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마감했습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가 잠시 휴식시간을 거쳐 힘차게 제4기 의 문을 엽니다. 서울학교 제4기는 앞으로 20강 내외의 답사를 통해 서울의 뿌리 깊은 사연의 현장을 샅샅이 훑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서울학교 제4기 제1강(전체로는 제58강)은 가을빛으로 서서히 물들어가는 도성 밖 으뜸 경치 성북동천을 찾아갑니다. 예부터 ‘자하문 밖’과 함께 도성 밖 경치 좋은 곳의 으뜸으로 꼽히던 단풍놀이 계곡, 성북동천(城北洞天) 일대를 한나절 마실 삼아 걸어봅니다.
10월 15일 일요일 아침 9시, 국민대 정문 앞(정문 왼쪽. 서울 성북구 정릉동 861-1(정릉로 77))에서 모여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잠깐! 서울학교 답사는 전과 같이 매월 둘째 주 일요일 열립니다. 이번 10월에 한해 추석 연휴 관계로 셋째 주에 열리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국민대학교정문앞-보토현-하늘마루-호경암-성북동천발원지-성북동천-삼청각-성곽걷기-북정마을-심우장-간송미술관-상허이태준가-선잠단지-점심식사 겸 뒤풀이-길상사-북악스카이웨이-흥천사-정릉-아리랑고개-성신여대역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 답사지인 <성북동천>에 대해 들어봅니다.
“백두산 정기를 북악까지 이어라”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그 산줄기를 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분수령에서 갈라져 서쪽으로 한북정맥(漢北正脈)으로 이어지고 삼각산 영봉(靈峰)에 이르러 정맥의 본줄기는 서쪽으로 향하여 노고산을 지나 장명산에서 서해로 숨어듭니다. 다른 한줄기는 남쪽으로 그 방향을 돌려 삼각산 즉 백운봉, 인수봉, 만경봉을 일구고 보현봉(普賢峰)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형제봉(兄弟峰)과 구준봉(狗蹲峰)을 지나 마침내 한양(漢陽)의 주산(主山)인 백악(白岳)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산줄기의 흐름을 풍수지리적으로는 내룡(來龍)이라고 합니다. 자연이 어우러져 형성된 기운(氣運)이 산줄기[龍]의 뻗침을 따라 전해져 온다고 생각하였던 우리 선조들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헌걸찬 정기(精氣)가 산줄기의 뻗음을 타고 한양의 주산인 백악으로 이어져 그 기운을 한양 도읍에 불어넣어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형제봉에서 북악까지 이어지는 산줄기가 한양도성으로 들어오는 들머리[入首]에 해당되는 보토현(補土峴)에서 크게 내려앉아 병목현상을 일으키고 있어 이에 대한 보완책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나라에서는 세검정에 있었던 총융청(摠戎廳)에 보토처(補土處)를 설치하고 특별한 날을 잡아 백성들을 동원하여 내려앉은 안부에 흙을 퍼다 날라 돋워줌으로써 산의 기운이 원활하게 이어져 전해지도록 하였는데 ‘흙을 보충한 고개’라는 뜻으로 이곳을 보토현(補土峴)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더욱 북돋워주어야 할 보토현 아래에는 북악터널이라는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으니 좋은 기운이 서울 장안까지 뻗어가기는 이젠 글렀나 봅니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은 인왕산(仁王山)의 살구꽃, 서대문 밖 서지(西池)의 연꽃, 동대문 밖 동지(東池)의 수양버들, 세검정 근처 탕춘대(蕩春臺)의 수석(水石), 그리고 성북동천의 복숭아꽃[北屯桃花] 구경을 으뜸으로 꼽았습니다.
