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프레드 버체트(1911~1983년)는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에 들어간 최초의 서방 기자다. 1945년 9월 3일 새벽 2시, 도쿄로부터 20시간의 열차 여행 끝에 히로시마에 닿은 그는 체신병원에 수용돼 있던 70여 명의 피폭 생존자들을 둘러본 뒤 폭격의 잔해 위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기사의 제목은 '원자병(Atomic Plague)', 부제는 '세계에 대한 경고로서 이 기사를 쓴다.'
"히로시마에서는 최초의 원자폭탄이 도시를 파괴하고 세상을 뒤흔든 지 30일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불가사의하게 그리고 끔찍하게 죽어가고 있다. 하늘과 땅을 온통 뒤흔들어놓은 그 대폭발에서도 상처를 입지 않았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기자는 원자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중략)
기자는 이러한 사실들이 세계에 하나의 경고가 될 것을 희망하면서 가능한 한 냉정하게 이 기사를 쓰고 있다.(중략)
나는 병원에서 폭탄이 떨어졌을 때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으나, 나중에 괴상한 후유증으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무슨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들의 건강은 악화됐다. 식욕이 없어지고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몸에는 푸른 반점이 생겼다. 그 다음에는 귀와 코와 입에서 출혈이 시작됐다. 처음에 의사들은 일반적인 쇠약 증상인 것 같다고 말했다. 환자들에게 비타민 A 주사를 놓아주었는데 결과는 끔찍했다. 주삿바늘이 꽂힌 곳부터 살이 썩어 나가더니 그런 다음에는 예외 없이 죽는 것이었다.
이것은 인간이 투하한 최초의 원자폭탄이 가져온(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하나의 후유증이다.(중략)
이러한 파멸이 히로시마를 덮치던 그 순간부터 그 재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백인을 증오했다. 그것은 강도가 거의 원자폭탄만큼 무시무시한 증오다."
세계 최초의 원자탄 피해 상황에 대한 외부인의 첫 번째 현장 르포인 이 기사는 버체트가 소속돼 있던 <런던 데일리 익스프레스> 9월 5일 자에 1면 머리기사로 실려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신문은 당시 서방에서 최대 부수(380만 부)를 자랑하는 신문이었다. 이후 그는 호주로 돌아가 몇 달간 반핵 활동을 벌인 뒤 독일의 냉전 상황과 한국전쟁, 인도차이나전쟁 등을 취재하며 호주가 낳은 최고의 종군기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원자탄 실상에 대한 조직적 은폐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의 실상을 세계 최초로 특종 보도한 그가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펴낸 것은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1983년이다. 그의 마지막 저서가 된 <히로시마의 그늘(Shadows of Hiroshima)> 서문에서 그는 이토록 뒤늦게 책을 써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책은 198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히로시마>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됐으며 1995년 리영희 선생의 해제를 붙여 <히로시마의 그늘>로 재출간됐다.)
"나는 아주 어리석게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 여파가 문서로서 아주 잘 정리되고 보도도 되었기 때문에 그 문제에는 덧붙여야 할 아무런 새로운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났던 일의 실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그런 대학살의 결과에 대한 일종의 방심상태를 틈타 끔찍한 핵전쟁의 위협이 다시 대두됐을 때야 비로소 이제는 내 자신의 경험을 자세하게 기록해야 할 시기라고 느꼈다.
1971년 이후 여러 차례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생존자들의 비극적 운명을 조사하고, 또 그 문제에 관하여 내가 찾아낼 수 있는 모든 관련사항들을 검토한 결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범죄의 실상을 이전에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특히 원자탄을 투하한 이유와 생존자들에의 장기적인 영향에 대한 공식적 은폐가 얼마나 집요하고 광범위한가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히로시마에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실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라고 할 만큼 오늘날 모든 사람들에게 절박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원자병'에 대한 자신의 고발 기사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원자탄의 끔찍한 해악과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한 이유가 일반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 이는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 은폐 때문이라는 것, 그 결과로 인류는 여전히 핵전쟁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방세계의 지도자들은 핵 우위가 그들로 하여금 역사의 진로를 지배하고 사회변혁의 조류를 막을 수 있게 해주리라는 환상에 빠져, 2차 대전 말기에 그들이 잠시 보유했던, 절대적 핵 우위를 되찾겠다는 망상을 좇는다. 더욱이 핵 시대 처음 40년의 선례를 살펴보면 그들은 대대적이고 조직적으로 우리를 기만하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1945년 당시 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극악무도함에 압도된 나머지, 냉혹한 고의성과 사전 계획에 따라 은폐극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기자들과 일본의 생존자들이 겪은 일들을 알게 되면서 나는 핵전쟁의 끔찍한 결과에 대한 사실 보도를 막는 공식적인 정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원자탄은 1차 대전 때 악명을 떨쳤던 화학무기(독가스)보다 훨씬 치명적이고 위험한 무기다. 특히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후유증이 다음 세대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사용할 수 없는 무기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탄으로 5년 내에 34만 명이 사망하고 1980년대 초 현재 37만 명이 그 후유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더구나 1950년대 초 원자탄보다 천 배나 강력한 수소탄이 개발된 이후 핵전쟁은 곧 인류의 절멸을 가져올 수 있게 됐다.
