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다'와 '페스트'
부다페스트에도 다뉴브가 흐른다. 유럽을 꿰는 강이다. 유럽사를 관통하는 장강이다. 헝가리에서는 부다와 페스트를 가른다. 강서(江西)가 부다(Buda)이고, 페스트(Pest)는 강동(江東)이다. 두 마을이 합심하여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합수와 합류가 부다페스트의 기저를 이룬다. 서편에서, 동녘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갔다. 우랄산맥 동편의 슬라브인들이 이 곳으로 이주한 것이 9세기, 일천년을 넘는다. '부다'는 슬라브어의 보다(вода), 물에서 유래했다. ‘페스트’에는 서쪽, 로마제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 마을을 'Pession'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슬라브의 서진을 가속시킨 것은 몽골세계제국이다. 헝가리는 유라시아 대제국의 서쪽 가장자리에 놓였다. 그 제국망(網)을 타고 이주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동유럽과 발칸 일대가 남슬라브의 땅(=유고슬라비아)이 된 것에도 몽골의 기여가 다대하다.
몽골 이후 서유라시아에서 굴기한 제국은 오스만과 러시아이다. 오스만의 입김이 먼저 미쳤다. 150년 가까이 오스만의 강역이 된다. 로마를 잇는 서방의 물결도 만만치 않았다. 합스부르크제국이 떨쳐 일어났다. 한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고도 불렸다. 부다페스트는 빈에 버금가는 제국의 제2도시로 성장한다. 빈이 서경(西京)이었다면, 부다페스트는 동경(東京)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두 제국이 몰락한다. 오스만도 합스부르크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제국의 와해 속에 솟아난 헝가리 공화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동쪽에서 새로운 대제국이 일어섰다. 러시아가 더욱 커져 소비에트연방, 소련이 된 것이다. 독일과의 쟁패 끝에 소련이 승리한다. 1949년 헝가리에도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하지만 소련의 위성국을 면치는 못했다. 몽골-오스만-합스부르크-소련으로 이어지는 숱한 제국의 변천사 끝에 마침내 독립을 달성한 것이 1991년이다.
제국의 변주는 부다와 페스트에 풍성한 유산을 남겨두었다.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힌다. 다뉴브 강을 끼고 있는 중심가는 그 자체로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다. 아름답기가 세계 두 번째라며 한껏 치켜 올린 여행지도 있고,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살기 좋은 도시라며 후하게 평가한 경제지도 있다. 과연 유람하기에도 제격이다. 미술관도 박물관도 가히 훌륭하다. 명멸했던 제국들의 유산을 조각으로, 그림으로, 건축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서관도 모자람이 없다. 르네상스의 영향을 깊이 받은 곳이다. 페스트에 헝가리 최초의 대학이 세워진 것은 1367년이며, 부다에 두 번째 대학이 설립된 것은 1395년이다. 처음으로 인쇄본 책이 발간된 것은 1473년이라고 한다. 동방의 인쇄술이 서구까지 가닿은 중간 지점이었다. 고로 15세기 부다페스트 도서관은 유럽에서 바티칸 다음가는 규모를 자랑했다. 역사와 철학, 과학 등 다방면의 진귀한 자료들을 두 눈에 가득 담을 수 있었다.
눈만 즐거운 도시도 아니다. 몸을 노곤노곤 풀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스파의 도시’로 유명하다. 로마에서 기원을 구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오스만의 영향이 결정적인 것 같다. 도시 곳곳에 공중목욕탕을 세웠다. 터키식 사우나가 널리 보급되었다. 20세기에는 도시 관광의 방편으로 온천욕을 크게 선전했다. 치료를 위하여, 휴식을 취하고자 서구인과 동구인들이 부다페스트로 몰려들었다. 음식 문화 또한 빠뜨릴 수 없겠다. 헝가리사의 풀코스, 종합 선물을 제공한다. 아시아에서 건너온 식자재에 유럽의 요리법을 접목시켰다. 유라시아의 용광로가 식판 위에서 펼쳐진다. 페르시아풍, 아랍풍, 터키풍 음식에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스의 풍미를 곁들인다. 그리스 샐러드에 아라비안 커피, 터키 디저트를 조합한 런치세트는 오감을 만족시키는 근사한 한 끼였다. 한 입, 한 모금, 지긋하게 느긋하게 천 년사를 음미했다.
