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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할머니의 증언 "일본놈들, 병든 여성 자궁을 총으로 팍 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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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할머니의 증언 "일본놈들, 병든 여성 자궁을 총으로 팍 쐈어"

[이동석의 '종군위안부' 1992] 피해 여성의 사례를 듣다 ⑤

2015년 12월 28일 오후 3시 32분, 윤병세 외교부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이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박근혜 정부가 '창조적 대안'을 도출했다는 위안부 합의문이 발표됐다. 일본 총리의 직접 사과는 없었고, 합의 내용에도 일본 정부가 출연하겠다는 10억 엔 외에 새로운 것은 사실상 없었다. 그런데도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합의라고 했다. 역사에 과연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게 있을 수 있는가? 시간을 더듬어 올라갔다. 지난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수치심을 이겨내고 공개석상에 선 이후,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저널리스트들이 이 추악한 만행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갖은 협박과 위협을 이겨내고 무단히 노력했다. 이동석 PD도 그 중에 한명이다.

1973년 TBC에 입사해 KBS에서 수많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으며 MBC를 통해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를 연출·제작한 한국 다큐멘터리의 산증인 이동석 PD가 1992년 프로그램 제작 취재기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총 8회에 걸쳐 연재될 이 취재기에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도 함께 담겨 있다. 이동석 PD의 말이다.

"나는 1992년에 <잊혀진 전쟁-종군위안부> 3부작을 MBC를 통해 8.15특집으로 제작 방송하였다. 이 프로그램의 기획과, 자료 수집 과정,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전모를 수회에 걸쳐 소개하겠다. 이 글에서 소개되는 프로그램의 타이틀 <종군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성노예' 등으로 그 용어가 바로 잡히기 전에 통용되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프로그램 당시의 사실성을 살리기 위해 '종군위안부'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일본은 반성의 기미가 없다. 오히려 역사의 시계를 돌리려는 시도마저 하고 있다. 지금, 이동석 PD의 취재기는 우리가 역사에 묻힐 뻔한 진실을 어떻게 발굴해 냈는지 그 치열함을 보여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무엇인지, 역사는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할 것이다. 한국 외교부가 마침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전반적인 검증 작업에 착수한다고 했다. 이 글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정부와 시민들의 이해를 도울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이 글은 1992년 취재 현장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연할 목적으로,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 가능한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봤을 때는 이미 수정된 개념이나, 용어 등이 서술 과정에서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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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다 가쿠오 씨를 만나고 나서 나는 만행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그 현장들을 찾아 나섰다. 저 멀리 남양군도에서 태평양 지역 일본군의 여러 사령부가 있었던 팔라우, 트럭섬을 찾았고 중간거점이었던 괌과 사이판 티니안 등등 일대를 헤매고 다니며 현장을 확보하고 원주민의 증언을 듣고 자료들을 수집하며 퍼즐 조각들을 맞춰 나갔다. 그 나라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의 강점을 받아 쓰라린 고통을 받은 지역들이라 원주민들은 나와 감정선이 일치하였다. 늙은 원주민들은 기억을 더듬어 비교적 상세하게 과거를 증언해 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와 큐슈 등 일본에 다시 들어가 관련 지역을 훑고 다녔다. 일본 큐슈의 한 방송사에서는 중년의 PD가 나와 의기투합하여 자기가 만든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복사해주었다. 그 속에 놀랍게도 우리 피해 여성이 자신의 체험을 직접 인터뷰하는 장면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접근조차 어려웠던 피해 여성들 아니었던가.

그렇게 나라 밖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마친 뒤 귀국하여 나는 회사 회의실의 기다란 테이블에 일본에서 내가 수집하고 얻어내고 사진기로 찍어온 자료들을 쭈욱 펼쳐 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다. 그리고 당시 종군위안부 문제와 연관된 관계자들을 불러들였다. 테이블 위의 자료들을 친절하고 소상하게 설명한 뒤에 내가 말했다.

