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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는 아니야 쇠창살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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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는 아니야 쇠창살이 있으니까

[문학의 현장] 저수지

저수지
창고는 아니야 쇠창살이 있으니까

터널을 지나면 숨겼던 얼굴을 꺼내야 해
그것은 어둠과 양떼를 뒤섞는 일
침묵해, 목소리가 달라질 거랬어

헬륨을 통과하면 노랑에도 송곳니가 돋지

신발 곰인형 책가방 부르튼 입술 새끼손가락, 식인상어 뱃속에서 진흙 사람들이 맞는 첫 밤처럼
무슨 말인가 뱉어낼 듯 일렁이다가
기슭을 미끄러지는 거품 사이의 스티로폼 조각
우린

어떤 진면목일까 메아리를 허락하지 않는
작은 헝겊이 사각의 거대하고 완고한 얼굴을 흔들 때

<시작노트>

이것은 왼쪽이 아니다.

전공(電工)인 나는 늘 벽과 싸운다. 말은 싸움이지만 사실 벽과 나는 서로를 적대시 하지 않는다. 파이프를 심고 콘센트나 전등, 스위치 따위를 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장벽으로 남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보호막이 되는 벽은, 그것을 마주하는 나의 노동에도 똑같이 양가적인데, 건강한 삶을 유지시켜주는 동시에 근원적인 회의를 던져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은 아주 가끔 행위를 넘어 무념무상의 차원으로 나를 끌고 가서 일체의 번뇌 따위를 무화시키는 놀라운 마술을 펼치기도 한다. 나는 그 순간을 면벽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이야기 결말이 노동의 언저리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야기가 앞의 문장 중의 극히 일부분인 ‘아주 가끔’에 가 잇닿아 떨리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라는, 신도 짐승도 아닌 족속들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별다르지 않게 쉬운 노동과 큰 가치를 추구하려는 조금은 속된 속성을 가졌으므로 신자유주의가 가진 자들의 이익추구를 극단적으로 옹호하는 것과 합쳐지거나 반목하면서 내 내부에서 일으키는 물결 따위에 국한 되는 것도 아니다. 이데올로기가 여전한 위력을 발휘하는 한반도에서의 삶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추종할 것을 강요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 묻는다. 우리의 분명한 대답은 왼쪽인가. 이쪽과 저쪽이 아닌, 지극히 사람의 존엄을 무겁게 여기는 상식, 말 그대로 상식이 지켜지는 세계는 여기서는 요원한 것인가. 상식을 말하면 붉은 색을 칠해버리는 사람들과 꾸려가는 공동체는 과연 견딜만한 세계인가. 당신의 대답은 무찌르자 인가 이해하자 인가.

저수지는 받아들이는 입만 가져서 온갖 쓰레기를 다 삼키고도 고요하다. 상식은 거기를 가득 채운 물이 아닐까. 수런대면서 다 삭혀내고 마침내 맑아지면서 마셔도 좋을 물이 될 때까지 형태를 주장하지도 내용을 강조하지도 않는 저수지. 그런 게 체제일까. 한 깃대 아래 모일 때 세계는 왜 이다지도 완고해질까. 그때마저도 상식이 통하는 날이 오기를. 거기까지 가는 길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기를, 나의 면벽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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