하건만 최근 언론에서 접하는 부다페스트 소식은 좀체 아름답지가 못하다. 아우성이 요란하다. 혼란과 논란의 도가니처럼 보인다. '권위주의’로 퇴행하고 있다고 한다. '극우’와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간혹 '독재’라는 극언마저 불거진다. 체제 이행의 모범으로 간주되었던 헝가리가 후퇴하고 있다며 경고음이 맹렬하게 울려 퍼지는 것이다. 구미의 고급신문을 읽는 교양인일수록 헝가리의 현재에 눈살을 찌푸리고 쓴웃음을 짓기 십상이다. 내부에서 맞장구치는 이들도 있다. 좌파 정당과 진보적인 NGO들이 브뤼셀(과 베를린)에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낸다. EU와 미국에 '내정 간섭’을 요구한다. 현 집권당 및 정부의 역주행에 브레이크를 걸어달라는 것이다.
내 보기에는 엄살이나 호들갑이다. 헝가리는 여전히 민주 헌정 아래 작동한다. 한 유력한 정치인과 그의 정당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 또한 민심의 반영이다. 외부의 잣대로 재단하기보다는 내재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핵심은 역시 빅토르 오르반(Victor Orban) 총리이다. 2010년 이래 유럽에서 가장 논쟁적인 정치인이다. 헝가리 일국을 넘어 2017년 유럽을 짚기에도 요긴한 인물이다. 도발적인 화제를 제기하고, 촉발적인 화두를 제시한다. 그가 처음 역사에 등장한 것은 1989년이다. 1963년생, 26살 때였다. 헝가리판 586세대이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자 학생운동의 지도자였다. 1989년 체제의 장본인이라 하겠다. 헌데 그 자신이 헝가리사의 물줄기를 되돌리고(되살리고)있다. 적지 않은 외부인들은 역행이라고 비난한다. 역주행이라며 근심하고 회의한다. 나는 마냥 수긍하지만은 않는다. 더 깊이, 깊숙하게 들여다보고 자했다. 표류에 휩쓸리기보다는 저변에서 맥맥이 흐르는 복류를 주시해 보았다.
2. 이행과 탈이행
1989년 6월 16일, 영웅 광장(Hosok Tene)에서 영웅이 탄생한다. 수많은 군중을 앞에 두고 패기 넘치는 젊은 연사가 무대에 섰다. 핏대 높여 외친 것은 크게 둘이다. 안으로는 직선제를, 밖으로는 주헝가리 소련군의 철수를 주장했다. 선거 도입과 외세 축출, 헝가리 민주화의 분수령이 되었다. 그가 대중들에게 상기시킨 것은 1956년이다. 일찍이 모스크바에서 맞서 선생님과 선배들이 봉기하셨다. 소련군의 탱크 아래 3000명이 희생되었다. 그는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독립전쟁’이라고 명명했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 소련군 철수, 헝가리의 중립국화를 요구했던 조숙한 탈냉전의 몸부림이라고 했다. 과연 다른 미래는 다른 역사로부터 비롯한다. 과거사를 고쳐 씀으로써, 이름을 달리 붙여줌으로써, 헝가리의 출로가 열리게 된다. 1990년 직선제 실시로 공산당 독재가 막을 내렸다. 1991년 소련은 붕괴되었다. 격정으로 토해내었던 사자후가 불현 듯 현실이 된 것이다.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출중했다. 십대 중반 헝가리 공산주의 청년단의 대표를 맡는다. 공산주의 엘리트 소년이 '전향’하게 된 것은 군 복무 경험이 결정적이다. 군 장교 시절 헝가리의 실상을 절감한다. 전시작전권은 물론이요 평시작전권도 없었다. 헝가리인민공화국은 소련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근대적인 속국이었다. 