"이것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일본에서 수집해온 자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피해는 우리 여성들이 당했으나 그 사실을 입증할 증거는 일본에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에는 내가 입수하지 못한 더욱 생생하고 결정적인 증거들이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우리 여성들의 피맺힌 참상과 울분을 세상에 알리려 해도 가해자인 일본의 협조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가장 진실하고 가장 절대적인 증거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바로 우리 피해 여성들의 증언입니다. 그 증언은 일본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보다 더 강력하고 결정적인 증거들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분들 중 어느 한 분에게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연락처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남양군도를 헤매며 이 자료와 증거들을 어렵게 어렵게 구해온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 피해 여성들 중에 어느 분은 일본 방송사에 직접 출연하여 당시의 비극을 생생하게 증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테잎입니다."

나는 그 테잎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어느 분인지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체면을 중시하는 이 나라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기 어렵고 수치스러워 하시는 심정은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차라리 지금 이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분도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두면 우리 피해 여성들의 그 엄청남 괴로움, 고통, 비극, 울분을 누가 대변하고 누가 문제를 해결해 주겠습니까? 그 분들의 모국입니까? 그 분들을 괴롭힌 일본입니까? 당사자들이 침묵하고 계시면 저 뻔뻔스러운 일본이 그 역사적 사실을 지워버리거나 왜곡해서 날조된 역사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비극과 억울함은 없는 것이 됩니다. 그 분들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입수해온 이 자료들은 방송이 끝난 뒤에 여러분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이 하시려는 작업에 직접 도움이 될 것이고 후세에도 남게 될 역사의 사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현장에 다시 나가 땀 흘리며 촬영을 하고 올 것입니다. 부탁하건데 귀국 후에 우리 피해 여성들한테서 그 한 맺힌 이야기들을 남김없이 들을 수 있도록 그 역사적인 작업에 여러분들께서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장기 촬영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꼼꼼히 촬영 계획을 짠 뒤에 촬영에 돌입했던 것이다. 베테랑 카메라맨 하재영과 이태술 씨가 합류하여 용기를 북돋았다. 두 분은 그 후에도 방송사에 빛나는 대작을 여러 편 만든 훌륭한 영상인 들이었다.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자를 찾아다니고, 남양군도를 헤매며 현장을 답사하고 원주민들의 증언을 듣고, 국내로 돌아와 피해 여성들을 설득한 다음 다시 나가 2개월여에 걸쳐서 국내외 촬영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관련 단체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마침내 인터뷰를 승락한 용기있는 피해 여성 여덟 명의 인터뷰를 마쳤다. 그렇게 프로그램의 필요충분조건들을 다 채운 뒤에 전체의 큰 틀을 세웠다. 60분짜리 3부작이었다.

첫 편은 이제는 할머니가 된 피해여성들 여덟 명의 피맺힌 증언과 생활상으로 뼈대를 잡았고 2편은 역사적 자료와 함께 문제의 전말을 정연하게 추슬렀다. 마지막 3편은 남양군도등 현장을 찾아다니며 그 야만의 흔적과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의 분노의 소리를 들었다. 방송은 1992년 8.15특집이었으며 다시 90분으로 종합하여 앵콜 방송되었다.

지금부터 그 3부작을 다시 추슬러서 '종군위안부' 문제의 가로와 세로 그리고 깊이를 글로 정리해보자. (이 글에서 언급되는 여러 상황들은 그 시점이 1992년 8월 이전이라는 것을 미리 밝힌다.)

먼저 피해 여성들(오늘의 감성으로 뒷글부터는 '피해 할머니'라 칭한다)의 피맺힌 이야기를 옮겨보자.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으므로 편의상 네 분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들어보자.

노청자 할머니 이야기 "닷새 뒤 시집가려 사주까지 봤는데...만삭 여인 배 가르고 생으로..."

