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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임신중절 진료 행태, 완전히 바뀐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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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임신중절 진료 행태, 완전히 바뀐 까닭?

[서리풀 연구通] 임신중절, 내과적 방법을 허하라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 합법화 및 도입"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10월 한 달 동안 23만5372명이 참여했다. 청와대는 30일 동안 20만 명 이상이 추천한 청원에 대해서는 정부가 직접 답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라 이는 현재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답변 대기 중인 청원'으로 게시돼 있다(☞바로 가기).

이번 주 열린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도 낙태는 중요한 이슈였다. 유남석 후보는 태아의 생명권은 보호받아야 하지만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의 자기결정권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낙태죄 처벌에 반대하고 임신 중단 합법화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아서,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낙태죄 폐지에 반대한다는 청원도 올라와 있는 상황이다.

보건학 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중 하나인 <국제 역학회지(International Journal of Epidemiology)> 4월호에는 한국의 이런 뜨거운 격론이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결과의 논문 한 편이 실렸다.


노르웨이 공중보건연구원과 베르겐 대학 연구진이 공동으로 집필한 이 논문은 노르웨이에서 내과적 임신중절 방법이 도입된 후, 임신중절의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논문 바로 가기). 내과적 임신중절이란 소위 '소파술'이라고 하는 외과적 시술 대신 미페프리스톤(mifepristone), 미소프로스톨(misoprostol), 메소트렉세이트(methotrexate) 등의 약물 투여를 통해 임신중단을 유도하는 방법이다. 세계보건기구가 2012년에 펴낸 [안전한 임신중절: 보건 체계를 위한 기술 및 정책 가이드]가 권고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로 가기)

연구진은 진료 행태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2008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임신중절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노르웨이 내 모든 병원을 대상으로 시행한 설문조사 자료를 분석했다. 또한 1998~2013년 동안의 '임신중절 등록체계'(레지스트리)에 보고된 임신중절 요청 사례 22만3692건도 분석에 활용했다. 노르웨이는 1979년부터 임신중절 등록체계를 구축하여, 임신중절 서비스를 요청한 모든 사례에 대해서 병원이 여성 이름과 개인식별번호를 제거하고 임상 관련 정보를 중앙시스템에 보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다른 건강정보 체계에 연계하거나 특정 여성의 임신중절 이력을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르웨이는 국립보건서비스 체계를 가진 국가로, 모든 산부인과는 완전히 무료로 임신중절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당연히, 공공보건 체계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임신중절 시술은 없다. 오직 의사만이 임신중절 시술을 할 수 있지만, 의사의 감독 하에 다른 보건 전문가에게 위임하는 것도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외과적 임신중절은 의사가 수행하고, 내과적 처치는 많은 경우 간호사가 맡고 있다.


노르웨이 병원이 내과적 임신중절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이지만, 공식적 임상 지침에 이 내용이 포함된 것은 2004년부터였다. 이 지침에 의하면 내과적 임신중절은 임신 9주까지 시행할 수 있으며, 병원에 입원해서 200~600mg의 미페프리스톤을 투여하고 42~48시간 후 800μg의 미소프리스톨을 투여하는 방식이 표준이었다. 2009년에는 지침이 개정되었다. 미페프리스톤 투여 후 환자가 병원에서 42~48시간을 대기할 필요 없이 집으로 돌아가 미소프로스톨을 자가투여할 수 있도록 했고, 내과적 임신중절이 가능한 기간도 9주에서 12주로 연장했다. 이렇게 자가투여하는 것이 두 약제 모두를 병원에서 투여하는 것보다 간단할 뿐 아니라 안전성도 동일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였다.


이러한 제도의 변화는 어떠한 결과를 낳았을까?

우선 병원 서베이 자료에 의하면, 내과적 임신중절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이 1997년에는 한 곳도 없었지만, 2001년 50%, 2010년이 되면 국내 모든 기관이 이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에는 병원들의 84.4%가 9-12주 사이에 내과적 임신중절 서비스를 제공했고, 92.1%가 미소프로스톨의 가정 내 자가 투여 방식을 선택했다 (그림 1).

▲ 내과적 임신중절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의 백분율 (파란색 내과적 임신중절, 빨간 색 미소프로스톨 가정 투여, 임신 9-12주 사이의 내과적 임신중절) (Creative Commons 적용)

한편 임신중절 등록체계 자료를 살펴보면, 1998년에는 전체 임신중절의 5.9%만이 내과적 중절이었던 것에 비해 2013년에는 그 비중이 82.1%로 높아졌다 (그림 2). 또한 임신 9주 이내에 시행된 임신중절의 빈도도 1998년 44.0%에서 2013년 77.8%로 늘어났다. 반면 임신중절 요청 이후 실제 임신중절 시술로 이어진 사례는 1998년 92.3%에서 2013년 88.5%로 꾸준히 감소했다. 내과적 처치는 외과적 시술에 비해 임신 7주 이내인 사례가 더 많았고, 여성의 학력 수준이 높고 임신횟수가 작을수록 내과적 시술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연령, 직업, 결혼 상태에 따른 내과적 처치, 외과적 시술의 빈도 차이는 없었다. 임신중절 서비스 요청과 실제 임신중절 사이의 대기 기간은 1998년 평균 11.3일에서 2013년 7.3일로 감소했다. 이 중 내과적 임신중절의 대기 시간은 1998년 12.3일에서 2013년 6.6일로 대폭 감소했고, 외과적 시술은 11.3일에서 10.1일로 소폭 감소했다.
▲ 1998~2013년 동안 총 22만3692건의 임신중절 등록 사례 중 내과적 처치(파란 색), 외과적 시술(빨간 색)의 비율.

이 논문은 여성에게 보다 안전하고 편리한 임신중절 방법이 도입되고 국가 임상지침에 포함되면서, 불과 15년 만에 진료 행태가 거의 완전하게 바뀌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임신중절이 보다 '쉬워지면서' 임신중절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임신중절의 건 수 자체는 거의 변하지 않았고 임신중절 비율 자체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연구진은 임신중절 요청 후 실제 중절로 이어진 비율이 1998년 92.3%에서 2013년 88.5%로 감소한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결정을 숙고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면서, 내과적 임신중절이 안전하고 비용-효율적 방법이기에 보건의료서비스 접근성이 낮거나 의료전문가 숫자가 제한적인 지역에서 특히 유용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국내에서는 모자보건법이 정한 몇 가지 예외 사유를 제외하고 원칙적으로 임신중절은 불법이다. 또한 논문에 언급된 내과적 처치 약물 미페프리스톤은 국내에 시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음성적으로, 그것도 거의 외과적 시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임신중절로 인한 건강 피해, 위법 행위로 인한 처벌, 임신의 지속으로 야기된 결과는 오롯이 여성들이 감내해야 한다. 인간의 임신이 여성만의 단성생식(單性生殖)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바 없음을 생각한다면, 이는 상당히 괴이한 일이다.


국제 인권 문서들은 건강권의 내용 중에 "과학적 진보(scientific progress)와 그 응용기술의 혜택을 향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바로 가기 : 건강과 인권에 관한 25가지 질문과 답변). 여성의 건강과 안녕을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한 방법으로 보호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한하거나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과연 국가의 건강권 보장 책무에 부합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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