이 때문에 원자탄 사용에 반대했던 윌리엄 리 제독은 1950년 펴낸 자서전에서 "이 신형무기를 '폭탄'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이것은 폭탄도, 폭발물도 아니다. 치명적 방사능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독극물이다"라고 일갈한 바 있다.
미국 정부 프로파갠다의 승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상당수 사람들에게 핵무기가 정당한 전쟁 무기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미국 정부가 오랜 동안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시행해온 정보 통제 및 여론 조작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 미국의 진보적 정치학자 마이클 패런티는 "미국 시민들이 자신들의 지도자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지배자들이 실제로 하고 있고 있는 것 사이의 격차는 현대사 최대의 프로파갠다 업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어떻게 해서 인류의 양심과 양립할 수 없는 절대 악인 핵무기를 정당한 전쟁 무기로 둔갑시킬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첫째 미국 정부의 원자탄 관련 정보 독점과 통제, 둘째 방사능 피해에 대한 은폐와 부정에 의해서였다.
원자탄 개발은 부통령인 트루먼조차 모르고 있을 정도로 극비사항이었다. 미국인을 비롯한 세계 시민이 원자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이후였다. 중요한 것은 모든 원자탄 관련 정부 발표가 단 한 사람의 기자에 의해 쓰였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의 과학 담당 기자인 윌리엄 레오나르도 로렌스(1888~1977년), 미 원자탄 개발의 공식 대변인인 그는 열렬한 핵무기 예찬론자였다.
버체트 기자가 히로시마를 방문한 것은 피폭 후 4주일이 지난 9월 3일이다. 그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8월 6일, 오키나와의 미군 간이식당에서 햄버거를 먹다가 일본에 막강한 위력의 신형 폭탄이 떨어졌다는 라디오 뉴스를 얼핏 들었다. 그날 저녁 장교식당에서 '히로시마라는' 곳에 투하된 것이 원자탄이란 걸 알았고 '일본에 들어가면 그걸 취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버체트는 원자탄에 대해 일자무식인 상태에서 오로지 기자의 직감으로 히로시마에 잠입해 그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것에 대해 쓴 것이었다. 그가 히로시마를 향해 떠난 9월 2일은 미 군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있던 날로 당시 일본에 와있던 6백여 명의 서방 기자들이 이 역사적인 행사에 참석했다. 오직 버체트만이 히로시마 피폭 현장을 찾은 것이다.
( 9월 6일에는 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조지 웰러 기자가 나가사키에 잠입해 사흘간의 취재 끝에 2만 5000단어 분량의 현장 르포 기사를 작성했으나 이 기사는 맥아더 사령부에 압수돼 영영 빛을 보지 못했다. 버체트의 기사가 히로시마에서 도쿄를 거쳐 영국 런던에까지 전송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미국 원자탄의 공식 대변인 윌리엄 로렌스
버체트는 원자탄의 참혹한 피해를 사상 처음으로 세계에 알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 번의 기사에 불과할 뿐이었다. 반면 윌리엄 로렌스는 8월 6일 이후 모든 미국 언론들이 원자탄에 관해 쓴 모든 기사들의 원 자료를 제공했다. 히로시마 피폭 16시간 후 발표된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 초안을 비롯해 스팀슨 전쟁부 장관의 성명, 그리고 14개의 관련 보도 자료 가 모두 로렌스가 쓴 것이었다.
미국의 신문과 방송은 이 보도자료를 그대로 전재하거나 일부 손을 보아 보도했다. 한마디로 미국 사람들은 로렌스 기자의 눈을 통해 원자탄을 바라보게 된 셈이며, 원자탄에 관한 담론을 로렌스가 주도하게 된 것이다.
원자탄 개발과 원자탄 관련 정보 공개의 책임자인 그로브스는 "거의 모든 신문이 우리 보도 자료를 통째로 보도했다. 정부 보도 자료가 이토록 광범위하게 보도된 적은 거의 없다"며 희희낙락했다.
로렌스는 레슬리 그로브스가 직접 발탁한 인물이다. 원자탄 정보 공개와 관련해 그로브스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원자탄의 막강한 위력을 알리는 것, 다른 하나는 원자탄이 정당한 전쟁 무기임을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야 원자탄이 전후 국제정치에서 미국의 핵심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원자탄이 사용된 후 이 무기가 비인도적이다, 또는 전쟁 무기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 등의 비판이 제기되는 것을 그로브스는 가장 경계했다.
그로브스는 1945년 3월부터 은밀히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1945년 4월 퓰리처상 수상 기자인 윌리엄 로렌스를 만나 그를 미군 공보장교 겸 원자탄 보도책임자로 발탁했다. 조건은 두 가지였다.
첫째 모든 기사는 그로브스와 스팀슨 장관의 승인을 받을 것, 둘째 작성 기사는 극비로 분류돼 보관되며 전쟁이 끝난 후, 또는 원자탄이 사용된 후 발표된다.