노청자 할머니의 주민등록증은 뒷면이 어지럽다. 주소지 이전 기록이 빼곡히 적힌 탓이다. 할머니를 만난 곳은 충청남도 어느 도시 변두리 길가에 몇 채가 닥지닥지 붙어있는, 큰 바람 불면 날아갈 듯 한 판잣집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무허가 건축물이었다. 당시 73세의 노 할머니는 무거운 짐을 들듯이 힘겹게 머리를 들었다.
"휴~, 목숨이 참 길어! 매 맞고 발길로 채이고 할 때는 번갯불이 번쩍 나고. 그 이야기를 다 엇따대고 허며... 그때가 열일곱 살이었어요(1937년/중일전쟁 개전). 어머니랑 품앗이랑 셋이서 밭에 씨를 뿌리다가 어머니가 점심밥 챙기러 집에 가셨는데, 이내 숨이 차도록 뛰어 오시면서 소리를 지르신단 말이에요. '야, 도망쳐, 빨리 도망쳐라! 빨리, 빨리 도망쳐!' 그러세요. '왜 그래요 어머니?' '저 마을에, 마을에, 처녀들 잡으러 쳐들어 왔단다. 헌병하고 경찰들이 처녀들을 마구 잡아간대. 아, 빨리 도망치라니까!' 어머니 말씀 끝나기도 전에 급히 밭에서 나와 고모네 집으로 피신하려고 새재를 넘어가는 참인데 느닷없이 나타난 헌병과 경찰한테 붙잡혔어요. 헌병, 경찰이 열 명은 넘는 것 같았어요. 나는 닷새 뒤에 시집가기로 돼있었어요. 시집가려고 사주까지 받아놨단 말이에요. 잡혀서 끌려가보니까 추럭(트럭)을 석대나 쭈욱 받쳐놓고 포장을 다 쳐놨는데, 앞차에는 몽땅 처녀들을 처넣고, 그 속에서 처녀들이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그 속에 나를 밀어 처넣는 거예요. 나중에 보니까 잡혀온 처녀가 서른여덟 명이에요."

그렇게 할머니는, 다섯 밤만 자면 시집갈 처녀는, 일본 헌병과 경찰에 붙잡혔다. 태평양전쟁 이전 중일전쟁시에도 일본 정부(군인과 경찰)에 의해 조선 여성 납치가 자행됐었다는 결정적인 증언인 것이다.
▲노청자 할머니(1992년)
▲당시 노청자할머니가 살던 판자집(1992년)

"그 추럭을 타고 나흘을 끝없이 갔어요.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가다가 주먹밥 주면 얻어먹고 밤낮주야 나흘을 실려간 거지요. (중국) 천진(天津)을 지나 태원(太原)이라는 곳에서 내렸어요. 영락없이 마방(馬房. 마굿간)같은 곳입디다. 판자로 칸을 막아놓은 그런 방을 주욱 연결해놓고 앞에는 천으로 포장을 쳐놓은 그런 방으로 처녀들 한사람씩 들어가래요. 방방에서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나고. 아이구머니 살려 달라고 우는 소리가 나고. 숨쉬는 소리까지 다 듣겨요(들려요). 그 부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부대에서도 왔어요. 하루에 삼십 명도 그만, 사십 명도 그만. 방방이 '나란이'를 섰습니다. 힘들고 지쳐서 퍼져 있으면 바께스(양동이)로 찬물 퍼다가 들이 붓고요. 새벽 다섯시에 깨워서 간밤에 지들이 쏘아댄 탄알의 탄피 주워 도라무깡(드럼통)에다 모아 놓으라고 시켜요 헌병이. 오전 내내 탄피 줍고 점심 얻어먹으면 그 다음부턴 주야장천 들어와서 그짓이에요! 열아홉살 먹은 여자한테 애가 들어서 만삭이 되니까 병원에 데려가서 배를 가르고 애를 생으로 끄집어내서 죽였답니다..."
"......"
"지들이 쌈 싸우러 나갈 때는 쭈욱 줄서서 잘 싸우고 오라고 인사시키고, 싸우고 돌아올 때는 또 나가서 수고하셨다고 절하라고 시켰죠. 하루는 어깨띠를 하나씩 주면서 이걸 두르고 성 밖으로 나가자고 해요. 죽인다는 줄 알았어요. 이렇게 다 써먹고 우리를 죽이는구나. 울고불고 난리 났었죠. 성 밖에 끌려 나가서 보니까 중국 애들 한 사십여 명 잡아다 놨더군요. 스파이나 밀정들이래요. 그들을 하나씩 쭈욱 옆으로 무릎 꿇려 앉혀 놓았는데 각자의 몸 앞에 구덩이를 하나씩 파 놓았어요. 우리한테는 한눈팔지 말고 잘 보라는 거예요. 잠시 뒤에 그 부대에 갓 들어온 신병들이 포로 한 사람에 하나씩 붙어서 허리춤에서 기다란 군도를 빼가지고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 뭐라고 외치고 나서 그 즉시 포로들의 목을 내려치는 거예요. 그 순간 피가 솟구치고 몸뚱이는 구덩이에 떨어져 실룩실룩... 아이구, 지금 생각해도 몸서리 쳐지네요."
".... 그 처참하고 잔인한 현장에 여성들을 왜 끌고 나간 겁니까?"
"독해지라고 그런데요. 독해지라고요. 전쟁이니까 신병들 독해지라고 시키고 우리들도 독해져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들도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아이구, 말로 어떻게 다 해요?"
"......"
"그중에 열여덟 아홉 됐을까 싶은 어린 포로가 그 상황에서도 살려 달라고 싹싹 빌면서 몸부림치자 커다란 군견이 달려들어 얼굴 여기저기를 마구 물어뜯게 합디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몸뚱이를 발로 툭 차서 구덩이에 떨어뜨려놓고 신병을 시켜 킨 칼로 몸뚱이를..."