아쉽게도 서지의 연꽃과 동지의 버드나무 그리고 탕춘대의 수석은 그 자취를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연못은 평지가 되고 계류(溪流)는 복개(覆蓋)되어 원형 복원이 어렵게 되었습니다만 인왕산과 북둔 일대는 지금도 찾는 이들이 있으니 이곳에다 살구나무와 복숭아나무를 심는 것을 서울시에서는 정책적으로 시행하여 옛 정취를 살려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도성 안의 수비는 3군문(三軍門)인 훈련도감(訓練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이 맡았고 도성 밖의 수비는 북쪽은 세검정에 있는 총융청이, 남쪽은 남한산성에 있는 수어청(守禦廳)이 맡았습니다. 총융청의 한 주둔지가 성북동천 상류에 있어 이곳을 북둔이라 하였으며 북둔 일대는 복숭아나무가 많아서 홍도동, 도화동, 복사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지금은 복숭아나무는 보이지 않고 그 명칭이나마 동명(洞名)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북동천 상류에 자리 잡은 삼청각(三淸閣)과 대원각(大苑閣)은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에 권력자와 기업 총수들이 서로 만나 정경유착(政經癒着)의 야합(野合)을 하던 요정(料亭)이었으나 삼청각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음식점과 예식장으로 변했고 대원각은 주인이 법정(法頂)스님에게 기부하여 지금은 길상사(吉祥寺)라는 멋진 도심 속의 사찰로 바뀌었습니다.
대원각의 소유주였던 김영한(1916∽99)은 16살 때, 조선권번(朝鮮券番)에서 궁중아악(宮中雅樂)과 춤과 노래를 가르친 금하(琴下) 하규일(河圭一)의 문하에 들어가 “깨끗하고 청정한 물은 잡스러운 내음을 풍기지 않는다”는 ‘진수무향(眞水無香)’에서 따온 진향(眞香)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월북시인 백석(白石 1912-95)과 사랑에 빠져 백석으로부터 중국 전설 속 여인의 이름인 자야(子夜)라는 아명(雅名)까지 받았으며 1953년에는 중앙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내 사랑 백석> 등의 책을 내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소유>라는 책을 통하여 알게 된 법정 스님에게 대원각을 기증하고 법정 스님으로부터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法名)을 받았는데 이런 연유로 김영한의 법명을 따서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기생 진향이로, 백석의 연인 자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가진 것을 모두 보시하고 육신은 화장하여 길상사 뒤편 언덕에 산골(散骨)하였으니 그야말로 정신적인 스승, 법정 스님의 가르침인 ‘무소유’를 철저히 실천한 것 같습니다.
길상사는 본래 요정이었기에 가람배치가 전통사찰과는 사뭇 다릅니다. 기존의 건물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입구에 식당을 겸한 편의시설만 새롭게 지었습니다. 대원각의 본채는 지금 길상사의 금당에 해당하는 극락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사찰 마당 한 모퉁이에 세워진 성모마리아 닮은 보살상도 눈여겨 볼만한 조각품입니다.
심우장에서 읽는 <오도송>
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인 맞은편 언덕에는 승려시인이면서 독립지사인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말년을 보낸 심우장(尋牛莊)이 조촐하나마 의기(義氣)가 서린 아담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만해는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창덕궁 옆에 있는 작은 한옥에서 기거하면서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간행하며 3.1만세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하였으나 노년에는 1933년 금어(金漁) 김벽산(金碧山) 스님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방응모(方應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으로 지어진 성북동천에 있는 심우장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토록 갈망하던 해방을 1년여 앞둔 1944년 5월 9일, 마당에 내린 눈을 빗자루로 쓸다가 쓰러져 입적하였는데 동지들이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공동묘지에 안장하였고 이후 부인 유숙원도 그 옆에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며, 심우장 현판은 만해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吳世昌)이 쓴 것입니다.
심우장에 걸려 있는 만해의 <오도송(悟道頌)>은 그 내용이 거침없는 그의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아도처시고향(男兒到處是故鄕) 장부는 가는 곳마다 고향이거늘
기인장재객수중(幾人長在客愁中) 사람들은 시름 속의 나그네로 오래도록 보내네.