대학원으로 복귀한 그는 폴란드의 자유연대노조를 연구하여 석사 논문을 제출한다. 사회과학자로 경력을 쌓으며 <세기의 종언>(Szazadveg)이라는 잡지도 편집했다. 결국 본인이 주도하는 신생정치단체를 만들기로 한다. 그것이 바로 Fidesz(Fiatal Demokratak Szovetsege)이다. '청년민주연합’ 쯤으로 옮길 수 있겠다. 학생운동의 선봉대이자 민주화운동의 전위였다. 민주화 이후에는 정당으로 발전한다. 당수로서 정권을 접수한 것이 1998년이다. 불과 35세, 최연소 총리였다. 반공주의자로서 그는 자유주의에 기울었다. 좌에서 우로 방향을 튼 '뉴라이트'였다고도 할 수 있다. 전심전력으로 탈공산화/탈소련화, 서구화/유럽화를 추구했다. 집권 이듬해인 1999년 NATO에 가입한다. 왕년의 사회주의 형제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 공습에도 가담했다. 헝가리는 2003년 이라크 전쟁에도 개입한다. 2004년에는 EU에도 가입하여 숙원을 이루었다. SU(Soviet Union)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13년 만에 당국가(Party-State)에서 시장국가(Market-State)로의 이행을 완수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도 이행의 주역은 반공주의자보다는 '반-반공주의자'였다. 왕년의 공산주의자들이 사민주의자로 변신하여 서유럽의 '제3의 길'과 보조를 맞춘다. 2002년과 2006년 총선에서 연달아 중도좌파정당이 승리했다. 오르반은 만 8년을 오롯이 야당 지도자로 보내야 했다. 절치부심, 와신상담, 환골탈태에 성공한다. 다시금 사상적 전환을 감행했다. 자유주의에서 멀어지고 보수주의/민족주의에 가까워졌다. 집권 사회당을 왕년의 공산당에 빗대었다. 모스크바에 굴종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이제는 브뤼셀(과 베를린)에 굴복하고 있다고 했다. 때마침 EU의 내부자들과 결탁한 사회당 간부들과 고위 관료들의 비리가 속속 탄로가 났다. 세 살 버릇 여든 간다. 제 버릇 남 못준다. 소련에 붙어먹었던 이들이 재빨리 말을 갈아타고 EU에 빌어먹으며 승승장구 했던 것이다. 오르반은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쌍으로 겨냥해 비난을 퍼부었다. 민족 정서가 부족한 이들, 국익을 배신하는 매국노라고 성토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부터 자유주의 국제주의까지, 세계화론자들은 언제라도 자신의 신념(과 이익)을 위하여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다며 거세게 쏘아붙이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결정타는 역시 2008년 세계금융위기이다. 유로위기가 삽시간에 EU 전체로 확산되었다. 서구화/유럽화가 '진보'였던가 회의감이 퍼지고 자괴감이 일었다. 오르반이 환기시킨 것은 다시금 1956년이다. 헝가리 혁명, '독립전쟁'의 주역들이 외쳤던 것은 동구화만큼이나 서구화도 아니었다. 중립화, 동/서 간의 중용을 취하여 중심을 다잡고자 했다. 1989년 모스크바에 맞서 일어난 기개를 발휘하여 2009년에는 브뤼셀에 도전하는 기상을 선보였다. 1956년의 적자이자 적통임을 자임하는 오르반의 결기에 다시금 헝가리 민중들은 환호하고 열광했다. 공산주의도 자유주의도 도시 중산층 엘리트의 이념이고 사상이고 문화일 뿐이라고 했다. 빅토르 오르반이야말로 '헝가리의 아들'이라고 했다. 2010년 Fidesz는 의석수 2/3를 넘는 지지로 총선에서 압승한다. 오르반은 8년 만에 총리 직에 복귀했다. 화려한 귀환이었다.