할머니는 치를 떨었다.

"거기 다녀와서는 잠을 못 잤어요. 그 광경이 눈에 밟혀서. 나뿐만 아니라 이방 저방에서 거기 갔던 여인들이 밤마다 '와악'하며 놀래서 지르는 비명소리가 들립디다. 아마 삼년 동안에 그런 광경을 열댓 번 봤을걸요. 돈? 군표? 그게 뭔지도 모르고 받아본 일도 없어요."

노청자 할머니는 그때의 충격을 잊고자 귀국해서 설악산의 한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16년을 지냈다. 이래저래 다시 속세로 내려온 할머니는 김삿갓마냥 남한일대를 이리저리 떠돌며 몸 붙이고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일거리가 어디 있나요? 쌀 10킬로에다 보리쌀 한 되 주면 그걸로 한 달 살기 힘들어요. 어느 때는 죽도 쑤어먹고 굶는 날도 있고... 마늘 1킬로그램 까주면 그 값으로 200원 줘요. 1킬로에 200원! 그래도 그게 조금은 도움이 되는데 그나마 몸이 아파 한 이십일 못 깠네."

1킬로에 200원이라 말하면서 노청자 할머니는 쓸쓸히 웃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고함을 지를 힘마저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황금주 할머니 이야기 "그들은 지껄이면 죽였다"

서울 관악구의 어느 좁은 골목, 두 평 남짓한 순댓국집의 주인은 황금주할머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황 할머니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양녀로 들어가 살다가 1943년 주인집 딸을 대신해서 정신대로 끌려가게 된다. 할머니 기억으로는, 당시에 천황의 명령으로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열여섯 이상 된 여자들을 무조건 한집에 한사람씩 군수공장으로 보낸다는 소문이 있었고 주인집 딸은 대학에 갈 준비를 하는 입장이라 부득이 그 딸을 대신해서 자기가 나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군수공장으로 돈 벌러 간다 하니 처녀들이 좋아라 집을 나섰다고 말했다. 할머니 열다섯 살 때였다.

▲황금주할머니(1992년)
▲황금주할머니의 순대국집(1992)

"기차를 타고 북으로 북으로 계속 갔는데 '길림성, 길림성~' 그러더라고. 거기서 내렸고 그 이튿날 낮부터 그 일을 겪는 거야. 공장으로 간다고 데려와서 처녀들을 발가벗겨놓고 그 짓을 하려하니 다들 말을 듣겠나? 모두 길길이 날뛰지. 나한테 장교가 다가와서 옷을 벗기려 하길래 반항하면서 이게 군속일이냐 하고 물으니까 이게 군속일이래. 이것 말고 시키는 일 다 할 테니까 다른 일 시켜 달라 하니까 여기서는 이 일밖에 없다는 거야. 미치지. 계속 거부하니까 발로 차고 귀싸대기를 때리고... 총 끝의 단도로 팬티를 짝 찢어버렸어. 그 순간 기절해서 사흘 만에 깨어났지. 그때부터 당하는 거야."