일성갈파삼천계(一聲喝破三千界) 한소리 큰 할로 삼천 대천세계를 깨뜨리니
설리도화편편비(雪裏桃花片片飛) 눈 속 복사꽃잎이 펄펄 날리네.
그리고 성북동천이 한양도성의 바깥쪽을 휘감고 돌아가는 곳에 있는 선잠단지(先蠶壇址)는 누에의 먹이인 뽕나무를 많이 생산하기 위해 잠신(蠶神)인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왕비(王妃)가 친히 행차하여 양잠(養蠶)의 시범을 보여주던 곳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풍요로운 먹을거리[食]와 입을거리[衣]를 얻기 위해 백성들에게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을 권장하는 행사에 왕과 왕비가 직접 나서서 모범을 보였습니다.
왕은 전농동(典農洞)에 있는 선농단(先農壇)에서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는 친경행사(親耕行事)를, 왕비는 성북동천 아래에 있는 선잠단(先蠶壇)에서 누에치는 시범을 보이는 친잠행사(親蠶行事)를 주관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노동력이 늘어날 것이고 늘어난 노동력만큼 생산도 많아져 백성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풍요롭게 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선잠단 사이로 난 골목 안쪽에 있는 성락원(城樂園)은 철종(哲宗)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별궁으로 사용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락원은 자연적 지형을 잘 이용한 별장으로 생활(生活), 수학(修學), 수양(修養)의 기능을 하는 앞뜰과 후원(後園)의 역할을 하는 뒤뜰로 구성되어 있으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비롯한 행서체(行書體)의 좋은 글씨가 바위에 많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사유지로서 일반인의 관람이 불가능하여 전해지고 있는 낡은 사진으로만 그 일면을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만 최근 성락원을 문화재로 지정하여 일반인의 관람을 가능케 하기 위하여 성북구청과 소유주간에 논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복개되어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지만 성북동천에 놓여 있었던 쌍다리를 지나서 만나게 되는 간송미술관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 전 재산을 투척하여 건립한 사설 미술관으로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전형필 선생은 종로에서 아흔아홉 칸의 대부호의 집에서 태어나 휘문고와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문화재가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재를 털어 미술품과 문화재의 수집과 보존에 평생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설립하여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석탑, 석불, 탱화 등의 문화재를 수집 보존하는데 힘썼습니다.
1966년에 보화각을 그의 호를 따서 간송미술관으로 개명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문화재의 보호를 위해 매년 5월과 10월 두 차례만 특별전시를 하고 있습니다만 전시를 하는 공간인 보화각이 너무 비좁아서 한정된 작품만 볼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최근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프라자에서 많은 문화재를 번갈아 가며 전시하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에는 국보 70호인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原本)을 비롯한 국보 12점, 보물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그리고 겸재(謙齋) 정선(鄭善),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의 작품 등 5천여 점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태준 고택과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
월북 작가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의 고택은 1933년에 지어진 대지 약 120평, 건평 약 23.2평 규모로 좌향은 서남향이고 별채 없이 사랑채와 안채를 결합한 본채로만 이루어져 있는 개량한옥입니다. 그가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 당호(堂號)를 짓고 1933년부터 1946년까지 거주하면서 단편 <달밤> <돌다리>, 중편 <코스모스 피는 정원>, 장편 <황진이> <왕자 호동> 등 창작에 전념한 곳입니다.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 출생으로 1921년 휘문고보(徽文高普)를 졸업하고, 1927년 11월 일본 상지대학(上智大學)을 중퇴하고 귀국하여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33년 박태윤·이효석 등과 함께 구인회(九人會)를 조직하여 동인활동을 통해 계속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처럼 이태준은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선구자로서 소설가였지만 <문장강화(文章講話)>라는 문학개론서를 내놓기도 하였으며 1946년 6월경 월북하여, 1953년 임화(林和), 김남천(金南天) 등과 함께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복개되어 자동차 도로로 변했지만 예전에는 복숭아꽃이 만발하였던 성북동천에 기대고 있는 마을들은 물줄기를 경계로 남쪽과 북쪽이 매우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양도성 밖 북쪽 성벽에 기대고 북향을 하고 사는 남쪽마을은 서민들의 삶이 물씬 풍기는 60, 70년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반면에, 구준봉(狗蹲峰) 아래 양지바른 언덕에 둥지를 틀고 남향을 하고 사는 북쪽마을은 재벌 회장들의 대저택이 들어섰었는데, 그 재벌들이 목멱산(木覓山) 남쪽 기슭인 보광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지금은 외국대사(外國大使)들의 저택으로 바뀌었고 그래서 가까운 곳에 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을 위한 외교타운도 세워져 있습니다.
