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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마을책방, 자전거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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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마을책방, 자전거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작은것이 아름답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책방이 있는 마을을 꿈꾼다

피아니스트와 아나운서 사이에 앉았다. 방송국 스튜디오가 아니고 콘서트홀 무대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책방이었다. 그것도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은 독립 서점. 지난 6월 말, 해가 졌는데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저녁나절, 나는 일급 피아노 연주자 김석란 교수와 KBS <클래식 FM> 아나운서 이미선 씨 사이에 앉아 있었다. 에릭 사티와 쇼팽의 피아노 연주 사이사이 나는 내 시를 읽으며 이미선 씨 질문에 답했다.

시와 음악은 시와 미술 못지않게 혈연관계다. 시낭송회와 시화전을 떠올릴 수 있다면, 시와 두 장르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시를 낭송할 때 배경음악이 없는 걸 선호한다. 시화전도 그림이 없는 '시전(詩展)'을 고집하는 편이다. 음악이나 그림이 시를 도와줄 때보다 압도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음악과 그림이 승하면 시는 위축된다. 시는 활자 혹은 음성으로 표현되고 전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왜 '시와 음악이 흐르는 밤' 행사에 참여했는가. 다름 아닌 장소 때문이었다. 평소 안면이 있는 이미선 아나운서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힘들었지만, 행사가 책방에서 열린다는 사실이 마음을 움직였다. 시낭송과 피아노 연주가 만난 장소는 '최인아책방'이었다. 지난해 하반기에 문을 열었다. 책방이 들어선 장소도 장소지만, 책방 주인의 이력도 남달라 언론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제일기획 부사장을 역임한 내로라하는 카피라이터가 은퇴한 뒤 강남에 책방을 냈으니, 뉴스로 내보낼 만한 가치가 작지 않았던 것이다.

지난 연말 신문 기사를 접하고 조만간 들러봐야겠다고 다짐한 차였는데, 마침 이미선 아나운서가 시낭송회를 기획했으니 함께해달라고 연락해왔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 7번 출구에서 선릉 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된다고 해서 금방 찾을 줄 알았는데, 잠깐 헤매고 말았다. 책방이 1층에 있을 것이란 선입견 탓에 고개를 들지 않았던 것이다. 길가에 '최인아책방'이라고 쓴 입간판이 없었다면 몇 바퀴 더 돌 뻔 했다. 입구는 골목 안쪽에 있었고, 책방은 4층까지 올라가야 했다.

'주제'가 있는 서가, 생각이 있는 책방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책이 아니었다. 높은 책장과 천장이었다. 천장이 높아 공간이 더 넓고 쾌적해 보였다. 입구로 들어가서 왼쪽에 피아노가 있었고 오른쪽은 다락처럼 꾸며져 있었다. 그 다락과 같은 공간 아래로는 소모임이 가능한 작은 방이 있었다. 최인아책방은 독립서점이자 마을책방이다. 인터넷이 일상화하면서 독서 인구가 줄어들고, 그에 따라 출판 경기가 위축되고 동시에 중소 서점들이 줄줄이 문을 닫는 이때, 개성을 앞세운 북 카페와 작은 서점이 속속 선을 보인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가뭄 끝에 단비 같았다.

최인아책방의 '차별화 전략'은 강남이라는 장소성에 있다기보다는 책방의 콘셉트에 있다. '땅값'이 하늘을 찌르는 강남 지역에 서점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팔아 월세를 감당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최인아책방이 접근성이 좋은 1층이나 2층이 아니고, '까마득하게 높은' 4층에 자리 잡은 이유 가운데 하나도 비싼 임대료 탓일 것이다. 하지만 책방주인의 '관심사'가 책방 위치가 갖는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이 책방의 중심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지인들이 추천한 책이 책방의 정체성을 말해주고 있다.

7000여 권의 책 가운데 1600여 권이 광고계 선후배, 동료들이 추천한 책이다. '고민이 많아지는 마흔 살' '생각의 힘을 키워주는 책' 같은 12개 주제로 나뉘어 배열돼 있다. 책 하나하나에 추천 이유를 적은 북 카드가 꽂혀 있다. 추천서가 말고도 책방의 성격을 강화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달마다 두어 차례 '생각'과 '모색'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다채롭게 이어가는 것이다. '주제가 있는 콘서트'도 열린다. 최인아 씨는 생각의 힘을 강조한다. 책방 한쪽에는 '아는 것이 힘이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생각하는 것이 힘이 되는 시대'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기꺼이 동의한다.

청중 70여 명과 함께한 '시와 음악'의 밤은 무난하게 끝났다. 국내 최고 피아니스트와 국내 최고 아나운서 사이에서 나는 어눌하게 읽고, 어눌하게 답했다.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읽는 전문 낭송가나 시에 대해 주석을 다는 비평가가 아니지 않은가' 하고 혼잣말을 하며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늦은 밤, 한강을 건너는 버스 안에서 아직 세상에 없는 마을책방을 상상하느라 방금 전 시낭송회에 대한 자괴감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었다.