군수공장의 근로보국대에서 돈 벌게 해주겠다고 속여서 데려간 뒤에 전장의 종군위안부로 써 먹은 사례였다. 일본은 "나이 어린 여자들은 군수공장에 '근로보국대'로 보냈고 종군위안부는 나이 든 여자들이 대상이었으므로 '근로보국대'와 '종군위안부'를 같이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둘을 합해서 '정신대'라고 하는 것이므로 종군위안부를 정신대라 칭하는 한국 언론의 무지"를 꼬집는다. 그러나 군수공장에 근로보국대로 보내겠다고 속이고 데려가 종군위안부 짓을 시킨 황 할머니의 경우를 일본은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
"평일날 한 20명, 공일날은 한 40명. 시일이 갈수록 더 많이 받아. 처녀들이 제대로 일어나겠어? 한 달도 못돼서 병이 옮는 거야. 무슨 병인지도 모르지. 성병인지 무슨 병인지 몰라. 그냥 붓고 아프니까. 606호를 놓더라고. 열일곱 살 처녀가 애를 배니까 606호를 놓더라고. 애가 떨어지고 나니까 그 처녀 몸이 이렇게 붓는 거야. 찬데서 자고 먹지 못하고 그러니까. 그 여자들 살지 못해. 그렇게 임신한 여자들 많아."
".... 그 안에서 여자들끼리 대화는 할 수 있었나요?"
"못 해! 지껄이면 죽여! 도망가려고 궁리한다고. 지껄이면 죽여. 중국 여자들은 없었어. 모두 우리 한국 여자들이었어. 나 가자마자 들은 얘긴데, 자빠뜨려놓고 자궁에다 총을 쏘더래. 그러니까 여자가 탁 파열이 돼버리더래."
"그 이야기 다시 한 번 해보세요. 자세히."
"여자들이 말 안 듣잖아, 20여 명이 달려들어 울고불고 몰려들잖아. 그러니까 본보기로,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죽인다고 하면서, 먼저 있던 여자들이 보니까, 병이 들어 못 일어나게 생긴 여자더래. 그 여자를 골라서 자빠트려놓고 총을 팍 쏘더래."
"어디에다?
"자궁에다! 그 뿐은 줄 알아? 말 안 듣는다고 칼로 가슴을 이렇게 그어서 지금도 깊게 패인 여자가 있는데, 저기 할머니는 다리 병신돼서 걸어 다니지도 못하는 사람이 있어. 말 안 듣는다고 다리를 잡아 찢은 거야. 그때 뒤 허리가 잘 못 돼가지고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녀. 지금도."
"할머니가 그런 일을 겪었다는 걸 누구한테 이야기 해본 일 있나요?"
"못해요. 챙피해서. 누구한테 해? 이 동네에서도 아무도 몰라."

황 할머니는 귀국 후에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다. 자신의 삶이 너무 억울해서 일본에 직접 건너가 저들의 만행을 고발하기도 했고 국내에서 보상운동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내가 죽도록 고생하고 신세가 이 지경이 됐는데 내가 왜 직접 보상을 안 타? 안 그래? 내가 본인인데. 장본인인 내가 타야 하는 거야."

장본인! 내가 장본인인데 내가 받아야지.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장본인의 울분과 피해를 먼저 장본인의 입장에서 풀어야 한다는 해법을 황 할머니는 강조하는 것이었다.

강덕경 할머니 이야기 "군수공장 탈출했는데, 잡혀서 위안부로 만들어졌다"

