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 5, 6호기 공론화는 탈핵 진영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깊은 고민들을 안겨주었다. 특히 대의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의 관계라든가 하는 점에서 말이다.
대통령의 공약 사항을 '사회적 공론화'에 맡기는 것을 두고 잘못한 일이라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꼭 잘못한 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탈핵 에너지전환에 공감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전자의 의견을 지지하는 듯하지만, 후자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후자의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이명박이 4대강(정확히는 한번도 대운하) 공약을 했는데, 그것도 대통령 공약이니 지켜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가라는 반문이다. 이에 대해서 예라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의 신고리 5, 6호기도 대통령 공약이니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4대강과 탈핵 공약을 구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4대강은 나쁜 정책이니 그것을 반대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탈핵은 당연히 좋은 공약이다. 그러나 내 입맛에 따라서 어떤 대통령 공약은 지켜야 할 것이고, 어떤 것은 안 지켜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로남불'이며,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쩌자는 것일까? 대통령 공약이라고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어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일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이번 경우에 잇대어 이야기하는 것이 이상한 감이 있지만, 이번의 사회적 공론화와 같이 숙의민주주의적 방법론을 활용해서 재고할 기회를 갖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숙의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의 보완물이라는 익숙한 주장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이제 그 주장에는 보다 구체적인 맥락이 달라붙게 되었다. 많은 비판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이번의 사회적 공론화는 신고리 5, 6호기 백지화라는 공약을 책임지고 설득하여 이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피하려는 의도(혹은 결과)에서 제시된 방안으로 해석되고 싶다.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무력화하는 방안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금 달리 이야기하면, 사회운동 세력이 정치권력에게 숙의민주주의를 관철시킨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초대되는 숙의민주주의라는 장에 던져진 것이다. 왜 신고리 5,6 호기 건설 재개 혹은 중단 여부를 묻는 의제인지, 왜 이번과 같은 공론조사 방식이며, 왜 사회적 공론화 기간은 3개월인지…. 기본적인 룰 셋팅에 전혀 개입/협상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회운동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내던져서 마지못해 뛴 선수가 된 것이다.
이런 맥락을 보면, 대통령 공약이니 무조건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으며 이를 재확인하는 방법으로 숙의민주주의를 활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너무 안이하다. 숙의민주주의 자체를 긍정하다보니 그것이 제시된 맥락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다. 의도야 어쨌든 정부의 결정을 사후적으로 설명하고 합리화해주는 보수적인 태도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일부의 주장대로, 정부가 대통령의 공약을 진지하게 이행하려 시도한 것은 현재의 약한 대의민주주의를 개선하는데 기여했을 것이며, 공약을 이행하려는 과정 속에서 논쟁과 갈등이 심화되면서 보다 높은 사회적 공론화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사회적 공론화는 꼭 잘 짜여진 제도적 숙의 모형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리민주주의'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갈등이 관리되고 예방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숙의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도 그런 것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번 공론화가 제안된 맥락과 실제 진행 방식, 그리고 결과를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다른 논자들은 숙의민주주의 혹은 시민참여 자체를 부정하는 경향도 있다. 다시 말해서 이번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얻은 성과가 전혀 없으며, 정권의 술수에 말려 들어 용인하기 힘든 큰 패배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거부했어야 옳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숙의민주주의 자체에 내재된 어떤 문제점(예컨대 현재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추인할 가능성이 높다는 등)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 실험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쪽도 꽤 있다. 결과적으로 청와대/정부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할 의도로 동원했다는 비판은 받아들이더라도, 현대 사회의 핵심적인 지배 양식인 '전문가/기술관료 독재'을 깨는데 일조한 것은 큰 성과라는 것이다. 초기에 보수 언론과 핵산업계가 무지한 일반 시민들이 어떻게 전문적인 에너지정책을 결정하냐며 퍼부은 맹공을 떠올려 보면, 의미 있는 평가인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동안 일부 전문가/활동가들만의 이야기거리고 국한되었던 어렵고 복잡한 의제를 폭넓은 공론장에서 논의해본 사회적 경험을 무시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번 공론화라는 정부 측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숙의민주주의 승리"라고 평가하고 선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어떤 맥락에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충분한 평가가 필요한 일이다. 시민을 참여시킨다는 측면에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숙의적 참여 방식의 설계와 운영 모든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탈핵 진영 안팎의 중론이다. 이런 평가를 탈핵 진영의 결과에 대한 불만에 따른 것으로만 좁게 이해해서는 안된다.
향후 공론조사를 비롯한 사회적 공론화/숙의적 방법론은 여기저기에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정부가 다른 사안에 대해서도 적용하겠다고 예고하고 있으며, 공론화 과정에 참여한 일부 전문가과 여론조사기관 등은 일종의 '사회적 공론화 산업'을 일으켜 세워 이를 부채질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이번에 그랬듯이,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책임 회피의 방식으로 이를 활용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회운동 진영은 이런 제안에 직면했을 때, 심각한 고민과 논란에 빠져 들 수 있다.
이번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에 대한 평가가 탈핵운동 진영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적으로도 중요한 이유가 이것일 것이다. 숙의민주주의(방법론)을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는 것도, 아니면 지배체제의 허구적인 정치도구로 간주하는 것도 모두 경계할 일이다. 만능론과 독배(毒盃) 사이에서 길을 잡아야 한다. 사회운동 진영에서 사회적 공론화 혹은 숙의민주주의 방법론을 어떻게 전략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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