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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카산드라, 브룩슬리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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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카산드라, 브룩슬리 본

[의제27 '시선'] 그녀도 비참한 최후를 맞을까?

2010년 4월 7일, 미국 의회의 금융위기 조사위원회 청문회장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이 증인석에 섰다.

자신의 정책 실패는 인정하지 않으면서 변명으로 일관하던 그에게, 한 여성 조사위원이 1990년대 말 파생상품 시장의 규제를 반대했던 그의 정책으로 인해 금융위기를 초래한 모기지 대출을 근거로 한 파생상품인 CDS(Credit Default Swap)의 거래규모가 커진 것이 아니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린스펀은 당시에는 CDS의 비중이 낮았기 때문에 관련이 없다는 비겁한(?) 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그의 자유의지론자(Libertarian) 이념이 금융정책에 영향을 미쳐 결국 이러한 위기를 초래했고, 그 결과 수없이 많은 은행이 무너지게 하지 않았냐고 질책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의 옹호자로 알려진 그린스펀이 자신의 이념이 금융정책을 수행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뻔뻔한 대답을 할 때, 속이 뒤집어 지지 않을 미국인은 얼마나 되었을까? 비겁한 신자유주의의 진면목을 보여준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http://www.c-spanvideo.org/program/292886-101 참고)


▲ 그린스펀 전 Fed 의장. ⓒEPA=연합뉴스
그 모습은 사실 역사적 장면이었다. 그 여성 조사위원이 브룩슬리 본(Brooksley Born)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1996년에서 1999년까지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ommodity Futures Trading Commission) 의장을 역임했다. 원래 그녀는 힐러리 클린턴과 친해서 법무장관 물망에도 올랐으나, 빌 클린턴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 의장으로 낙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원회 업무를 파악하던 본은 파생상품 시장이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있으며, 주무 부서인 그녀의 위원회가 파생상품 시장의 거래 내용에 대해 정보가 많지 않다는 알게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 이렇게 투명하지 않은 금융시장이 존재한다는 것에 놀랐다. 그래서 그녀는 의장의 직권을 이용하여, 파생상품 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규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는 법안의 제정에 착수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린스펀이 나서서 본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12년간 연방준비제도 이사회 의장을 연임하며, 금융시장의 마에스트로로 불리던 그의 압력에 저항할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본은 달랐다. 그녀는 기존의 관습과 권위에 도전해 온 삶을 살아왔다.

마에스트로에게 저항한 여자

1961년 스탠포드 영문과를 졸업한 본은 처음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대학의 카운슬러는 여자가 간호사가 아닌 의사가 되려는 것은 의술보다는 출세를 위한 것이라는 판단 하에 반대하고, 그로 인해 그녀는 진로를 바꿔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여성이 거의 없었던 법학 전문대학원에서 그녀는 여성 최초로 법학 저널의 편집인을 역임하며 수석으로 졸업했다. 물론 남자 동료들의 수없이 많은 조롱을 견뎌낸 결과였다.

본의 증언에 따르면, 투명성을 조금 높이자는 것인데 그린스펀이 나서고 월가의 거대 투자은행들이 집중적으로 반대하고 나서자 오히려 이 시장에 뭔가 거대한 흑막이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린스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입법을 추진하자, 이번에는 그린스펀은 물론 재무부장관이던 루빈(Robert Rubin)과 서머스(Lawrence Summers), 그리고 증권거래위원장인 래빗(Arthur Levit)까지 나서서 반대했다. 사실상 백악관이 총력을 기울여 반대한 것이다. 월가의 집중적 로비를 받은 의원들은 아예 상품선물거래위원회를 무력화시킨다. 본은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10년이 지나서야 미국인들은 당시 그녀가 했던 경고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린스펀과 루빈의 요청으로 그녀를 하차시키는데 기여했던 래빗은 그녀에게 사과했다. 이 이야기는 2009년 10월 20일 미국 PBS 방송의 프론트라인이란 프로에서 '경고'(The Warning)란 제목으로 전국에 방영되었다.
(http://www.pbs.org/wgbh/pages/frontline/warning/ 참조. 이 비디오 누가 번역해서 인터넷에 올리면 좋을 것 같다.)

카산드라의 비애

미국의 부동산 거품을 경고했던 대표적 경제학자인 예일대학의 쉴러(Robert Shiller) 교수는 거품이 꺼지지 몇 해 전부터 목소리를 낮췄다. 거품은 지나봐야 안다는 마에스트로의 말에만 주목하는 세태에 굳이 나설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지금 한국경제에 경고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있다. 폭풍이 몰려오기 전의 고요함처럼 조용하기만 하다.

미국인들은 이제 그녀를 현대판 카산드라라고 부른다. 미모와 예지력을 갖춘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그런데 예지력과 함께 사람들이 그녀의 말은 믿지 않도록 하는 저주를 받았다는 전설 속의 비운의 여인이다. 어느 경제학자가 카산드라의 최후가 궁금해서 굳이 찾아봤다고 한다. 그랬더니 비참하게 찢겨 죽는단다. 암살을 당한다는 설도 있지만 아무튼 결과가 좋지 않다. 그러고보니 그도 요즘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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