강덕경 할머니는 얼굴이 곱고 단정했다. 말씀도 차분하고 교양미가 있었다. 강 할머니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다가 7개월 뒤에는 종군위안부가 됐다. 경기도 남양주군 비닐하우스 단지 물탱크를 개조해서 만든 공간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진주 기타공립학교 고등과 1학년 때인 1944년 봄 같은 반 학우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우리 일본인 선생님이 돈 벌 수 있다고 꼬드기는 바람에 좋다고, 부산에서 150명이 연락선을 탔지요.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미군이 겁나서 그랬는지 저 멀리 떨어져서 일본 군함 두 척이 연락선 옆에서 따라가고 공중에 비행기가 두 대 따라가고요. 시모노세키에 내려서 기차를 타고 쭈욱 가서 도야마껭(도야마현)까지 갔지예. 비행기 만드는 공장인데 부품을 우리가 깎았어요. 거짓말 안보태고 양재기에 밥이 요만큼(손바닥을 반으로 오므리며) 나와요. 배가 고프니까 어떤 애는 밥알 하나씩 헤아려가며 먹는 애도 있고요 어떤 애는 아꼈다가 나중에 먹는다고 오시레(일본식 붙박이 벽장)에 갖다 놓는 애도 있고 그랬지요. 하도 배가 고프니까 어떤 애는 일하러 가는 중에 공장 철조망 밖에 자라난 풀을 독초인줄도 모르고 뜯어 먹다가 죽은 애도 있어요. 미친 애도 있는데 되게 미치니까 집으로 돌려보낸 애도 있어요."

할머니는 너무도 고향 생각이 간절해서 당시 유행했던 일본 노래에 자신이 직접 지은 가사를 붙여 진주에서 온 동무들에게 가르쳐주고 큰소리로 같이 부르며 울기도 했다. '아~, 산을 넘고 바다건너 멀리멀리 정신대에, 아득하게 떠오르는 반도의 어머님의 얼굴이 또 떠오르네~'

▲강덕경할머니(1992년)
▲강덕경 할머니가 기거하던 물탱크(1992년)

"아무리 참아도 견딜 수가 없어서 7개월 뒤에 둘이서 밤에 도망을 나왔어예. 가슴이 두근거리고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누가 고발을 했는지 군인 추럭이 왔어예. 내 친구를 찾을 새도 없이 벌벌 떨고 있는데 빨간 별 세 개짜리가 타라고 해서 탔어예. 차에 타가지고 그 밤에 산으로 어디로 끌려 다녔지예. 야산 어디쯤에서 내 손을 잡더니 내리라고 해요. 내렸더니 저쪽 어디로 붙잡고 가더니... 거기서... 처음으로 당했지요... 나이가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고(당시 14~5세) 내가 그 일을 무서워 하니까 하루밤에 너댓명 씩만 오고 그랬어요."

일본인 선생에게 속아서 군수공장 근로보국대에 끌려갔다가 배가 고파 탈출한 열너댓 살의 어린 소녀는 밤중에 야산에서 일본군 장교에게 강간을 당하고 그 길로 끌려가 종군위안부가 됐다는 것이다. 일정한 장소에서 일본군의 만행을 감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본군이 있는 현지까지 찾아가야 하는 고통을 강 할머니는 당해야 했다.

"누구누구 이름을 부르며 너희들은 담요를 가지고 따라오라 해요. 그리고는 저 산위로 데려가요. 거기 나가 있는 일본 놈들이 총을 옆에다 놓고 지랄들 하고 가고 그랬죠. 어떤 놈은 방공호 속에서 그 지랄하고요."

전국 각지를 떠돌아다니던 할머니는 5년 전 남양주의 그곳 비닐하우스에 정착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관할 관청으로부터 이집마저 철거 대상이라는 통보를 받고 있다.

"사회계장님이 나오셔서 양로원에 가실 의향은 없으시냐고 묻대예. 지금까지 숨어살면서 내가 정신대 갔다 왔다는 이야기 아무한테 안했는데 거기 가서 다 드러나면 따돌림 받겠다는 생각이 들고, 비밀이 보장되겠어요, 그런데 가면... 그래서 아무 대답 안했어요. 거기 안 가려 해요"

강 할머니는 누구든지 밭일이라도 시켜주기만 하면 그저 열심히 하겠노라고 말하며 쇠약하지만 고운 얼굴에 눈물을 머금었다.

