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2005년에 인터뷰를 했습니다. 둘째가 젖먹이라 기자는 집으로 찾아왔고 인터뷰가 끝난 후 밥을 차려 같이 먹었습니다. 살아온 이야기를 털어놓은 후라 서로에게 어떤 신뢰 같은 게 쌓인 느낌이었어요. 그래서인지 기자가 말했습니다.
"저 게이예요."
"나는 레즈비언이고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나이 든 레즈비언을 만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바지 씨, 이묵을 만났다."
영화는 감독의 선언과도 같은 내레이션으로 시작합니다. 30대의 레즈비언 다큐멘터리 감독이 이묵 씨를 찾아간 건 그가 '나이 든 레즈비언', 바로 자신의 선배이기 때문이었겠지요. 1945년생 이묵 씨는 '레즈비언',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기 전 '바지 씨'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여자를 사랑하고, 또 떠나보내며 평생을 살아왔고 이제는 그 시간을 '돈복은 있지만 여자 복은 없었다'며 담담하게 회상하는 멋진 사람입니다. 작고 다부진 몸, 걸걸한 목소리, 그리고 선 고운 얼굴. 세상에는 남성 아니면 여성만이 존재한다고 믿는 이성애 중심주의 사회지만, 고향 마을에서 이묵은 그냥 그런 사람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이묵 씨를 받아들였던 이웃들이 제작진에게는 자꾸 여자인지 남자인지를 묻습니다. 젊은 날의 이묵이 수없이 받았을 그 질문 앞에서 제작진은 그저 빙그레 웃고, 이묵 씨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며 핀잔을 줍니다.
시골 마을에서는 호기심으로만 표출되었던 이성애 중심주의가 도시에서는 마녀사냥의 광풍이 되어 휘몰아칩니다. 학생 인권 조례 개정안 토론회장에서 무지개 조각을 든 사람들에게 퍼부어지는 욕설과 혐오 발언은 관객에게까지 모멸감을 줍니다. 더 절망스러운 건 "너 동성연애하니?"라는 질문을 취조하듯 던지는 사람이나, "조례안이 있으니까 애들 눈빛이 달라진다"며 비아냥대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나 평범하다는 사실입니다. 선하고 순해 보이는 얼굴, 딴 데서 만났으면 호감 어린 인사를 주고받았을 것만 같은 여성들이 혐오와 멸시의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 뜨거운 혐오 때문에 체할 것만 같은 한국의 참혹한 풍경은 잠시 멀어지고 일본이 등장합니다. 이영 감독은 "세상은 보호받을 사람과 보호받지 못할 사람으로 나뉘며 공존하기 힘든 곳이 되어 간다"라는 말과 함께 일본의 논과 텐을 만나러 갑니다. 논과 텐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커밍아웃을 결심하고 결혼식을 올린 레즈비언 커플입니다. 가족만이 국가에 신고해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영 감독이 일본까지 찾아간 이유는 평상시에도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성소수자들이 재난이라는 극단적 상황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고 합니다.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약물이나 여러 의료 지원이 필요한데, 재난 상황에서는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대피소 안에서 보호받을 수 없는 성소수자 커플들은 결국 대피소에 가지 않고 무너진 집에 남기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울한 상황임에도 논과 텐의 이야기는 위로가 됩니다. 국가가 자신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더 늦기 전에 살아 있는 연인을 힘껏 끌어안겠다고 세상 앞에 당당히 선언하며 나서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 이묵 씨는 도시의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고향에서의 이묵 씨는 가슴 가리개인 '말기'를 하지 않고 편안하게 지냈지만, 도시에 와서는 "이 동네는 먹을 때나 좋아하지, 눈치 있게 살아야 한다"면서 '말기'를 하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이묵 씨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을 것입니다. 장소에 따라서, 만나는 사람에 따라서 드러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면서 평생 그렇게 자신을 지켜 왔을 것입니다. 그 긴 시간의 끝에서 이묵 씨는 웃으며 말합니다.
"세상은 좋아졌는데 앞으로 더 많이 좋아졌으면 좋겠어."
영화의 마지막은 천둥 같은 북소리로 끝납니다. 퀴어 퍼레이드를 방해하기 위해 기묘한 옷을 차려입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광장을 점거한 채 미친 듯이 북을 칩니다. 그런데 그 광경이, 바로 이 혐오의 현장이, 이묵 씨가 살아온 시간보다 더 좋아진 거래요. 지금보다 더 나쁜 세상을 살아온 이묵 씨가, 이토록 당당하고 멋지게 살아가는 모습은 모두에게 힘을 줍니다. 그래서 '히스'라는 관객은 영화 게시판에 이런 메시지를 남겼더군요.
"이묵 '선배'의 존재를 발견해 준 감독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우리는 이 불온한 세상에서 퀴어로 살아남아, 퀴어로 늙어 갈 것이다."
저는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남아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늙어 가고 싶습니다.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에게 섬세한 인권 감수성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더 예리하고 더 섬세한 인권 감수성을 갖는 것을 소망하지만, 그리하여 인간이 어디까지 섬세해질 수 있을까? 그 끝에 가 보는 것이 소원이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잘 압니다. 낯선 순간들에 솔직해지고 부끄러움을 잊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8월의 영화로 <불온한 당신>을 추천합니다.
<불온한 당신>은 지난 7월 20일에 개봉하여 현재 극장에서 상영 중입니다.
(문의: 무브먼트 010-4615-2967, 010-671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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