집권 2기, 정책과 노선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자신이 '구시대의 막내'였음을 자인하고 새 시대의 물꼬를 튼다. 이행(Transition)에서 탈이행(Post-Transition)으로 결자해지를 단행한다. 지난 이행을 '절반의 민주주의'라고 일컬었다. '잃어버린 체제전환'이라고도 했다. 구공산당 적폐들이 자유화/민주화에 편승하여 권좌 복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층 과감한 적폐 청산에 돌입했다. 자신이 도입했던 기왕의 자유화, 탈규제화, 민영화 정책을 되돌리기 시작한다. 경제 주권을 부쩍 강조했다. IMF와 EU, 다국적기업 등 글로벌 자본주의의 횡포에 저항하는 '자유의 전사'로 자신을 표상/포장한다. 브뤼셀과 부다페스트의 관계 또한 재정립하고 있다. 정치 주권을 옹호한다. 외자 제공을 빌미로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EU의 지원은 철저하게 헝가리의 실정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유럽화/세계화 일방의 전략도 수정하고 있다. 민족과 국가의 자율성을 더 강조한다. 2010년 유럽의회 논쟁이 상징적이다. 브뤼셀과 부다페스트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브뤼셀은 회원국이라면 마땅히 EU의 기준을 준수하라고 강변했고, 오르반은 헝가리에는 그 나름의 사정이 있다며 항변했다. 브뤼셀의 유로파 엘리트가 아니라 자신이야말로 민중과 더불어 함께하는 '민주주의자'라고 역설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의 브뤼셀을 어제의 모스크바에 견줌으로써 유럽 전체에 충격을 가한 것이다. 구미의 주류언론들이 오르반과 헝가리에 융단폭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SU의 이단아였던 오르반이 EU의 반항아로 취급받게 된 것이다.
자고로 지도자는 성과로, 결과로 평가받는다. 점점 헝가리의 지표가 좋아지고 있다. 금융위기로 바닥을 쳤던 경기가 되살아나고 있다. 가계와 기업, 국가 모두 회복 조짐이 뚜렷하다. 성장률은 오르고 실업률은 떨어졌다. 국가 부채는 줄어들었다. 외부의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S&P 같은 신용평가기관은 헝가리 등급을 두 단계나 높였다. 1989년 이래 장래 전망 또한 가장 좋다고 한다. 민심도 다르지 않다. 나라의 상황이 호전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2014년 총선에서도 또 다시 2/3를 넘는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했다. 즉 오르반이 독재자인 것이 아니다. 유권자들이 독점적 권력을 허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의 민주적 정통성을 부정할 수가 없다. 하여 2017년 현재 빅토르 오르반(독일의 메르켈과 더불어)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이다. 존재감 없는 영국 총리나 허수아비 프랑스 대통령과는 급이 전혀 다르다.
3. 열린 사회 vs 열린 역사
격이 다른 정치가라는 점은 그가 고유한 개념과 사상을 발신하는 주창자라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다시금 브뤼셀에서의 설전이 유명하다. 자유민주주의는 실패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행 20년, 헝가리에 좋은 정부도 효율적인 정치도 선사하지 못했다고 한다. 비단 동구만도 아니다. 이제는 서구에서도 자유민주주의는 늙고 낡은 구체제가 되었다고 했다. 유권자들의 의사/의지와는 유리된 과두체제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기한 것이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주의'(Illiberal Democracy)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결별시킨 것이다. 헝가리는 비자유주의 국가(Illiberal State)라고도 했다. 기성품 민주주의를 답습하기보다는 '다른 민주주의'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용어가 평생 그의 목을 옥죌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여기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비민주주의적 자유주의'라고만 했다면 열번이고 백번이고 공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무척이나 논쟁적인 화법이다. 쉬이 편들기가 힘들어진다.
2010년 총선 승리 직후 의회 개원 연설도 참조해볼만하다.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기념했던 대중 연설도 참고가 된다. 원자론적 '개인'이라는 개념을 부정했다. 개인과 개인의 사회계약으로 국가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사람은 나는 순간부터 이미 공동체의 일원이다. 부모, 형제/자매와 연결되고 이웃과 이어진다. 가족과 이웃, 마을과 교회가 정체성의 근간이다. 공산주의형 계급도 아니요, 시장주의형 시민도 아니다. 그 훨씬 이전에 먼저 '헝가리인'부터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헝가리인은 '헝가리인'으로서 도덕적 각성부터 해야 한다. 자유를 통으로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자유주의의 그 자유가 아닐 뿐이다. '비민주주의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획일주의/균일주의/평균주의에 맞서서 민족과 전통을 수호하는 '자유의 전사'를 자임한다. 자유주의의 자유는 자유에 대한 여러 관점 가운데 하나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다. 자유를 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 있다. 자유를 자유주의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다. '가짜 자유'(Fake Freedom)를 성토하고 '대안적 자유'를 역설한다. 그 대안적 자유의 보루로서 정치/경제적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을 옹호하는 것이다. 브뤼셀이 '보편'을 주장한다면, 부다페스트는 '정통'을 사수한다. 보편과 정통이 치열하게 길항하고 있다.