이후 두 달여간 로렌스는 원자탄 제조의 주요 현장을(최초의 핵연쇄 반응을 성공시킨 시카고대학 금속연구소, 오크리지 우라늄농축 공장, 핸포드 플루토늄 생산 공장, 원자탄을 제작한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등) 모두 방문했다. 또한 민간인으로는 유일하게 트리니티 핵실험을 참관했으며, 나가사키 폭격에도 동승했다. (히로시마 폭격에도 동승할 예정이었으나 티니안섬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한마디로 로렌스는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도 원자탄에 관해 가장 많은 것을 아는 민간인이 됐다. 게다가 그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을 강력히 주장해온 원자력 예찬론자였다. 원자력시대(Atomic Age)란 말도 그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일찍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매료됐던 그는 이미 1929년에 원자력에 관한 기사를 작성했다. 1939년 미국 물리학회에서 '혁명적 발견-우라늄 분열'이라는 회의를 참관한 뒤 엔리코 페르미와 닐스 보어에게 "결국 이게 원자탄이 되는 게 아닙니까?"라고 질문해 두 과학자를 "경악"하게 했다. 당시는 원자탄의 가능성이 이제 막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때였기 때문이다.
페르미가 "이론적으로" 가능하고 "언젠가는" 되겠지만 25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대답하자 로렌스는 "히틀러가 훨씬 더 짧은 시간 내에 해낼 수도 있겠네요"라고 응수했다.
이후 원자탄 개발 경쟁에서 뒤질 것을 크게 우려한 로렌스는 단독으로 원자탄 개발 캠페인을 벌였다. 1940년 5월 원자탄 제조 가능성에 대한 시리즈 기사를 <뉴욕타임스>에 연재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9월에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히틀러의 직접 명령에 따라 (중략) 독일의 1급 과학자 200명이 (원자탄 제조에) 힘을 모으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1940. 9. 7). 이는 매우 과장된 기사였으나 그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는 몰랐지만, 루스벨트가 이미 원자탄 개발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로렌스의 핵숭배
그의 원자탄 사랑은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원자탄을 너무도 아낀 나머지 "원자탄을 미국 땅에서 낭비하려 하는가? 원자탄이 있다면 곧바로 일본에 떨어뜨려 전쟁을 끝내야 하는 게 아닌가? 그 좋은 폭탄을 낭비하다니..."라고 비판했다.
트리니티에 대해서도 원자탄 개발에 참여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세상의 종말을 예감한 반면 로렌스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 즉 창세기를 연상했다.
로렌스는 과학자 조지 키치아코프스키의 풀죽은 모습을 보며 "첫 원자탄의 폭발은 키치아코프스키 박사에게 '종말의 날에 가장 근접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똑같은 사건이 내게는 새로운 세계의 탄생을 의미하는 장관이었다"고 찬탄했다.
그는 원폭 투하를 직접 참관하기 위해 티니안섬으로 가면서 이는 "언론인으로선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최고의 영예"라고 자부했다. 또한 나가사키 폭격을 앞두고는 "곧 죽을 운명에 놓인 저 불쌍한 악마들에게 일말의 동정심이나 가련함을 느낄 수 있을까?"라고 자문하며 저들은 자신의 죽을 운명을 모르는 반면 자신은 알고 있다는 점에서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절대적 파괴무기인 원자탄에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감한 그의 심리 상태는 다음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히로시마 직후 발표된 대통령 성명은 그로부터 두 달 전 로렌스에 의해 작성됐는데, 그중 한 부분이 "너무 자세하고 지나치게 과장돼 있으며 심지어 허풍처럼 들린다"는 이유로 삭제됐다.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원자력을 확보한, 이 위대하고 경이로운 새로운 대륙(미국)은 모든 인류에게 부와 건강과 행복의 새로운 약속의 땅을...이제껏 세계가 보지 못했던 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제공할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정신분석의로 히로시마가 미국인의 심리에 미친 영향을 수 십 년간 연구해온 로버트 리프턴 박사는 그의 저서 <미국의 히로시마(Hiroshima in America)>에서 이러한 심리 상태를 '핵 숭배'(nuclearism)라고 지칭했다. 핵무기가 가져올 인류의 위기를 우려하기보다는 핵무기의 혁명적 파괴력에 도취되고 이를 경배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해 8월 갤럽 여론조사에서 원자탄 사용에 대한 찬성은 85%, 반대는 10%였다. 한편 로퍼 여론조사에서는 50%가 "트루먼의 원자탄 사용에 찬성", 23%는 "일본 항복 전에 더 많은 원자탄을 투하해야 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반응은 우선 일본에 대한 적개심, 이른 종전에 대한 안도감,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이 원자탄 피해의 실상을 몰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렌스가 주도한 원자력 예찬도 분명히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제 원자탄이 전후 외교의 주요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원자력 피해의 실상을 최대한 은폐해야 했다. 그것이 미국 정부의 과제였고 최소 30년간 이는 성공하는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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