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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저는 국정원에서 간첩으로 몰렸습니다"

국정원 합신센터 허위 자백으로 3년 복역한 탈북자 허우식 씨 이야기③

"피고인은 보위사 공작원으로서 보위사 대동강 초소장 김ㅇㅇ로부터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으로 잠입하였다는 것으로,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위협한 점, 추후 보위사의 지령을 받고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중대하게 위협할 만한 행동을 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

다만 피고인이 중앙합동신문센터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자 자신의 범행을 모두 자백하고 수사에 협조한 점,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고 싶어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해 피고인을 징역 3년 및 자격정지 3년에 각 처한다."

2011년 자유를 찾아온 탈북자 허우식(가명) 씨. 그는 남한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 죄인이 되었다. 국가보안법(특수잠입‧탈출) 위반 혐의, '간첩' 굴레를 뒤집어쓴 것이다.

(☞이전 기사 : ①"이XX 간첩이지?" 따귀가 날아왔고 나는 거짓자백했다, ②'간첩 공장' 그곳에서는 '소설'이 만들어졌다)


태국 이민국 감호소에서 "보위부 초소에 아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게 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었다.

"공소장에 보면 '보위사령부 대동강 초소의 실체'라고 해서, 여기가 공작 활동을 하는 기관이라고 써놨더라고요, 초소는 한국으로 따지면 동네 지구대 같은 건데...."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조사관에게 과거 '빙두(필로폰)' 전력을 밝힌 것도 후회스럽다.

"그걸 말 안 할 걸 그랬어요. 근데 남한 법을 제가 뭘 알았겠어요. 조사관들도 그걸 잘 알았겠죠. 아무것도 모르는 탈북자인데 요리하기 얼마나 쉬웠겠어요. 제대로 이용당한 겁니다."

허 씨는 '탈북 위장 간첩' 사례로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18대 대선을 3개월 앞둔 2012년 가을이었다.

▲2012년 9월 13일 자 <조선일보>. 이 기사에 소개된 '허모 씨'가 허우식(가명) 씨다.

"간첩 누명도 억울한데 독방 감옥서 손발이 묶였어요."

3년간의 복역 생활이 시작됐다. 수감되자마자 독방에 갇혔다. 그리고 족쇄에 손발이 묶였다. 밥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곤 단 한 순간도 움직일 수 없었다. 거의 한 달 동안을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는 상태로 지냈다. 자살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합신센터에 갔을 때 소지품 검사를 했는데 제 가방에서 운동화 끈이랑 작은 면도날이 나왔어요. 운동화 끈은 국정원에서 처음에 신발이랑 같이 준 거예요. 북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다들 없이 지내서 뭘 잘 안 버리거든요. 그래서 그것도 그냥 갖고 있던 겁니다. 면도날은 태국 감호소에 있을 때 방 장롱 안에서 주웠어요. 그때 면도를 하려면 바깥으로 나가야지만 할 수 있었는데 면도하러 밖까지 나가기는 귀찮잖아요. 그때 우연히 방에서 면도날을 주워서, 그걸로 면도를 했죠.

근데 그걸 가지고 남한 수사기관에 걸려서 임무 수행을 못 하면 자살할 용도로 갖고 있던 거라고 해버리더라고요. 간첩 누명 쓴 것도 억울한데 아무것도 없는 감옥 단칸방에서 족쇄에 하루종일 묶여있으니 정말 피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심정이라는 것은 정말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감옥 생활은 지겹고 우울했다.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서울구치소에서 만난 한국 죄수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전향서를 쓰면 복역 기간이 줄어드는 모양이었다. 전향서도 쓰고 반성문도 쓰면서 형이 줄어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계속 어머니랑 형 생각이 났어요. 빨리 나가야지 가족을 데려오니까, 그래야 두 분이 무사할 테니까.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었어요. 오히려 저를 더 매장시키는 일이었죠."

형량을 줄이기 위해 항소를 했다. 간첩이 된 것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다며 재판부의 선처를 바랐지만 기각됐다.

ⓒ연합뉴스

"유가려 거짓 진술, 어쩜 나랑 그렇게 똑같을 수 있나."