오르반이 정통으로서 내세우는 것은 기독교이다. 그 자신 칼빈주의에 투철한 신교도이다. 기독교가 없으면 오늘의 헝가리도 없다고 말한다. 고로 헝가리의 개혁과 개헌과 개벽은 기독교 의 혁신과 재건과 불가분이라고 한다. 정치개혁과 종교개혁이 공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헝가리도 유럽도 EU의 엘리트들이 주장하듯 18세기 계몽주의로부터 말미암아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겨우 200년에 젖줄을 대고 있는 자유주의/사회주의의 얕은 역사와 작별하겠다는 것이다. 올해는 2017년이고, 내년은 2018년이다. 예수가 태어난 해로부터 2017년이 흘렀고, 2018년째를 맞이하는 것이다. 2050년, 2500년이 되어도 다르지 않다. 유럽과 예수는 좀처럼 분리될 수가 없다. 오르반은 그 2000년의 유산 속에서 헝가리의 재생과 부활을 도모하는 것이다. 단순한 역사인식으로 그치지가 않는다. 곧바로 현실정치로 번안되고 있다. 그와 함께 Fidesz를 출범시켰던 자유주의/사회주의 동지들은 당을 떠난 지 오래이다. 현재 Fidesz와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정당은 기독교민주당이다. 기독교 정신(古/聖)과 민주주의(今/俗)가 결합하고 있는 것이다. 고금합작, 성속합작으로 자유주의/사회주의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오르반은 기독교에 바탕한 민족정서가 중요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헝가리의 전통을 간직한 가족과 마을과 교회가 헝가리의 미래를 선도할 것이라고도 한다. 브뤼셀의 유로파 엘리트들과는 첨예하게 갈라지는 지점이다. 하더라도 헝가리의 감정과 사상을 '비유럽적'이라고 단죄하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도 한다. 헝가리의 노선이 EU 안에서 소수파일 수는 있다. 그런데 그 소수자/소국의 권리도 인정하고 보호해주는 것이야말로 '유럽적 가치'가 아니냐고 항변한다. 사상의 이질성, 감수성의 다양성, 정체성의 복수성을 옹호하는 헝가리와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EU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유럽적'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헝가리인들은 브뤼셀에서 당당하게 대꾸하는 자국 총리의 사이다 발언에 청량감을 만끽한다. 반면으로 구미의 주요 언론들은 거칠다 못해 조악한 논평을 내놓는다. 여전히 공산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뾰족한 독설에서부터 '동양적 전제주의'라는 시대착오적 유산까지 들먹인다. 나아가 어리석은 헝가리 사람들에 대한 폄하와 혐오마저 노골적으로 표출한다.
오르반은 1989년 체제의 주역 가운데 유일하게 현역으로 살아남은 이다. 폴란드에서도 체코에서도 루마니아에서도 당시의 기수들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미 역사책의 인물이 되어버렸다. 오로지 오르반만이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부단하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9년의 시대정신, 자유화 및 민주화에 고착되거나 안주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고 있다. 자신의 과거를 스스로 넘어서고 있다. 미국식 경제와 유럽식 정치를 헝가리에 이식하는 이행이 헝가리 지도자의 사명이라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헝가리에는 고유의 가치와 문화와 전통이 있으며, 이를 수호하고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헝가리 정치인의 역할이라고 피력한다. 그 또한 일종의 '귀향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개인적 진화 과정이 시대적 전환과도 딱 들어맞았다. 1945년 확립된 세계질서가 동요하고 있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유기적 결합이 해체되어가고 있다. 선두주자였던 미국과 서유럽에서마저 자유주의도 위기이고 민주주의도 위기이다. 다른 정치에 대한 갈증이, 새 정치에 대한 타는 목마름이 전 지구를 석권한다. 오르반은 그 나름으로 해답을 제출한 인물이다.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오답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 헝가리인들이 깊이 호응하고 있다. 2018년 총선에도 그를 견제할 세력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내부에 적수가 부재하자, 외부에서 딴죽을 건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지 소로스이다. 소로스는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자본가이다. 사사건건 오르반과 적대하고 있다. 질긴 인연이다. 악연이 되고 말았다. 다시 1989년. 오르반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공부했다. 