70년대 당시 소위 ‘도둑촌’이라 불렸던 이곳에 재벌 회장집들이 들어설 때 현지 주민들의 내몰리는 모습을 비둘기에 빗대어 노래한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는 그때의 광경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최근에는 뉴타운 개발로 쫓겨나는 서민들의 신산한 삶으로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성북동 산에 번지(番地)가 새로 생기면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중략-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다행히도 심우장 위에 있는 북정마을은 개발에 내몰리지 않고 예스러움을 간직한 채 지자체의 지원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성북동천은 북악에서 낙산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줄기의 북쪽 사면과 구준봉에서 동쪽으로 미아리고개 지나 고려대 뒷산인 개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북쪽 사면 사이를 흐르는 물줄기이므로 성북동천을 지나 북쪽인 정릉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북악스카이웨이’라 부르는 구준봉에서 개운산에 이르는 산줄기를 넘어야만 합니다.
아리랑고개에서 만나는 나운규
지금은 외교관거리로 변한 성북동 골목을 지나 북악스카이웨이에 올라서 배나무과수원이 늘어서 있었던 국민대학 건너편 배밭골을 왼쪽에 두고 산줄기를 타고 조금 걸어가면 아리랑고개 못 미쳐 산기슭에 정릉(貞陵)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이자 조선왕조 최초의 왕비였던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으로, 본래 경운궁(慶運宮) 서쪽, 지금의 주한미국대사관저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도 그때의 석물(石物) 일부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태조의 신덕왕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으면 그의 묘를 사대문 안에 두고 그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인 흥천사(興天寺)를 지금의 서울시의회(과거 국회의사당)쯤에 170여 칸 규모로 지었을까요.
그러나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들과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등 개국공신들을 참살(慘殺)하고 왕위에 오른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은 분묘(墳墓)는 지금의 이곳 정릉으로 이장시키고 정자각(丁字閣)은 헐어버려 그 목재와 석재를 가까이에 있는 중국 사신이 머무는 북평관(北平館)의 북루(北樓)를 짓는데 썼으며 신장상(神將像)이 새겨진 병풍석(屛風石)은 홍수로 떠내려간 광통교(廣通橋)를 돌다리로 다시 놓는데 쓰게 하였습니다.
그 병풍석은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지하에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훤히 그 모습을 드러내 지금은 청계천 광통교 밑에 가면 언제라도 볼 수가 있습니다.
큰 규모로 지어진 흥천사도 정릉의 이전에 따라 아리랑고개 초입에 작은 규모로 옮겨져 새로 지은 흥천사라는 의미로 신흥사(新興寺)로 거듭나 이 일대가 한때는 회갑잔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였으나, 최근에 사찰을 확대 정비하면서 본래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았습니다.
아리랑고개는 정릉으로 가기 위해서는 넘어야만 하는 고개이기에 본래 정릉고개로 불렸는데, 일제강점기에 항일의 내용을 담은 영화, 나운규(羅雲奎) 감독의 <아리랑>을 이곳에서 촬영함으로써 그때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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