 도마뱀도 위험하고요."
펠렐리우섬 한켠에 보트를 대었다. 저쪽 얕은 바다에서 원주민 대여섯이 고기를 잡고 있었다. 고기를 잡는 모습이 눈에 익었다. 한 사나이가 눈 위에 두 손을 펴서 햇빛을 차단하고 바다를 응시했다. 잠시 뒤 그가 손가락으로 바다 한켠을 가리키자 모두들 그 쪽으로 달려가 기다란 그물망을 쳤다. 다시 손가락신호가 떨어지자 일행은 잽싸게 물을 걷어차고 소리를 지르며 그물망 쪽으로 고기를 몰았다. 어린 시절 우리가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던 그 모습과 같았다. 팔뚝만 한 열대어들이 그물망에 목이 걸린 채 바둥댔다. 그들은 바둥대는 열대어들을 한 마리 씩 움켜쥐고 힘차게 목을 깨물었다 놓곤 했다.

"사자가 동물을 사냥할 때처럼 목을 물어뜯어야 물고기가 힘을 못 쓴답니다. 그냥 두면 힘이 센 물고기들이 그물을 뚫고 빠져나갈 수가 있거든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신호를 보냈으니까 저기 저 사람 곧 올 것입니다."
얼마 후 그가 왔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땅딸막하고 콧수염이 성성한 원주민이었다. 나는 가볍게 머리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는 엷은 미소로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어떻게 이 먼 섬까지 들어오셨습니까?"

나는 어리둥절했다. 어느 한군데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한국말이었다. 옆에서 럭키 김이 깔깔대고 웃었다.

"이사람 한국사람이에요. 원주민하고 똑같죠?"
"정말입니까? 아니 김형, 사람을 이렇게 놀리십니까? 기다리는 동안에 귀띔이라도 해주지 않고요.”
"이 PD님의 눈썰미를 본 거지요. 자, 얘기는 차츰 나누시고 어서 떠납시다. 다들 보트에 오르세요."
김정곤 씨를 그렇게 만났다. 그때가 1991년이었고 그가 원주민으로 산지 14년째였다. 우리는 서둘러서 보트에 올랐다. 서둘러야 할 이유를 김정곤 씨는 설명했다.

"여긴 만조 때가 되면 모기가 억수로 많습니다. 한국 같은 그런 모기가 아니라 하루살이 있죠? 그만한 놈들인데 물리면 잠을 못잡니다. 그동안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만조가 가까워지면 점점 모여들어서 바닷가나 늪지대 숲속 같은 곳을 새까맣게 덮습니다. 저녁에 더 심하죠. 그놈들 덤비기 전에 빨리 그 산에 올라갔다 오는 게 좋습니다."
태평양전쟁 자료필름에는 남양군도의 일본군이 모자에 방충망을 달고 전투에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연합군이 미세한 모기를 배양하여 일본군이 주둔한 남양군도에 살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곁들여 있다. 김정곤 씨가 설명한 모기가 바로 그 모기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섬을 오른쪽으로 돌아 이 섬 유일한 선착장에 배를 대었다. 그곳에 김 씨의 트럭이 있었다. 바삭바삭 낡고 작은 짐차였다. 김 씨의 차는 무성한 잎을 스치며 좁다란 길을 따라 정글 속으로 들어갔다. 군데군데 일본군의 진지가 보였고, 거미줄과 넝쿨이 뒤섞여 팔랑거리는 일본군 지휘부 건물이 유령처럼 거무튀튀하게 서 있었다. 이따금씩 대공포와 전차들이 세월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아직도 전쟁의 포염이 식지 않은 느낌이었다. 무표정한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그 전장(戰場)에 왔다는 임장감(臨場感)으로 긴장했고 내 눈은 분주했다.

정글 속에 활주로가 있었다. 모래대신 산호를 찧고 다져서 만든 작은 활주로였다. 일본군이 그들의 전투기가 뜨고 내릴 수 있도록 건설한 것이었다. 김 씨의 차는 활주로를 달렸다. 활주로 저 끝에, 작은 산이 보였다. 신사산(神社山)이었다.

일본의 神社가 있었다는 산, 그녀가 총 맞아 죽었다는 산. 그녀가 쏘아댄 그 기관총이 있다는 산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계속>

▲ 펠렐류섬 정글과 활주로. 반대편 끝에 신사산(神社山)이 있다.

▲ 신사산(神社山)의 일본 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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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

1973년에 TBC에 입사, 이후 35년간 다큐멘터리에 매달렸다. 성철스님 일대기, 손기정 다큐멘터리 등 다수의 인물 다큐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진실을 밝힌 <잊혀진 전쟁>을 기획, 연출을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추적한 <종군위안부>로 1993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정통다큐멘터리 월요기획을 만들었고, 인간극장, 한국탐구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기획,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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