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학자 찰스 W. 밀즈가 <사회학적 상상력>에서 빈곤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불평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불평등은 사회가 만든 문제이다. 경쟁에서 실패하거나 낙오하는 것은 순수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제도에 따라 개인의 출발선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의 공정한 경쟁의 규칙이 중요하다. 대표적으로 공교육은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는 중요한 제도이다. 지난 200년 동안 생겨난 노예제 금지, 소년노동의 금지, 여성 참정권, 인종 차별 금지 등 불공정, 부정의를 고칠 수 있는 사회 제도가 필요하다.
규제라면 몸서리를 치는 사람들은 8시간 노동제 시행, 노동조합의 단결권, 단체교섭, 파업권의 보장, 최저임금제, 남녀고용평등법 입법이 왜 필요하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제도가 없었다면 사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제도는 인간이 만들지만 한 기업의 선의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 오늘날 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출산휴가 연장은 정부 차원의 규제가 필요하다. 결국 제도는 자연적 결과가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 합의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사회제도를 창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통합적 제도와 분열적 제도
1931년 영국의 경제사학자 리처드 H. 토니는 <평등>에서 "사회제도는 (...) 인간을 분열시키는 차이보다 인간을 통합하는 공통의 인간성을 가능한 강조하고 강화하도록 (...) 설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지만, 힘 있고 부유한 사람들이 제멋대로 제도를 만들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의 제도를 만드는 과정에는 정부뿐 아니라 기업, 노동조합, 시민사회조직 등 다양한 사회적 동반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중요하다. 특히 정당과 유권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 나라가 어떤 제도를 갖는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국회와 선거이기 때문이다.
분열적 사회제도는 경쟁을 찬양하고 개인의 능력주의를 강조함으로써 이기주의를 부추기고 모든 사람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고 사회를 해체한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른 경제 자유화, 공기업의 사유화, 부자 감세, 복지 축소의 제도화는 사회를 분열시킨다. 분열적 제도는 원래부터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교육, 의료, 환경, 안전 분야에도 시장 논리를 강요한다. 결국 모든 사회 분야에서 기업의 이익을 가장 중시하게 된다. 한국의 100여 개의 특수 목적고와 200여 개의 자율형 사립고로 대표되는 교육의 사교육화, 실손 보험의 도입 등 의료 민영화, 대기업 수익사업으로 수단으로 전락한 4대강 개발, 세월호 참사와 구의역 사고에서 드러난 안전 관리 외주화가 대표적인 분열적 사회제도이다.
반면에 통합적 사회제도는 개인의 협력과 이타주의를 촉진하고 사회를 통합시킨다. 보편적 사회보험, 국민건강보험, 보편적 교육과 평생교육의 제도화는 사회가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사회적 결속을 강화시킨다. 복지국가에서 실행하는 보편적 시민권에 따른 사회보장, 능력에 따른 조세 부담의 원칙은 사회 보호 장치를 강화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한다. 당연하게도 분열적 사회제도는 불평등을 확대하는 반면 통합적 사회제도는 불평등을 축소한다.
어떤 제도를 만드는가에 따라 사회의 불평등이 달라진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자연적 질서나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삶을 시장에 맡기는 결정은 사회의 분열을 촉진한다. 따라서 사회를 유지하고 통합시키기 위해서 인간은 개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통합적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소득 분배와 조세를 통한 재분배
불평등을 완화하는 통합적 제도의 실행을 위해서 노동시장의 소득 분배와 조세를 통한 재분배가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소득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 저소득층의 임금 인상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최저임금 인상과 생활임금의 확대가 필요하다. 한편 누진적 조세를 강화하고 조세 정의를 실현하여 사회적 약자를 돕는 사회안전망과 사회의 통합을 촉진하는 사회보장 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재분배 제도가 없다면 사회 통합을 이루기 어렵다.
