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워야 할 이유는 늘 너무 많았다. 꾸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은 조금씩 파헤쳐 졌고, 국무총리실이 정권에 비판적이라며 한 민간인의 삶을 불법사찰을 통해 엉망으로 헤짚어 놓았으며, 여기에 청와대가 '대포폰'을 사용해 총리실의 불법사찰 증거를 없애는 데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끝내 새해 예산안마저 아무도 예상치 못한 12월 초에 이른바 '날치기'로 통과시킨 것이 정부여당이었다.
한여름 땡볕 아래 서서, 한겨울 칼바람을 얇은 천막에 의지해 피하며 쏟아부은 정성과 노력을 통해 민주당이 받은 것은 무엇일까. 강원과 충남, 경남 등 예상을 깨고 단체장 자리를 얻어낸 지방선거가 눈에 띄는 유일한 승리였다. 경기에서는 사실상 야권 단일화를 이뤄내고도 석패의 눈물을 흘려야 했고, 서울 역시 바람은 불었으나 결과는 패배였다. 유력한 대선 후보 1위 자리는 박근혜 전 대표가 내놓을 생각이 없다.
민주당은 한해의 마무리를 다시 거리에서 했다. 예산안이 통과된 바로 다음날부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서명운동을 시작한 민주당은 지난 14일부터는 전국을 돌며 정권규탄의 '촛불'을 들고 서명용지를 돌렸다. 손 대표에게는 당 대표로 선출된 이후 3달 동안 벌써 두 번째 장외투쟁이다.
유난히 매서웠던 날씨에도 그는 천막에서 '노숙'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갑 안의 손도 얼얼한 영하의 날씨가 이어졌지만 손 대표는 사람들과의 악수를 위해 오른손의 장갑은 과감히 벗어던졌다. 장갑조차 벗은 그의 오른손은 무엇을 얻었을까? 민주당의 지난 1년을 세 가지 키워드로 돌아봤다.
키워드 1. 드라마
▲ 전국을 돌며 서명을 받고 있는 손학규 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
재밌는 점은 주인공의 시련은 대부분 외부에서 비롯되고, 그 극복 역시 자주 외부의 힘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이다.
힘 없고 여리지만 마음은 당찬 주인공은 태생부터 나쁜 적들에 의해 자주 치명적인 위기에 놓인다. 그러나 '잔꾀'만 발달한 주인공의 적은 때로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아니면 주인공을 흠모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지혜와 도움으로 주인공은 매번 위기에서 탈출한다.
민주당의 지난 1년 역시 이병훈식 드라마와 같았다. 예산안 통과 이후 정국이 대표적인 예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와 '오랜 벗'이라는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배신으로 민주당은 올해 최악의 시련을 만났다. 그런 민주당을 구해준 것은 이른바 '형님예산'이라는 '적들'의 오만 또는 실수였다.
이명박 정부를 무릎 꿇게 한 세종시 수정안을 부결시킨 힘도 마찬가지다. 수적인 약세에도 불구하고 세종시 수정안을 막은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원칙'에 따른 적진의 분열의 힘이 컸다.
지난 1년 가운데 가장 화려한 드라마를 연출했던 지방선거도 그렇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지방선거는 현 정부의 '부자감세'로 팍팍해진 국민들에게 무상급식으로 대표되는 보편적 복지가 통하면서 이뤄낸 성과인데, 무상급식을 온전히 민주당의 브랜드라고 보긴 어렵다"고 평가했다.
물론 때로 주인공의 강인한 의지와 불굴의 노력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업적 또한 있다. 민주당은 지난 8월 단행된 개각에서 총리 후보자를 포함해 무려 3명을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시켰다.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에 대해서도 민주당은 청와대의 대포폰 사용 사실을 밝혀내고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사찰까지 드러내면서 여권을 당혹케 했다.
키워드 2. 존재감
탄탄한 대본과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력에도 시청자로부터 외면 받는 드라마는 있다. 낮은 시청률은 드라마의 존재감을 가볍게 한다.