그의 학자금을 대주었던 사람이 바로 조지 소로스이다. 소로스 재단의 장학금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배운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1989년 체제의 청년 지도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90년부터 국회의원도 될 수 있었다. 27세 최연소 의원 오르반은 명백하게 '소로스 키드'였다. 무릇 공짜 돈은 없는 법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 오르반은 소로스 노선에 충실했다. '자유'와 '민주'와 '인권'으로 작동하는 열린사회를 헝가리에 심고자 했다. 조국 헝가리를 '동유럽의 아메리카', '작은 미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소로스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했던 것이다. 하건만 2010년부터 방향을 틀어 궤도를 급수정한 것이다. 소로스로서는 열불이 터질 만하다. 투자했던 돈이 아까울 법도 하다. 배신당했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내가 부다페스트를 여행했던 지난 4월, 오르반과 소로스의 다툼은 정점을 찍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에는 중부유럽 대학(Central European University)이 자리한다. 1991년에 들어섰다. 소로스가 모국에 세운 대학원 중심 명문대학이다. 동유럽 체제 이행을 선도하는 엘리트들을 배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사회과학, 법학, 공공정책, 경영학 등을 영어로 가르친다. 교수부터 교재까지 대개 미국에서 공급받는다. 자유화와 민주화를 전파하는 '열린사회'의 산파 같은 곳이다. 오르반을 잇는 또 다른 '소로스 키드'들을 배출하는 인재 양성소였던 것이다.
오르반이 그 중부유럽대학을 폐쇄시키려 들었다. 헝가리 교육부의 관할 밖에서 대학을 운영해 왔던 특권을 박탈시키려고 했다. 조지 소로스를 '헝가리의 적'이라고 명시하기까지 했다. 시내 도처에 소로스를 비판하는 정부 선전물이 가득했다. TV에서도 소로스를 까는 광고가 방영되었다. 문구가 제법 인상적이다.
"소로스가 최후의 웃음을 짓게 만들어서는 결코 안 된다."
구미 언론에서는 양자의 다툼을 '열린사회(Open Society)와 닫힌 국가(Closed State)'의 대결로 묘사한다. 그런 구석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게 또 전부는 아니다. 말을 조금 바꿀 수도 있다. '글로벌 헝가리'와 '토착적 헝가리'의 대결이기도 하다. 나아가 '열린 사회'와 '열린 역사'(Open History)의 길항이기도 하다. 소로스는 여전히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문명세계의 가능성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헝가리를 미국 같은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그의 선의를 통으로 부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그의 무지가 공포스럽다.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그 신념이 개탄스럽다. 미국이라는 신세계 건설은 원주민 문명을 사그리 밀어버린 진공 상태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다. 구대륙, 구세계에서는 좀체 가능하지가 않다. 나에게 내기를 걸라면 오르반을 택하겠다. 시간은, 역사는, 21세기는 왠지 오르반 편일 것 같다.
4. 역류(逆流)와 복류(伏流)
부다페스트에도 서풍이 잦아들고 동풍이 불어온다. 26세 오르반이 외쳤던 '유럽으로 돌아가자!'(Back to Europe!)은 옛말이 되었다. 도리어 EU는 위기의 진앙지이다. 설상가상으로 영국까지 떨어져나갔다. 더 이상 서방을 편애하지 않는다. 눈먼 사랑, 외사랑을 그친 것이다. 47세의 오르반이 총리에 복귀하면서 내뱉은 일성이 “동방 개방”(Opening to the East)이다. 동풍의 결이 여럿이다. 가까이로는 동유럽의 재통합을 꾀한다. 소련과 유고연방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죄다 해체되었다. 소국들로 분할되면서 EU의 입김에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헝가리는 영국처럼 EU 탈퇴를 추구하지 않는다. 대신 EU내 소국연합을 실현함으로써 브뤼셀에 일방으로 끌려 다니지 않는 협상력을 키우려고 한다. 동유럽국가의 협동으로 EU의 '내부 민주화'를 이끌겠다는 것이다. 기왕의 V4(헝가리,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를 돈독히 다지면서, 중부유럽 이니셔티브(Central European Initiative)를 발휘하고 있다. 나아가 EU와 러시아의 갈등을 중재하고 서유라시아의 대동단결을 촉진하는 가교 역할을 자임한다. 서구와 러시아 사이, '유럽반도'와 '러시아 내륙' 사이 한복판에 자리한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살리겠다는 것이다. 동/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외교를 펼쳐간다.
