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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이후 '출구 전략'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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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이후 '출구 전략'은 없는가?

[의제27 '시선'] 만주의 역사적 교훈과 한반도의 운명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고구려 유적과 백두산을 보기 위해 중국 선양(審陽)을 찾았다. 선양은 청나라의 수도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치욕스런 역사가 담겨 있는 곳이다. 청나라는 두 번이나 대군을 동원해 조선을 침략하고 짓밟았다. 김훈의 <남한산성>에 묘사된 대로 조선 왕 인조는 청 황제 태종 앞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조선의 소현세자는 선양에 압송되었다. 선양 공항에 도착하면서 나는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의 심경을 상상해 보았다.

고구려를 찾아서

선양에서 하루 밤을 보낸 후 고구려 유적이 있는 지안(集安)으로 향했다. 지안은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심양에서 지안을 가는 길은 차로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만주벌판에 말을 타고 달리는 고구려인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차에 기꺼이 몸을 실었다. 차는 덜컹거렸지만 차창 밖에는 눈에 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옥수수 밭 너머로 야트막한 언덕과 산봉우리는 한반도의 풍경과 너무 비슷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말을 타고 달렸을 만주 벌판에서는 토목공사가 한창이었다. 2004년부터 연안지역에 비해 뒤처진 라오닝, 지린,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 개발을 위해 '동북진흥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보이는 곳마다 도로를 건설하느라 바빴다.

이덕일의 책 <고구려는 천자의 제국이었다>를 보면, 고구려는 동아시아를 900년 동안 지배했다고 한다. 부여의 왕자였던 동명왕은 남쪽으로 내려와 홀본의 오녀산성을 도읍으로 정했으나, 그의 아들 유리왕은 국내성으로 천도했다. 달아나는 돼지를 쫓다가 국내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아마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돼지를 키우며 살았나보다. 실제로 19세기 중국을 여행한 박제가의 <북학의>를 보면, 만주의 농가마다 돼지를 키우는 장면이 그려졌다. 하지만 어디에도 돼지 키우는 집은 보이지 않았다. 고구려의 말도 보이지 않았다. 말 대신 버스를 타고 지안에 도착하자 푸른 압록강이 눈앞에 다가왔다. 고구려의 기마족들은 이 강을 어떻게 건넜을까? 넓은 만주 벌판에 비하면 압록강은 조그만 개천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5년 '동북공정' 논란이 거셀 즈음 고구려 역사가들은 수난을 겪었다. 내가 아는 한 고구려 전공 역사학자는 선양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안(경찰)이 따라 붙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전공하는 한 고고학자는 고구려 유적 앞에서 설명하는 것도 공안의 제지를 받았다고 한다. 현지 안내원 외에는 아무도 고구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졌다. 그러나 수년이 지난 지금 고구려 유적에서는 감시의 눈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광개토왕릉(호태왕릉)과 장수왕릉은 거대한 위용을 드러낸 채 말없이 서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귀족의 무덤이었던 오회분 5호묘 벽화의 사신도는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지안에서 유일하게 관람을 허용하는 고구려 고분 벽화이다). 환도산성 아래 1500기가 넘는 돌무덤은 외적의 침략에 맞선 고구려의 오랜 세월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만주의 뿌리

중국의 공식적인 역사 해석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는 중국사이다. 그러니 고구려, 발해, 요, 금, 후금, 청나라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그러나 1905년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중국혁명동맹회를 만들어 삼민주의를 강령으로 삼고 '청의 타도, 중화 회복, 민국 창립, 지권 평균'을 주장했다. 쑨원은 "산해관 밖의 동쪽 오랑캐인 만주족이 중국인을 노예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말 그대로 보면 만주족은 중국인이 아닌 셈이다. 실제로 1911년 신해혁명은 청나라를 없애고 한족의 나라를 세우자는 민족주의에서 출발했다. 이 당시 중국인들 중 만주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고구려사가 한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고구려의 주도세력 중 예맥족의 일부가 한반도에 정착했지만, 고구려는 선비, 숙신, 거란으로 불린 북방 민족들의 연합체이었을 것이다. 만주에서 말을 타고 달렸던 북방민족에게 고구려가 어느 나라 역사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다. 만약 만주국(1932-1945)이 아직도 존재한다면 고구려사는 그들의 역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만주는 중국 대륙문화, 북방 유목문화, 한반도 문화 등 수많은 민족들이 뒤섞여 만났던 역사적 공간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듯 하다.

고구려 이후 가장 오래 만주를 지배한 민족은 금, 후금, 청을 세운 여진족이었다(역사학자들은 여진을 '주선'이라고 부르는데 '조선'과 발음이 유사하다). 이들은 한 때 읍루, 물길, 말갈로도 불렸다. 대청제국을 세운 황타이지 황제가 여진족을 만주족이라고 고쳐 불렀고, 1668년 강희제는 만주가 시조의 탄생지라며 한족이 오지 못하도록 '봉금'(封禁) 정책을 실행했다. 그러면 만주에는 아직도 만주족이 살고 있을까? 베이징, 내몽고, 신장, 동북 3성 등지에 100만명의 만주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통화(通化)에는 만주족자치구도 있다. 비극적 소설 <루어투어 시앙쯔>(1937)를 쓴 작가 라오서(老舍)가 만주족 출신이다.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당분자로 비판을 받고 투신 자살했다.