그러나 20세기 소련 공산주의 체제의 실패에서 기계적 평등주의의 한계를 목격했다. 무조건적인 재분배로 경제의 안정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기는 어렵다. 그래서 불평등을 사후에 완화하는 정책보다 사전에 예방하는 정책이 중요하다. 영국 복지국가의 설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런던정경대학(LSE) 사회학자 리처드 티트머스는 보편주의의 토대를 전제로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지원을 추가하는 '긍정적 차별'을 강조했다. 노동 능력을 갖지 못한 아동, 노인,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게 근로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긍정적 차별'로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지원해야 한다.
20세기 후반 영미권의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평가를 받는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평등을 절대적, 기계적 평등이 아니라 '공정성'으로 파악했다. 그는 공정한 절차에 의해 합의된 규범을 '정의'의 기본적 토대라고 보았다. 공정한 정의를 위한 보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균등한 시민적 자유권이 필요하다(자유의 원칙). 또한 모든 사람이 균등한 직위와 직책을 가질 기회의 평등이 필요한 동시에, 사회의 최대 취약계층에게 최대의 이익을 제공해야 한다(최소 극대화의 원칙). 최대 취약계층에 최대한 기회를 제공하는 경우에만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다(차이의 원칙).
이러한 롤스의 주장은 티트머스의 긍정적 차별의 원칙과 유사하다. 모든 사람이 능력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원칙과 사회의 전체적 효용을 중시한 공리주의 철학의 견해와 사뭇 다르다. 만약 최소 극대화의 원칙이 지켜지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분배를 제공하는 것만 못할 수 있다. 롤스는 공정한 정의를 통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로 이루어진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를 오랜 기간 유지하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극적 자유의 중요성
노벨상 수상자인 인도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아홉 살이 되었을 때 1943년 인도 벵갈 지역의 대기근으로 약 3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한 참상을 목격하였다. 훗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센은 농업 수확량의 부족이 아니라 분배의 실패가 벵갈의 기아를 초래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 영국이 통치하던 벵갈 지역에는 모든 사람을 먹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식량 생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많은 농촌 노동자들이 실직하여 식량을 구매할 수 없어 가족까지 굶주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원의 풍족은 빈곤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만 보여줄 뿐이다. 실제 사람들의 빈곤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권리이다. 이를 센은 '인타이틀먼트'(entitlement) 라고 불렀으며, 개인 또는 집단이 가지는 일정한 권리 또는 자격으로 정의했다. 결국 빈곤, 기근, 아사는 자연적 재해가 아니라 공동체의 성원이 민주적 권리를 갖지 못한 결과이다. 일할 수 있는 권리와 노동시장에 참여할 권리를 박탈당한다면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수 없다.
센은 낮은 소득이 빈곤의 한 원인이고, 사회의 불평등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연령, 성별, 장애, 거주 지역' 등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조건도 빈곤과 불평등을 만들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센은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모든 개인이 각자의 조건 속에서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적극적 자유'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소극적 자유만으로 빈곤과 불평등을 줄이기에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극적 자유를 중시하는 관점은 롤스의 주장과 차이가 있다.
센은 빈곤층을 지원하기 위해 현금 급여만으로 충분하지 않으며 일자리를 포함하여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capability)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센의 주장은 불평등의 경제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소득뿐 아니라 교육과 기대수명을 조사하는 유엔의 '인간개발지수'(Human Development Index)에 영향을 미쳤다. 소득은 다양한 불평등 가운데 한 가지 일뿐이며, 소득 격차는 특정한 환경과 그에 따른 기회의 차이가 만든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여
경제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애덤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한 대로 "자비심이 없어도 사회가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없다면 사회를 붕괴한다". 분배의 정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노동시장뿐 아니라 교육, 보건, 사회보장의 영역에서 분열적 제도가 확대되고 사회의 분열이 심화될 것이다. 불평등이 지나치게 커진 사회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불평등은 과잉경쟁, 상품 물신화, 인간 소외, 정치 갈등을 야기하고, 개인의 삶의 자존감과 잠재력을 파괴할 수 있다. 불평등은 심리적, 정치적 문제인 동시에 도덕적 문제이다.
이 글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김윤태의 <불평등이 문제다: 대한민국 99%의 내일을 위한 전략>(휴머니스트, 2017년 9월 출간 예정)을 보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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