박 할머니 이야기 "그놈들이 인두로 등을 지졌다"

1941년 당시 혼인신고까지 끝내놓은 박 할머니(가명)는 집집마다 뒤지고 다니는 다섯 명의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끌려갔다. 그분은 얼굴을 가린다는 조건으로 50여년 전의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심장이 뛰어요. 그 말만 하면 심장이 뛰어요. 어디로 갔나하면, 그땐 몰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나가사키라고 하는 것 같아요. 거기서 남자 상대하는 교육을 받았어요. 들어오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잘 상대해줘라 그런 내용이지만 처음 겪는 처녀들이 그게 뭔 소린가 싶잖아요? 그런 뒤에 군인 트럭에 실었어요. 한 30명이 차를 타고 가는데 어딘지 몰랐지요. 다 당하고 나중에 나올 때 들어보니까 구마모토라 해요. 조그만 다다미방이 쭉 연결돼 있는데 여자들 하나씩 방방에 들어가래요. 군인 상대하러. 다들 놀래가지고, 이런 일이 어딨어요? 어느 아가씨가 도망을 치다가 붙잡혔어요. 붙잡아서 심하게 기합을 주니까 여자가 놀라 자빠져서 끝내 죽었지 뭐. 군인들이 우리들 도망가지 말라고 칼로 죽은 사람 유방을 도려내고 배를 가르고 몸을 이렇게 저렇게 하니까 창자가 막 나온거요. 우리들 보라고 그 창자를 이리저리 흔드는데, 이거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나요."

더 이상 그 아비규환의 위안소에서 견딜 수 없었던 박 할머니도 탈출을 감행하다 잡혀 들어왔다. 그에게도 어김없이 참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끌고 들어와서 거꾸로 매달아놓고 허리에다 뭐를 치고, 내 등허리가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따끈따끈해요 등허리가."
"할머니 등 좀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지요."

그랬다. 할머니 등에 대여섯 군데나 불로 지진 자국이 나 있었다.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인두 자국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 박아무개할머니의 등에 남은 인두로 지진 흔적(1992)

"거꾸로 매달아놓고 인두로 지진 것 같아요."
"그리고 나서 언제부터 군인들을 상대했어요?"
"그날 저녁부터요."

잔인한 고문이 있던 그날 밤부터 군인을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박 할머니는 그때부터 4년여 동안 갇혀 살면서 위안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아비 모르는 아이를 두 번이나 낳았다. 두 아이는 두 살 터울이었다. 날 때마다 아기들을 '어떤 아줌마'가 데려가 키우며 일주일에 한번쯤 엄마를 보게 해주었다. 물론 해산하고 사흘 뒤부터는 다시 일본군을 받아야하는 비극적인 삶이었다. 어느 날 폭격을 맞았다. 일본군 다수가 죽거나 도주해서 한명도 볼 수 없었고 위안부 여성들도 볼 수 없었다. 밟히는 시신들 위로 걸어 들어가 지하실에 있다는 아이들을 찾았다. 기적적으로 아이들은 거기서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두 아이를 품에 안고 나왔다. 기구한 삶, 기구한 아이들과 기구한 엄마였다. 종전이 되었다. 엄마는 천신만고 끝에 두 아이를 데리고 귀국했다. 그러나 두 아이들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났다. 박 할머니는 그 후 다행히 혼인을 할 수 있었고 아들을 낳았으며 효성 깊은 며느리를 얻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로부터 그 모진 세월 그 억울한 삶을 듣고 시어머니를 설득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용기 있게 관계기관을 찾아가 시어머니의 삶을 죄다 이야기했다. 속리산 부근 기념품가게 그 할머니와 그 며느리 이야기다.

할머니 한분 한분과의 인터뷰는 서너 시간씩 이어졌다. 마지못해 말을 시작하던 할머니들은 점차 울분이 치솟아 질문 없어도 말씀을 이어갔다. 다만 프로그램의 길이가 정해져 있으므로 말씀을 다 소화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제 도대체 이 천인공노할 더럽고 잔인한 만행이 어떤 틀과 흐름 위에서 시작되고 발전되었는가. 그 전말과 만행의 현장을 정리해보자. 그것이 프로그램의 제2편 3편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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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석

1973년에 TBC에 입사, 이후 35년간 다큐멘터리에 매달렸다. 성철스님 일대기, 손기정 다큐멘터리 등 다수의 인물 다큐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의 진실을 밝힌 <잊혀진 전쟁>을 기획, 연출을 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만행을 추적한 <종군위안부>로 1993년 백상예술대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정통다큐멘터리 월요기획을 만들었고, 인간극장, 한국탐구 등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다큐멘터리를 제작, 기획,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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