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집배원의 유서에는 "두렵다. 이 아픈 몸 이끌고 출근하라네. 사람 취급 안 하네."라고 적혀 있었다. 동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한 달 전 우편물 배달을 하다 중앙선을 침범한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차량과 오토바이에 다리가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3주 병가에 2일 연차를 썼지만 몸은 낫지 않았다. 그가 목숨을 끊은 것은 우체국으로부터 내일 복귀할 것인지 전화를 받은 후였다. 출근 종용은 그가 사고로 입원했던 초기부터 계속되었다고 한다. 올해 12월 31일까지 해당 우체국이 무사고 1000일을 달성해야 가산점을 받기 때문이다. 그가 업무 중 교통사고를 당했음에도 산업재해로 처리하지 않고 개인 휴가인 병가와 연차를 써야 했던 이유다(☞관련 기사 : 우체국, 무사고 달성하려…교통사고 환자 병가 처리)
만약 이처럼 산업재해(산재)를 당한 노동자가 몸이 회복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쉴 수 있다면 이런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일을 하다 다치거나 병을 얻은 노동자는 어떤 권리를 가질 수 있을까? 그 권리는 어떠한 제도적 기반 위에서 실행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은 산재보험 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다른 제도들과 그것을 구성하는 행위자들의 상호 작용을 살펴봄으로써 답할 수 있다. 최근 국제학술지 <사회과학과 의학(Social Science & Medicine)>에 실린 콜롬비아의 폰티피시아 자베리아나 대학 에체베리 교수팀의 연구는 신자유주의적 복지 제도 개혁 이후 달라진 산재보험 체계가 산재를 당한 노동자들의 경험에 끼친 영향을 보여줌으로써 앞선 질문에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연구진은 콜롬비아 산재보험 체계와 관련한 주요 법안들을 검토한 후, 2014년 5월부터 2016년 3월까지 관련 기관 종사자 32명, 산재 인정을 받기 위해 싸우고 있는 노동자 22명을 인터뷰했다(☞논문 바로 가기 : Work-related illness, work-related accidents, and lack of social security in Colombia).
콜롬비아의 산재보험제도는 시장 기반 또는 사유화 개혁으로 알려진 1993년의 일반사회보장체계에 속해있다. 이 개혁은 건강보험, 연금, 산재보험을 세 개의 독립된, 하지만 상호연결된 개별 보험으로 분리했다. 노동자들이 다치거나 아프게 되어 수급을 신청할 경우, 세 개의 영리 부문, 즉 건강보험회사, 연기금 행정회사(민간 시장에서 적립식 개인연금계좌 운영), 산재보험회사(공공-민간 파트너십을 맺은 1개의 산재보험사를 제외하면 모두 민간업체)가 각자의 이익을 두고 각축을 벌이게 된다. 논문에 소개된 한 사례를 살펴보자.
21년차 광부 A는 산재보험사가 산재보험금 지급을 거부한 6개의 질병을 앓고 있다. 그는 2002년 난청을 진단받으며 처음 산재보험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그가 일터에서 자주 사용하던 압축공기권총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난청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어, 2005년 건강보험사는 이를 업무상 질환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2006년 산재보험사는 업무와 관련이 없는 "일반 질환(common illness)"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A는 이의를 제기하며 지역질병판정위원회에 청원을 넣었다. 이는 보험회사와 노동자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고 중재자 역할을 하는 기관이다. 지역 수준의 지역질판위와 국가수준의 중앙질판위가 존재하는데 둘 다 사설기관이다.
산재 인정은 다른 사회보장 급여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콜롬비아에서는 업무상 질환/사고의 경우,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퇴직금을 비롯하여 더 나은 조건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일터로 돌아간 경우에도 더 길게 병가를 쓸 수 있느냐, 직무 재배치를 받을 수 있느냐의 여부와도 직결된다. 이렇듯 보험금 지급을 서로 떠미는 건강보험사와 산재보험사 사이에서 조정을 맡게 된 지역질판위는 산재보험사의 편을 들어 A 사례를 중앙질판위에서 재검토하도록 넘겼다. 수개월 후 중앙질판위 역시 산재보험사의 편을 들어 A의 난청을 "일반 질환"으로 결론 내렸다. A는 사법부가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산재보험사에 대해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결국 패소함으로써 산재보험사가 쓴 소송비용까지 물어줘야 했다. 이때가 2014년이었다. 2002년에 발병한 난청에 대해 2014년 최종 판결이 나기까지, 그동안 광부 A에게는 진폐증, 요통, 어깨 회전근개 손상, 손목 터널 증후군 등 또 다른 직업성 건강 문제가 계속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질병들 역시 건강보험사와 산재보험사의 평가 불일치, 지역과 중앙질판위의 '기울어진 중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폐증의 경우, 지난한 과정 끝에 2012년 12월, 중앙질판위로부터 소득 능력 상실률 26.2%라는 평가와 함께 직업성 질환임을 인정받았다. 소득능력 상실 비율이란 업무상 사고를 당하거나 질병을 얻은 노동자가 그로 인해 상실한 소득 능력을 정량화하는 개념이다. 콜롬비아에서는 상실률이 50%를 넘어야 장애 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문제는 이 50% 요건을 충족시키는 노동자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업무상 장애일 경우에는 산재보험사를 통해 연금을 받고, 업무와 관련이 없는 장애의 경우는 연기금회사를 통해 연금을 지급받게 된다. 즉 업무상 사고/질환의 보상 여부를 두고 건강보험사와 산재보험사가 미루기를 했다면, 이제 장애연금을 두고 연기금회사와 산재보험사가 다투는 것이다.
