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의 질문은 곧 '촛불혁명'이 '미완의 혁명'이 안 되는 방도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작년 10월 하순부터 올해 3월 초까지 이어진 촛불항쟁에서 남북관계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 못지않게 '평화로운 사회'가 촛불시민들의 간절한 소망이었음은 분명하다. 더구나 항쟁이 한반도의 남북대결을 빌미로 나랏일을 농단하고 민생을 짓밟아온 수구세력과의 전면대결이었다는 점에서, 저들의 '종북' 몰이와 안보장사를 무력화할 한반도의 평화 만들기는 촛불시민의 본질적인 과제로 이미 대두했던 셈이다.
촛불혁명과 한반도체제
분단체제의 존재는 촛불항쟁을 '혁명'으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에서도 결정적이다. 항쟁의 규모나 지속성이 유례없는 수준이었고 그럼에도 철저히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일차적 목표인 박근혜 퇴진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혁명(내지 명예혁명)의 이름에 값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반면에 모든 것이 기존의 헌법과 법률 체계에 따라 이루어진 점이 87년체제의 개혁이요 소생일지언정 혁명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사실 분단한국의 특수한 현실을 빼면 후자가 훨씬 냉정한 사회과학적 진단이다. 다만 분단체제에서 '안보'를 위해 민주공화국의 헌법을 무시해도 된다는 일종의 '이면헌법(裏面憲法)'이 작동해온 상황에서, "헌법이 안 지켜지던 나라를 헌법이 지켜지는 나라로 바꾸는 한층 본질적인 혁명"(졸고 '새해에도 가만있지 맙시다', <창비주간논평> 2016.12.28)을 수행한 것이 촛불항쟁이었다.
최근에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으로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촛불혁명의 진로와 남북관계가 얼마나 밀접히 연관되는지가 한결 뚜렷해졌다. 이른바 안보위기를 맞아 적폐세력들은 새로 기세등등해지고 사회의 전반적인 담론수준이 다시 저열해져서, "분단체제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적의 각종 허구적 주장이 불변의 진리처럼 반복해서 주장되고 있다."(이남주 '진짜 문제가 된 북한의 핵과 한국의 선택', <창비주간논평> 2017.9.6)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도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그에 대한 방어능력을 최대한 높여나가지 않을 수 없다"는 구실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사드 배치를 강행함으로써 박근혜정부의 행태를 연상시키고 있다.
촛불혁명의 세 단계
촛불항쟁은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내면서 '실패한 혁명'이 되지 않았고, 촛불혁명의 제1기가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시민들의 비폭력·평화 전략이 주효했던 것이다. 뒤이어 벌어진 대선국면을 제2기로 본다면, 촛불의 계승을 약속한 정권이 탄생함으로써 2기 역시 성공하여 '미완의 혁명'으로 끝날 운명을 피한 셈이다. 그런데 혁명이라는 관점에서는 기성체제의 헌법과 제도에 따른 선거의 실시가 얼마나 위태로운 국면이었는지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 점은 1968년 프랑스의 5월혁명과 비교해보면 분명해진다. 프랑스의 5월은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동반한 훨씬 심각한 소요사태였으며 그 문화적 파급효과가 전세계에 두고두고 미쳤다. 그러나 드골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발표하면서 사태는 급속히 가라앉았고 총선에서는 드골파 정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2017년 5월 한국에서 그런 반전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대선이 표면적으로는 국회와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른 것이지만 내용상으로는 국민의 직접행동이 강요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드골의 의회해산이나 1987년 한국의 6·29선언처럼 집권층의 주도적 결단이라는 모양새를 허락하지 않았고, 여당이 겉으로나마 항쟁의 계승을 내세우는 상습적인 국민기만 전략을 구사할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선거국면에 들어서자 촛불항쟁의 성과가 적잖이 훼손되었다. 공식 선거운동의 개시와 더불어 일반시민들의 정치적 참여는 터무니없이 억압되었고, 유력후보들 대다수가 '중도 마케팅'에 골몰했으며, 대선후보 토론회 내용도 후진적인 안보논쟁에 집중되는 등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탄핵 직후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졌던 자유한국당(전 새누리당)은 대선에서 25%에 가깝게 득표했고 원내 107석의 거대야당으로 떵떵거리며 되살아났다.