상고는 포기했다. 전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거기서는 텔레비전도 보고, 신문도 봤다. 뉴스에 나오는 한국 사회의 모습은 허 씨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그가 지금까지 접한 남한은 그저 무도하고 잔악한 곳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미디어를 보면 남한 사회에는 인권도 있고, 민주주의도 있었다. 국회의원들은 서로 목소리를 높여 싸우고, 국민은 정치인들에게 욕을 하고 투쟁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바깥 사회는 다양한 의견들이 표출되는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제가 정말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죠. '국정원 놈들에게 완전히 속은 거였구나' 하고요."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도 감옥에서 봤다. '오빠 유우성이 간첩'이라던 유가려 씨의 진술은 모두 합신센터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뉴스를 보는데, 가슴이 막 두근두근하더라고요. 국정원이 유가려 씨를 엮는 수법이 어떻게 저렇게 나랑 똑같을 수가 있나. 한국 사람들이 잘 안 믿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간첩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게 말이 되냐고요. 근데 그렇게 진술을 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유우성 사건도 진실이 밝혀졌으니, 자신도 조만간 누명을 벗게 될 것이란 희망이 생겼다. 재심을 청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교도관에게 이러한 의사를 밝히니 법원에서 사람이 왔다. 얘기를 들어 보니, 재심을 신청한다고 다 들어주는 게 아니었다. 증거가 위‧변조됐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지만 재심이 개시된다고 했다. 막막했다. 진실을 아는 것은 허 씨 자신뿐이었다. 그 사람은 재심이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2년 정도가 걸리고, 또 재심 준비를 하려면 독방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허 씨는 다른 재소자들과 함께 방을 쓰고 있었다. 다시 독방에 가는 것은 끔찍이도 싫었다. 그래서 포기했다. 출소를 하면 언젠가 할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참고 견디기로 했다.

구치소에 들어가기 전, 국정원 조사관들이 허 씨에게 약속한 게 있었다. 가끔 면회를 해 북에 있는 가족들 소식을 알려주겠다고 했었다. 사서함 주소도 알려주며 편지를 써도 좋다고 했다. 약속대로 국정원에서 몇 번 찾아왔다. 허 씨를 직접 조사했던 조사관들도 왔고, 아예 모르는 직원이 오기도 했다.

하루는 면회 도중 허 씨가 울분에 차서 "내가 간첩이 아니란 걸 다 알지 않느냐. 왜 억울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워서 처참하게 만드냐"며 조사관을 붙들고 따졌다. 조사관은 허 씨와 당시 입회한 교도관을 번갈아 쳐다보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조사관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출소해도 정착금과 집을 안 주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허 씨는 더 악에 받쳐서 "그럼 당신들이 나를 간첩으로 만들어 놓은 거라고 난리를 친 뒤 북한으로 가겠다"고 소리쳤다. 조사관은 그제야 "잘 해줄 거다. 이미 통일부에 다 말해놨다"며 어르고 달랬다.

국정원 측이 허 씨를 찾아오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턴 연락이 뚝 끊겼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며 길게 써 보낸 편지는 반송이 되어 다시 날아왔다. 조사관들과 주고받던 편지는 교도관들이 모두 압수해갔다. 북에서 가져온 가족사진 한 장마저도 가져갔다.

▲중앙합동신문센터(현 북한이탈주민센터). ⓒ프레시안(최형락)

"내 자식까지 간첩 짐 떠안고 살아야 하나"

3년을 꼬박 채우고 2015년 1월 11일, 드디어 교도소 밖으로 나왔다. 국정원 사람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통일부 관계자가 관리하는 요양소에서 잠시 지내라며 전라남도 광양으로 데려갔다. 거기서 거의 한 달간을 지내던 도중 인천에 집이 배정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토록 바라던 자유로운 생활이지만 평범한 삶을 유지하는 게 녹록지 않았다. 하나원에서 기초적인 정착 교육을 받지 못 했으니 살아갈 일이 막막했다. 지하철도 탈 줄 모르고, 직업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 줄도 몰랐다. 그래서 처음 얼마간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기초수급비만으로 사는 것은 어려웠다. 밖으로 나가 몸으로 부딪혔다.

"공사판에도 가고 광고 회사도 가고, 인터넷 설치 기사도 따라다녀 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몸이 고된 것은 참을 만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선 아무리 돈을 못 벌어도 북한에서처럼 못 먹고 사는 정도는 아니잖아요. 먹고 사는 것 자체는 힘들지 않았어요.

근데 마음이 힘들었어요. 제가 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한국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런 걸 전혀 모르니까 사람들이 대놓고 무시하고 차별하더라고요. 사기도 많이 당했습니다."