다시 광부 A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다행히 직업성 진폐증을 인정받았지만, 이미 그는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집은 압류되었고, 자녀들 교육은 물론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는 왜 사람들이 마지막 선택으로 자살을 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5년 동안 우울증 치료를 받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어김없이 건강보험사와 산재보험사의 떠넘기기가 계속되었다. 중앙질판위 중재 끝에 이는 업무상 질환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산재보험사가 A에게 퇴직금을 지급하게 되었는데, 산정된 퇴직금은 진폐증, 손목터널증후군, 어깨근육파열 3개만을 포함하는 미화 3만 달러, 약 3400만 원이었다. A는 그동안 그가 얻은 직업병 전체에 대한 소득능력상실율을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자신의 모든 질병을 합하면 장애연금을 받을 수 있는 50%를 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역질판위는 오직 진폐증과 우울증만 포함하여 29.75%로 통보했다. 이번에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연기금회사에 장애연금을 신청했더니 소득능력상실률이 50%를 훌쩍 뛰어 넘는 80.14%라고 평가했다. 그럼에도 A는 연기금회사를 통해 장애연금을 받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최근에 진단받은 질병인 우울증이 이미 직업성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A에게는 더 이상 산재보험사에 연금신청을 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연구팀이 A를 인터뷰하던 때는 A가 난청으로 처음 산재를 신청한 후 149개월이 지난 후였다.
2016년 3월 기준, 콜롬비아에서 산재 신청 후 지급에까지 걸리는 기간은 최종 판결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업무상 사고 58.9개월, 업무상 질환 59.7개월이었다. 논문은 산재보험사가 가장 큰 노력을 쏟는 일은 노동과정에서 발생한 건강 문제에 대해 업무와 관련이 없는 "일반 질환 및 사고(common illness/accident)"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게 건강보험사와 연기금회사가 노동자들의 건강보험 비용, 병가, 연금을 충당하게 만듦으로써 산재보험사는 이익을 얻고 있었다.
연구진은 노동자들이 산재 후 일터로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해고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직접 해고 이외에도 고용계약이 갱신되지 않거나, 업무 재배치 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해 "자발적인" 사직을 하게 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러한 결과는 노동자가 다른 일자리를 찾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퇴직금과 연금 등 다른 혜택을 받는 것에도 불리해질 뿐 아니라 결국 빈곤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회사와 산재보험사에는 '쓸모없는 노동자'에 대한 지출과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렇게 복잡한 산재보험에 대한 연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자의 건강, 업무상 사고와 질병에 대한 보장 체계는 업무기인성을 둘러싼 기술적 이슈라기보다 사회보장과 노동권을 아우르는 구조적 맥락과 관계 있다는 것이다.
이 연구는 신자유주의 복지 개혁 이후 국가가 제공하던 복지가 민간 보험회사들의 몫으로 넘어간 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업무상 질병판정위원회만이 비록 민간기구이지만 중재자의 역할을 할 뿐, 국가는 다치고 아픈 노동자들의 세계에 사실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논문에서 묘사한 모습을 보면, 지역과 중앙 질판위 사무실 주위에는 안내 책자를 든 변호사들이 몰려 있고, 자신들의 업무상 사고와 질병을 인정받고 싶은 노동자 대부분은 그들을 고용한다.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승소할 확률이 낮고 빚더미에 올라앉을지도 모르지만 그나마 변호사를 고용해 산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즉 산재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노동자가 전체 노동인구의 32.5%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콜롬비아의 상황이 극단적 사례처럼 보이지만, 논문에 나오는 내용들 중 민간보험 부분만 제외하고는 한국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체국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1980년대 미국의 우체국에서 생긴 일련의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기록을 담은 <나는 사표대신 총을 들었다>의 원제는 "going postal"이다. 당시 우체국에서 '직장 내 분노 살인'이 이어지면서 '격분하다'라는 뜻의 'go postal'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신조어의 배경에는 <1970년 우체국 재조직법>이 있었다.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우체국을 민영화함으로써 집배원의 업무량을 살인적으로 늘리고 언제 잘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노동자들을 몰아넣을 때, 즉 '노동 생산성'을 증가시키고자 했을 때 결국 노동자들은 동료와 자신에게 총구를 들이댔던 것이다. 지난 5일 고인이 된 노동자를 포함해 올해만 해도 한국에서 13명의 집배원이 업무상 사고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최근 5년간은 76명의 집배원이 목숨을 잃었다(☞관련 기사: 또 집배원 사망 "아픈 몸 이끌고 출근하라네" 유서). 고용불안과 노동생산성에 대한 압박, 산재보험 제도의 무책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러한 죽음의 행렬을 멈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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