그런 댓가를 치르면서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것이 문재인정부다.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 중에서 유일하게 촛불계승을 확약한 후보가 낙승했다는 점에서 제2기 역시 원만한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논자에 따라서는 1, 2기를 합쳐 제1단계로 보고 새 정부 출범 이후를 제2단계로 보는 관점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촛불항쟁의 혁명적 성격과 대선국면에서 촛불혁명에 닥쳤던 위험을 정확히 인식한 채 정권교체 이후의 시기에 접근하는 일일 것이다.
'촛불정부': 통로냐 수임대리인이냐
아무튼 그렇게 탄생한 정부가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 더구나 정부 스스로 촛불혁명이 아직 진행 중이며 자신들이 혁명의 완결자가 아닌 '통로'라고 주장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이에 관해 필자의 페이스북 2017년 6월 2일의 발언 "촛불혁명의 통로" 참조). 실제로 새 정부 첫 3개월 내지 100일의 실적을 보면, 비록 실수도 있었지만 대통령의 탈권위적 행보를 비롯하여 켜켜이 쌓인 적폐를 청산하고 새 시대를 열어가려는 의지가 돋보였다. 쏟아져나온 지난 시대 범죄행위들에 대한 사실확인만으로도 한국의 민주주의는 의미있는 전진을 이루었다. 통로 중에서도 대통령 권력이라는 간선도로를 확보한 것이 촛불혁명으로서 얼마나 큰 성취였는지 실감하게 된다.
그렇더라도 대통령의 막대한 권력으로도 온전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촛불혁명이다. 정부가 '통로' 구실을 제대로 해내려면 새로운 진입로와 별개의 도로를 계속 만들어가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예컨대 무작위로 추출된 시민들의 '숙의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에 원자력발전소 신고리 5, 6호기의 건설 중단 여부를 맡기는 방식을 선거제도 개혁이라든가 증세 문제, 남북관계 등 다른 분야에도(물론 사안마다 적절하게 변주해가며) 확대 적용할 법하다. 특히 헌법을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촛불혁명이 87년체제와는 다른 역사를 제도로 안착시키느냐 아니면 87년 헌법의 땜질 정도로 끝나느냐가 판가름날 터인데, 현재 국회가 일방적으로 정한 공론화 과정이나 정부에 의한 추가적 여론수렴을 넘어서는 시민참여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나아가 개정되는 헌법 자체가 '숙의 여론조사'식 시민참여의 일상화를 보장하는 조항을 반드시 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현재 촛불혁명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또 하나의 중요 국가기관인 의회에 대한 시민들의 견제력을 키우는 길이기도 하다.
이럴 때 으레 나오는 반론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국정과제들을 어떻게 시민 아무한테나 맡기느냐는 것이다. 정부와 국회는 무얼 하라고 두었냐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하지만 시민 직접참여의 확대가 대의기관을 대체하는 일이 아니려니와, 무작위로 뽑힌 뒤 일정한 학습과 숙의 과정을 거친—그것도 촛불혁명을 해낸 나라의—일반시민들이 정치적 출세를 우선목표로 삼고 정치자금 조달과 인맥관리에 몰두하는 정치인들보다 저급한 결정을 내릴 확률은 극히 낮다고 봐야 한다.
'촛불정부'도 그것이 촛불혁명의 통로가 아니라 전권을 위임받은 대리인으로 행세하는 순간 촛불 이전의 정부들과 대동소이해질 위험이 있다. 특히 시민들과의 정보공유가 제한될 뿐 아니라 미국의 압력과 북한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한국정부의 운신 폭이 원천적으로 제한되는 남북관계에서는 대리자 역할의 유혹이 더욱 커진다. 설혹 대통령 자신은 통로가 되겠다는 충정을 버리지 않았더라도, 대통령이 수임대리인(受任代理人)이 될수록 자신들의 지위가 굳어지고 달콤해지는 주변 인사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나기 십상이다.