남들과 부대끼면서 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나마 운전이 몸은 고되어도 마음이 편한 일이었다. 트럭 운전을 배우고, 아는 분의 보증으로 대출을 받아 트럭을 샀다.

"북에 남아있는 가족을 데려오려면 무조건 돈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3000~4000만 원이 필요해요. 그런데 지금은 저 혼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일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합신센터에서 있었던 일들이 종종 떠올랐다. 조사관에게 따귀를 맞고, 협박에 못 이겨 결국 허위 자백을 한 일. 그리고 구치소에서 있었던 끔찍한 시간들도 생각났다. 그럴 때면 괴로운 마음에 밤잠을 이루지 못 했다.

"언젠간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자식도 생길 텐데, 나 하나의 잘못으로 내 자식까지 간첩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고 가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앞날이 캄캄해요. 울컥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고, 어떨 때는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담배 피우고...."

▲허우식(가명) 씨. ⓒ프레시안(서어리)

간첩 신고하면 6억 원 준다?

허 씨는 고된 생활 속에서도 재심에 대한 의지는 놓지 않았다. 다만 또 돈이 문제였다.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감방에 있었을 때 신문에서 유우성 씨 사건 보도를 통해서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존재를 알았어요. 출소하면 거기에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변호사를 선임하려면 몇백만 원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생각해서 일단 돈부터 모으기로 했어요. 근데 그 몇백만 원도 모으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작년 겨울 인터넷을 통해서 민변에 메일을 써 보냈습니다."

얼마 뒤 민변에서 전화가 왔다. 장경욱 변호사라고 했다. 장 변호사는 돈 없어도 걱정 말라며 도와주겠다고 했다. 장 변호사를 만난 그는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다 털어놓았다. 장 변호사는 "수법이 유가려나 홍강철 씨 사례와 똑같다"며 혀를 내둘렀다. 문제는 기존 증거의 위‧변조 등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즉, 재심 청구 요건이 부족했다.

"검찰에 증언한 탈북자 중에 동향 사람이 있어요. 아마 그 사람이 저에게 불리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추측하건대, 뭔가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닐까 싶어요. 합신센터에 있을 때 탈북자들 사이에서 '간첩 한 명을 신고해서 실제로 잡히면 6억 원을 준다'는 이야기가 돌았거든요. 사람 심리라는 게, 자기한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작은 거라도 트집을 잡아서 써먹으려 하지 않겠어요."

증거가 없어 재심 청구조차 못 하는 상황이니 허 씨는 가슴을 칠 따름이다.

"정말 너무 답답합니다. 얼마 전 어머니와 통화를 했는데, 형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며 우시더라고요. 왜 끌려갔느냐고 물으니, 보위부에서 형이 한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누명을 씌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여기서 간첩으로 몰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입니까. 제가 진짜 간첩이라면 왜 저희 형이 북한에서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겠습니까. 미칠 노릇입니다."

허 씨는 최근 국정원 적폐청산TF에서 유우성 씨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대통령님! 부디 저의 이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세요.

지금은 사회에 나와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에 찾아가 하소연을 했고 또 장경욱 변호사님과 몇몇 변호사분들이 노력은 하고 있지만 워낙 허위 진술서에 의존한 사건이다 보니 재심을 청구하고 재조사를 받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대통령님께서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함께 간첩혐의로 억울한 삶을 살아야 했던 많은 사람들을 위해 반민주주의적 세력들과 맞서 용감히 싸우셨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주 제도의 든든한 기둥이 되신 대통령님께서 저와 같은 사람들의 이 억울하고 기막힌 인생을 위해 부디 정의를 구현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뿐 아니라 저와 수사방법과 침투방법까지 똑같이 만들어 억울하게 수감생활을 하고 나왔고 또 현재 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의 억울한 인생을 부디 스쳐 보내시지 마시고 그들의 가슴속에 맺힌 한을 잠깐이라도 좋으니 들어주셨으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여기서도 안 된다면 저와 그들의 일생은 물론이고 가족들, 특히 후대들까지도 대를 이어 부끄러움과 억울함 그리고 자책 속에 묻혀 살 것입니다. 부디 저의 이 억울한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장 변호사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들은 합신센터에서의 허위 자백 문제를 밝히기 위해, 과거 수용된 탈북민을 전수조사해 과거 조사 과정 전체에 대한 위법성 여부를 알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허위 자백 피해자 허 씨. 그는 문 대통령과 국정원 적폐청산TF가 이같은 의견에 응답하기를 오늘도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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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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