오르반의 시선은 유럽도 넘어서고 있다. 다뉴브 강은 동쪽으로 더욱 흘러 흑해까지 가닿는다. 흑해를 에둘러 싸고 있는 나라들이 러시아, 이란, 터키 등이다. 공히 유라시아형 제국의 후예 국가들이다. 이들과 접속하면 인도양과 동유라시아도 한 걸음이다. 인도와 아세안, 중국까지 이어진다. 유럽의 동과 서를 넘어 유라시아의 동서남북과 이어지는 것이다. 헝가리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중국의 일대일로에 호응한 나라였음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AIIB(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에도 앞장서 가입했다. 유라시아를 종과 횡으로 엮어가는 고속철과 고속도로, 석유와 천연가스 수송관, 인터넷 연결망이 죄다 헝가리를 통과하게 된다. 부다와 페스트는 재차 합수와 합류의 도시가 되어간다.
돌연한 사태만도 아니다. 부다페스트의 동편 오르치 광장을 지나면 장마당이 나온다. 10유로짜리 운동화와 4유로짜리 티셔츠를 살 수 있다. 양말과 시계, 핸드폰, 샴푸, 장난감 등 저렴한 일용품들이 널려 있다. 1991년부터 중국 상인들이 진출하여 만들어낸 시장이다. 1979년 개혁개방으로 태평양의 화교네트워크에 접속함으로써 초기자본을 축적한 이들이 공산체제 붕괴 직후 소련의 공백을 메우며 유라시아 전역의 (암)시장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왕년의 사회주의 국제주의 연결망을 십분 활용하여 '세계경영'에 나선 셈이다. 그 글로벌 중화망을 따라서 러시아인과 터키인, 카자흐인과 우즈벡인 등도 곁가지로 상점을 차리고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차이나타운이라기보다는 '유라시아 타운'이었다.
그 시장의 지근거리에 기차역도 자리한다. 헝가리 동쪽으로, 러시아로 아시아로 나아가는 기차들이 출발하는 역이다. 도심을 빠져나가 한 시간 쯤 흐르면 티소(Tisza)강을 지나 흑토가 눈에 든다. 까만 흙을 바탕으로 노랑과 초록, 연두 빛깔 평원이 아름드리 펼쳐진다. 헝가리에서는 푸스타(Puszta) 대평원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유라시아의 초원길, 아시아 스텝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장소이다. 바로 이곳을 통하여 유럽으로 서진했던 이들이 훈족이다. 훈(Hun)족의 나라라고 하여 '헝가리'(Hungary)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서쪽의 훈족은 동편의 흉노(匈奴)족과 한 집안이다. 동유라시아의 흉노가 우랄 산맥에서 기거하며 경작 생활을 하다가 흑해를 지나 헝가리를 통과하여 서유럽까지 이주했던 것이다. 동쪽에서 왔다는 훈족은 유독 말타기에 능하고 활쏘기에 빼어났다. 그들이 서진하고 남진함으로써 게르만족의 인구이동을 촉발시켰고 기어이 '팍스 로마카', 유럽 질서에도 지각변동(Eastern Impact)을 일으켰다.
바로 그 흉노/훈족의 준마가 달렸던 초원길에 고속철이 깔리고 고속도로가 지어지고 있다. 활을 대신하여 금융자본의 실탄이 속속 지급되고 있다. 지나간 역사가, 오래전 세월이 다시금, 새로이 변주되고 있다. 멋진 신세계를 뒤로 하고, 더 멋진 옛 세계가 부활한다. 지난 200년의 격류가 잦아들면서 복류하던 1000년, 2000년의 장구한 대서사가 재귀한다. 헝가리사도, 유럽사도 대반전하고 있다. 그 '동방의 충격'이 비단 헝가리에서 그칠 리 만무하다. 흔히 '서구'(West)의 기원이라고 (착각)하는 그리스에서도 여실했다. 동유럽의 모퉁이에, 발칸반도의 끝자락에, 유럽의 최남단에 그리스가 자리한다. 아테네로 남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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