▲ 내가 상상하는 마을책방은 마을 주민들을 위한 장소다. 주민센터나 마을회관, 시장 한 모퉁이, 학교 운동장, 기차역사, 폐교, 천막, 컨테이너, 낡은 버스 등 둘러보면 마을책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작은것이아름답다(김기돈)

생활체육과 함께하는 '생활 독서'

지난 대선 때 문재인 후보가 생활 체육을 뿌리내리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국민 누구나 걸어서 10분 이내에 체육시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역사회에 '동네형 공공 스포츠클럽'을 만들고 학교에서는 예체능 교육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다. 걸어서 10분 이내에 생활체육시설이 있고, 대학 입시에 목을 매는 학생들이 마음껏 체육 활동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생활 체육, 체육 복지. 두 손 들어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몸과 함께 마음도 건강해져야 한다. 체력과 함께 정신건강도 좋아져야 한다. 체력만이 국력이 아니다. 이제는 지력(知力), 즉 생각하는 능력이 사회의 에너지다. 생활 체육에 버금가는 '생활 독서'가 지역사회 곳곳에 뿌리내려야 한다. 국민 누구나 걸어서 10분 이내에 책을 만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야 한다. 생활 체육과 함께하는 생활 독서. 10분만 걸어가면 접할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마을책방이다.

복합문화공간이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마다 공연장, 전시장, 도서관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막대한 예산이 뒷받침돼야 한다. 뜻을 모을 수 있다면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문화공간이 마을책방이다. 책이 많지 않아도 괜찮다. 책방 운영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책을 연결고리로 마을 주민들이 모여야 한다.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성격의 책방은 사적 장소가 아니고 공적 영역이다. 마을책방은 자영업자를 위한 매장이 아니라 주민 모두를 위한 열린 장소여야 한다.

광장이나 공원, 장터처럼 주민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장소를 '1차 장소'라고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1차 장소에서 자라난다. 한 지역, 한 공동체의 민주주의는 1차 장소의 양과 질의 수준에 달려 있다. 1차 장소에서 시민의식이 성숙한다. 내가 상상하는 마을책방은 마을 주민들을 위한 1차 장소다. 주민센터나 마을회관, 시장 한 모퉁이, 학교 운동장, 기차역사, 폐교, 천막, 컨테이너, 낡은 버스 등 둘러보면 마을책방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장소는 얼마든지 있다.

지하철 역사도 책방으로 활용할 수 있다. 얼마 전 인천의 한 지하철역 구내를 지나다가 시민들이 탁구를 즐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탁구대를 놓을 정도 공간이라면, 탁구대를 설치하자고 합의할 정도의 주민들이라면 마을책방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주민 누구나 모일 수 있는 1차 장소로서의 마을책방이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독서토론이다. 한 권의 책을 읽고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 글쓰기 교실도 가능하다. 시 창작이나 에세이 쓰기도 좋고, 구술 생애사도 큰 의미를 갖는다.

"시, 마을책방, 자전거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특히 10~20대 청년이 70~80대 어르신의 생애를 받아 적어 자서전을 엮어드리는 '격대(隔代) 글쓰기'는 최소 일거양득 효과를 가져온다. 어르신은 자기 생애를 풀어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생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헛된 삶, 하찮은 삶을 살지 않았다는 자기 확인이 어르신으로 하여금 긍지를 갖도록 한다. 어르신의 삶을 경청하는 청년들은 한국 현대사를 육성으로 접하면서 인간과 시대를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 세대와 세대 사이 단절도 자연스럽게 극복할 수 있다. '격대 간 대화'가 조부모, 부모, 자녀 사이 3대를 연결시켜줄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기능을 가진 마을책방을 활성화하기 위해 선행돼야 할 조건이 있다. 책방 운영자, 독서토론과 글쓰기 길잡이를 길러내야 한다.

새 정부는 분명하게 말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 마을책방이나 독서토론과 글쓰기를 지원하면서 '권장 도서 목록'을 배포하거나 특정 부류의 인사들을 배제한다면 마을책방은 결코 뿌리내릴 수 없다. 또 하나 경계해야 할 일이 있다. 사설 기관에서 발행하는 독서와 글쓰기 관련 '자격증'이다. 수백 종에 달하는 관련 자격증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권위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신뢰할만한 길잡이 촉진자를 배출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반 일리치는 시, 도서관, 자전거가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일리치의 권고를 이렇게 이해한다. 시가 인류의 미래를 열어나가는 이유는, 시가 지성과 감성을 영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주기 때문이다. 시의 본질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유구한 세계관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도서관은 책의 숲, 인간 정신의 바다다. '책을 만든 사람보다 책이 만든 사람이 더 많다'는 경구는 언제나 진실이다. 자전거는 자동차의 폐해, 즉 생태·환경 오염과 속도 지상주의, 그리고 운전자의 공격성을 극복하고 자전거 타는 사람의 건강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이동수단이다.

나는 시와 마을책방, 자전거가 인류의 미래를 열어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고 5분 안에 책방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라면, 그 마을 주민들은 시와 함께 살아가는 '맑고 향기로운 사람'들일 것이다. 행복 도시를 정의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걷기 좋은 도시,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가 행복한 도시다. 행복한 마을의 요건도 명쾌하다. 걸어서 10분 안에 갈 수 있는 책방이 있는 마을이다.

▲ 나는 시와 마을책방, 자전거가 인류의 미래를 열어나갈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고 5분 안에 책방을 만날 수 있는 마을이라면, 그 마을 주민들은 시와 함께 살아가는 '맑고 향기로운 사람'들일 것이다. ⓒ작은것이아름답다(김기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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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작은것이 아름답다>는 19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 생태 환경 문화 월간지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한 이야기와 정보를 전합니다. 생태 감성을 깨우는 녹색 생활 문화 운동과 지구의 원시림을 지키는 재생 종이 운동을 일굽니다. 달마다 '작아의 날'을 정해 즐거운 변화를 만드는 환경 운동을 펼칩니다. 자연의 흐름을 담은 우리말 달이름과 우리말을 살려 쓰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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