그런데 남북관계나 외교 문제에서 문재인정부가 촛불혁명의 일개 통로라는 자기인식을 저버리고 촛불시민의 혁명적인 요구를 운반하고 실행하지 못할 때, 국내의 적폐청산과 개혁의 동력이 급격히 떨어지게 마련인 것이 분단체제의 속성이다. 특히 남북문제에서는 정부가 대응을 잘못해서 남북의 갈등이 격화되더라도 국민여론은 그 책임을 일단 북에 돌리는 경향이 있다. 분단체제의 상대방 탓하기 관성이 작동하기 때문인데, 집권자에게 독배를 겸한 단술이 되는 묘한 유혹이 되기 쉽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 모두 남북관계를 악화시키면서 한때 맛본 재미가 그러했으며 종내 그들의 전반적 국정실패와 국민지지 상실의 한 원인이 되었다.
촛불혁명 제3기의 핵심과제
결국 한반도의 평화 만들기야말로 이면헌법을 폐기하고 적폐를 청산하며 참다운 민주공화국을 만들려는 촛불혁명의 핵심과제임이 드러난다. 물론 "북에서 미사일을 쏘아대고 핵실험을 거듭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반론은 벌써부터 요란하다. 여기에 "이런 때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당신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냐"는 공격이 곧잘 따라오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지에 대한 토론이 시민사회의 여기저기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예컨대 '문재인정부의 외교안보정책,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제목으로 시민평화포럼과 참여연대가 공동으로 주최한 원탁토론이 열리기도 했고(자료집 <문재인정부의 외교안보정책, 이대로는 안 된다>, 2017.9.5. 참조), '북-미 수교'라는 근본 카드가 아직 남아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한국의 주도적·창의적 외교를 주문하는 제언도 나온 바 있다(이종석 칼럼 '북-미 수교카드가 남아 있다, <한겨레> 2017.9.11).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지가 막막한 때일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안 하는 일이다. 특히 낡은 언어를 극구 피해갈 줄 알아야 한다. '독자적 핵무장'이니 '전술핵 재배치'뿐 아니라 '북을 대화로 끌어내는 더욱 강력한 제재와 압박'도 낡아빠진 언어이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통일만이 살길이다'는 익숙한 옛 노래를 다시 불러도 곤란하다. 그렇다고 '이제 통일은 잊어버리고 남북이 이웃나라로 평화롭게 살자'는 주장도 새로울 것 없는 공리공론이다. 이 땅은 무작정 통일을 부르짖는다고 통일이 되고 평화가 오는 곳도 아니려니와, 점진적·단계적 과정으로서의 통일마저 외면한 채 두 나라의 항구적 평화공존을 주장한다고 평화가 달성되는 지역도 아니기 때문이다.
점진적·단계적 통일과정에 대한 구체적 방향 제시가 없었다는 것은 촛불혁명 제1기의 한계였다. 대선국면에서 그 모색이 이루어졌다면 더 바랄 나위 없지만, 1기보다 여러모로 더 후진적이었던 것이 2기요 그것이 분단한국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문재인정부 출범으로 시작된 제3기가 얼마 안 지나서 이른바 북핵위기가 터진 것은 언젠가 넘어야 할 고비에 부닥친 것일 뿐인데, 정부의 대응자세에 따라 촛불혁명 완수의 호기가 될 수도 있다. 이때 명심할 것은 촛불정부는 국민과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고 "우리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를 임의로 선택할 재량권을 가진 수임대리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려운 고비를 만날수록 자의적 판단과 관성적 언동을 자제한 채 촛불혁명의 통로다운 겸허한 자세로 차분히 정신을 가다듬을 때 당연하고도 지혜로운 길이 열리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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