만주족은 대청제국을 세우고 조선을 침략했지만, 사실 고구려에서 갈려나온 민족으로서 조선과 문화적 전통이 매우 유사하다. 중국 역사서를 보면 숙신, 말갈, 여진이 고구려 주몽의 후예라고 한다. 대청제국의 수도였던 선양의 고궁을 보면 만주족의 문화가 얼마나 우리와 비슷한지 알 수 있다. 시베리아, 만주, 한국, 일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샤머니즘(shamanism)의 문화는 무당과 제사를 통해서 드러난다. 청나라의 궁궐 안에서 무당은 칼과 방울을 들고 춤을 추었고,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 우리가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과 유사하다. 무당은 성무의례를 지내고 접신술로 영혼의 안내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청나라는 중국의 한자와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자신들의 전통적 종교의식을 계속 고수했던 것이다. 이는 미르치아 엘리아데가 <샤머니즘>에서 묘사한대로 동아시아의 샤머니즘 문화의 원형(prototype)이라고 볼만하다. 고궁 안에 있는 긴 막대 모양의 솟대도 낯이 익다.

제국의 유산

어떻게 청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으로 번성했을까? 일본 역사가 이시바시 다카오의 <대청제국 1616-1799>을 보면, 대청제국은 300년간 중국 뿐 아니라 만주, 중국, 몽고, 티벳, 신장을 아우른 중국 최대의 통일 다민족 국가를 건설했다고 한다. 어떻게 100만의 만주족이 어떻게 1억의 한족을 지배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심양의 고궁을 보아야 한다. 심양의 고궁에는 황제의 궁전 앞에 팔기군(八旗軍)의 집무실이 늘어서 있다. 대청제국의 핵심조직 팔기군은 만주족의 독점물이 아니라 한족, 몽고족도 따로 구성했다. 대청제국은 강희, 옹정, 건륭 황제를 거치면서 다른 민족, 문화, 종교를 구별하지 않고 거대한 제국의 용광로에 끌어들였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영토는 사실상 대청제국이 완성한 것이다. 신해혁명으로 대청제국이 붕괴하자 모든 소수민족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곧바로 만주, 신장, 몽고, 티벳으로 진격했다.

만주를 차지한 마오쩌뚱은 엄청난 한족 인구를 이주시켰다. 이제 만주의 대다수 민족은 만주족이 아니라 한족이다. 만주족은 문자와 언어를 잃어버렸으며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정체성조차 갖고 있지 않다. 신분증에만 만주족이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한족이 살던 중원을 벗어나 거대한 제국의 영토를 지배한 중국은 대청제국처럼 동아시아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만주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 미국에 맞서 참전했다. 지금도 선양 도심 한복판에는 마오쩌둥의 커다란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마오쩌둥은 남쪽을 바라보며 손을 가리키고 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서 장남 마오안잉을 잃었다. 연변에 사는 조선족 출신 가이드 김 씨는 마오쩌둥이 북한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이 결코 북한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연합뉴스

한반도의 운명과 6자회담

오늘날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세계무대에서 G2의 수준에 올랐다. 그러나 주변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할지 미지수이다. 모순적인 외교적 수사와 불안정한 국제정치의 이해관계가 얽힌 동아시아의 한복판에 한반도가 있다. 중국의 외교 전략에는 한반도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제국의 입장과 타국의 내정간섭을 피하려는 비동맹운동의 입장이 공존하는 것일까? 강희제의 제국과 저우언라이의 비동맹주의는 중국 외교의 핵심 요소이지만 어디로 기울지 분명치 않다. 북핵과 천안함 사건에서 보여준 중국의 복잡한 계산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하여 한중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고 선언했지만, 최근 천안함 사건 이후 '한중 외교파문'로 한중관계가 불안해지고 있다. "북한 반성 없이 6자 회담 기대 어렵다"며 천안함 사건과 6자회담을 연계하는 정부의 방침은 오히려 외교적 고립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외교안보팀을 유임시켰지만,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여론은 변화를 원하고 있다. 7월 21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여론조사를 보면, 정부의 대북강경정책의 근본적 재검토(28.7%)와 일부 수정이 필요(42.7%)의 의견이 많은 반면, 현재 기조 유지(27.4%) 의견은 적었다. 남북교류사업도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이 64.9%로 '제한 또는 축소해야 한다'는 응답이 33.6%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천안함 사건 이후 '출구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대화 없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냉전 시대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두려움 때문에 협상을 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협상하는 것 때문에 두려워하지 맙시다"라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남북관계를 복원하고 6자회담을 재개하기 위한 협상의 주도권을 한국 정부가 다시 잡아야 한다. 400년 전 전쟁에 지고 선양에 끌려간 소현세자는 당시의 국제정치를 냉정하게 보았다. 쇠퇴하는 대명제국과 떠오르는 대청제국이 만든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고뇌했을 그의 심경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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