존재감은 꼭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주연 배우이면서도 대중에게 잊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사 한 마디 없이 시종일관 무표정한 표정으로 조연 뒤에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인데도 '미친 존재감'을 자랑하는 이른바 '티벳궁녀'도 있다.
열심히 달려 왔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이유가 또 여기에 있다. 재보선에 지방선거까지 선거란 선거는 모두 이기면서 '선거의 왕'이라는 평을 들었던 정세균 전 대표의 대표 시절 지지율은 고작 1% 남짓이었다.
"대선 주자의 행보를 한 적이 없다"는 정 전 대표는 차치하더라도, 손학규 현 대표의 지지율도 당 대표 취임 이후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
당 대표 선출 이후 지지율 12.7%로 유시민 국민참여당 참여정책연구원장(12.3%)을 제치고 야권 후보 중 1위, 전체 대선 주자 중 2위를 기록했던 손학규 대표였다. 그러나 그는 지난 11월 넷째 주 조사에서는 8.2%의 한 자리수 지지율로 전체 대선주자 중 5위로 내려 앉았다.
칼바람을 맞으며 전국을 누비던 12월 넷째 주 여론조사에서 손학규 대표의 지지율은 7.7%에 불과했다. 1위는 박근혜 전 대표(29.1%)였고, 유시민 원장이 12.0%로 2위였다. 손 대표는 한명숙 전 총리(10.7%), 오세훈 서울시장(8.3%), 김문수 경기도지사(8.2%)보다 아래에 있었다. (이상 모두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 정례조사 결과)
물론 "손학규 대표의 지지율이 왜 높아야 하냐"는 근본적으로 다른 맥락의 문제제기도 있다. 손 대표 본인 역시 29일 "아직은 대선 준비 한다고 여유롭게 자기 욕심만 챙길 때가 아니"라고 말했다. 야당 대표로 해야 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이 말은 "시간은 아직 많다"는 여유의 반영이기도 하다. 손 대표의 낮은 지지율은 민주당의 낮은 지지율의 반영이기도 하다.
키워드 3. 연대
철저하게 '나홀로' 모든 것을 극복해내는 주인공은 사실,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드라마 속 주인공의 위기 극복 모범 답안은 바로 '연대'다. 주변 이들, 나아가 적이었던 사람까지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우리 편'의 힘을 배가시키는 것.
소수자인 야권에게 이 공식은 매우 중요하다. 지난 지방선거가 대표적인 예였다. 중앙당과 시민사회가 함께 한 이른바 '4+4 협상'은 결렬됐지만 '야권 단일후보'를 원하는 민심은 여러 당의 기득권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야당 내 여당'인 민주당은 "아무 것도 양보할 생각이 없다", "패권적이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지난 7.28 재보선은 더했다. 다양한 직급의 자리가 많은 지방선거와 달리 '금배지 경쟁'에서의 연대는 어려웠다.
▲ 지난 6월 지방선거 개표를 기다리고 있는 한명숙 당시 서울시장 후보의 지지자들. ⓒ프레시안(선명수) |
정세균 전 대표는 "지방선거와 재보선은 다르다"고 선을 그었고, 민주당의 이런 태도는 '깃발만 꽂아도 당선된다'던 광주에서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귀결됐다.
2012년 총선에서 이뤄질 연대의 미래가 그리 맑고 밝지만은 않은 이유다. 2012년 총선에서의 야권연대 성패 여부는 2012년 대선으로 가는 기초가 될 것이 자명하다.
민주당은 새해 다시 '2단계 투쟁'을 시작한다. 손학규 대표는 "1단계 투쟁이 민주대장정이었다면 2단계 투쟁은 정책대장정"이라고 말했다. 16개 광역시도를 돌며 진행된 1단계 투쟁이 정권 비판에 무게가 실렸다면 234개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 벌어질 2단계 투쟁은 수권 능력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이병훈 PD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언제나 '해피엔딩'이다. 주인공은 갖은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뜻하던 바를 이룬다. 손 대표와 민주당이 이병훈 PD식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손 대표의 오른손에 쥐어질 물건의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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