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웃기만 하셨다.
푹 눌러 쓴 검정 털모자 속에서
할머니의 어두운 과거사가 삐죽이 새어 나오고 있다
그 언저리에 2월의 늦은 눈발이 설설 내리고
동구밖 어귀엔 혹시나 동생이 들어서지 않을까
내내 귀 쫑긋 올리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보다 더 낭랑 십팔세 꽃다운 나이에 순정을 바친
우리 서방님 이제나 저제나 오시려나
늘상 그리움에 주름진 얼굴 감추던 할머니
소시적 꿈 많은 청춘을 살라먹고 아니
왜놈들에게 빼앗긴 무명치마 흰저고리의
어머니같은 혼을 이제야 맘 놓고 훠이훠이 휘날리는
할머니 그렇게 지고지순한 할머니가
이제 날개를 펴고 살아남은 자가 그리워할
먼 머언 나라로 가시는군요
그곳에는 참기름같은 사랑이 있나요
그 먼 나라에는 헤어지지 못할
서방님 하나 기다리고 있나요
그래요 가시려거든 내 짝사랑 같은 마음도
아니 우리의 아리랑 같은 어깨춤도
그 가슴에 맘껏 가지고 가셔요
그리고 이옥선 할머니의 자분자분한 귓속말도
김군자 할머니의 그렁그렁한 타박거림도
박옥선 할머니의 맛깔나는 춤맵씨도
배춘희 할머니의 섹시한 그림솜씨도
문필기 할머니의 조용조용한 말동무도
강일출 할머니의 애교스런 질투도
김순옥 할머니의 알 듯 모를 듯 노랫말도
박옥련 할머니의 잔병치레로 힘든 발걸음도
와락 껴안고 웃음바람으로 하늘 바람으로
가시어요 그것이 내 어머니 같은 지돌이할머니의
희망이라면 또는 왕생하는 극락이라면
또 그곳이 경상북도 경주군 안강면 양월 창마을 고향이라면
소작농 딸년으로 태어나 지지리도 못나게시리
단단한 삶을 살아낸 우리의 지돌이할머니라면
가시는 걸음걸음 붉은 꽃 진달래 즈려밟고 가시어요
저 눈망울 맑은 퇴촌유치원 아이들의
고사리같은 손짓을 따라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옵나니
마냥 푸르러 곱디고운 십칠세 처녀로만
그 곳에서 사시어요 다시는
지긋해서 생각도 싫은 안강보통학교에서
조선말보다 일본말을 더 배우지도 말고
꽃사슴 같은 슬픈 짐승으로 콩밭 매고 밀을 심어
가을 추수 때면 지주에게 다 바치고 남은 쭉정이
걷어다 무솥에 푹푹 삶아 식솔 배 채우지 말고
꿈 많은 가시내 어느덧 앞가슴 봉긋한
열일곱 지돌이 처녀로만 영원하시어요
가끔은 이 어리석은 시인도 잊지 마시고
자나깨나 걱정 많던 나눔의집 식구들도 잊지 마시고
불심으로 원력을 펼치시는 원장스님도 잊지 마시고
목소리도 청청하게 시를 읽던 이기형 선생님도 꼭 기억 하시고
검정치마 흰저고리 살랑이며
고구려적 그 기상으로 가시다가
고이 머무는 그 곳에서 우리를 지켜 보셔요
우리는 기어이
아직도 남은 왜군을 물리치고
우리의 자주 독립을 이룰 겁니다
<시작노트>
나는 2005년부터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 계시는 일본군 위안부로 고통 받은 할머니들과 꾸준히 인연을 이어왔다. 당시 할머니들을 주제로 한 시낭송과 직접 증언을 듣는 문학행사는 여러분들이 최초라는 나눔의 집 사무국장님의 말이 기억난다. 그 때 나눔의집 문학한마당 진행을 맡았던 소복수 시인을 비롯 여성 시인, 작가들은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듣는 시간 내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참석자 대부분은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으며 일제 식민지 역사에 대한 울분과 일본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치솟기도 하였다.
2008년 세상을 떠나신 지돌이할머니는 참 말씀도 없고, 늘 차분한 분이셨다. 이 가을처럼 날씨가 차가운 계절이 다가오면 늘 털모자나 검정 벙거지를 눌러쓰고, 따뜻한 햇볕 아래 혼자 있기를 좋아 하셨다.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드리면 가느다란 미소를 지으며 여린 팔을 흔드신다. 간혹 아픈 과거사가 기억나는 날이면 중얼중얼 타령조로 혼잣말을 즐기신다. 젊은 날의 서방님도 생각나고, 중국에서 참 힘겹게 키워낸 아들, 딸들의 모습도 살아나는가 보다. 나는 가끔 할머니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침묵의 시간을 나누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 손등의 체온으로만 이야기를 듣고, 가는 눈빛으로만 순정한 십칠 세 처녀적 과거사를 아프게 느꼈다. 그러다 얼마 전 할머니에 대한 시를 썼다.
금년 7월 세상을 떠나신 김군자 할머니께서는 어느 핸가 상당히 상심한 듯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그 곳 할머니들은 일상처럼 점심을 드시고 나면 소화도 시킬 겸 나눔의 집 인근 마을을 산책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어귀를 지나는데 그 동네에 사는 같은 또래 할머니들이 김군자 할머니 일행을 보고 왜정 때 일본군인에게 많이 당해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느니, 일본 남자들에게 몸판 여자라는 등등 수군거리며 손가락질 하는 것을 보고 여간 속상한 게 아니었다고 들려주시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동네산책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납치되다시피 이국땅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처절하게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같은 여성으로서, 또는 동시대인으로서 위로의 손길은 건네지 못한다 해도 아픈 상처에 덫을 내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나눔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역사의 어머니이기도 한 할머니들께 아들, 딸의 심정으로 시 한 편씩을 낭송했지만, 그러나 그 분들의 가슴에 얼마만큼의 위로와 우리의 뜻이 전해졌을지, 그저 깊은 회한과 한없는 죄책감을 안고 돌아오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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