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최초로 '아메리칸 아마겟돈'의 공포에 휩싸인 때는 1950년대 후반이었다.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한 소련이 50년대 후반 들어 미국보다 먼저 ICBM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후반, 이번에는 중국이 미국의 문을 노크했다. 원자폭탄, 수소폭탄에 이어 ICBM 발사에도 성공한 것이다. 미국의 적대국 가운데에는 두 번째였다.
당시 미국이 '중국위협론'에 대응한 방식은 오늘날 북핵 대처 방식과도 너무나도 닮은꼴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핵미사일 보유를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위협"으로 간주하면서 다양한 대책을 쏟아냈다. 중국이 핵클럽의 문턱을 넘기 전에 선제공격을 가해야 한다는 주장부터 소련에 압박을 가해 중국의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시켜야 한다는 주문까지 다양한 대책이 쏟아졌다.
실제로 미국은 소련에 특사를 보내 중국의 핵미사일 개발 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이 우리말을 들을 것 같소?"라는 핀잔만 듣고 발길을 돌렸다. 당시 미국의 중소관계에 대한 무지가 오늘날 미국의 북중관계에 대한 무지나 무시로 재현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미국은 소련을 통한 중국 핵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고는 중국을 "깡패국가"라고 부르면서 미사일 방어체제(MD)로 맞서겠다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그 이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미국이 '죽의 장막'이자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위협'이며 '깡패국가'라고 불렀던 중국과 전격적인 관계 정상화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는 베트남 전쟁의 "명예로운 종식"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핵미사일 개발을 지시하면서 "우리가 힘을 가져야 적대국이 우리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의 후임자들은 "마오쩌둥의 '양탄일성'(兩彈一星,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 및 ICBM을 의미함) 덕분에 중국이 안보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찬양해왔다. 나라 이름만 바꾸면 오늘날 북한의 화법과 너무나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중국은 최소 억제를 핵 독트린으로 삼았다. 이는 두 축으로 이뤄져 있다. 하나는 핵무기 보유량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핵무기 선제 불사용(No First Use) 정책이다. 중국의 현재 핵무기 보유량은 미국의 30분의 1 정도이고 핵탄두도 미사일에서 분리해놓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핵보유국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선택해 얻은 전략적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미국이 중국에 대한 적대 정책을 지속했다면, 중국의 핵 독트린 양상도 바뀌었을 공산이 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의 최소 억제 독트린의 봉인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이 사드를 비롯한 MD 강화에 박차를 가하자 중국도 러시아와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 전략 무기 능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중국 내에서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북한 얘기로 돌아와 보자. 북한은 ICBM 시험 발사 직후 "정밀화하고 다종화한 우리의 자위적 핵 무장력은 세계 정치 지형에 커다란 지각변동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게 과대망상만은 아니다.
미국은 북한의 ICBM 발사 책임을 중국에 돌리면서 '북한과의 경제 관계를 끊던지,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을 각오하던지 양자택일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왜 북한한테 뺨 맞고 우리한테 화풀이하냐'라고 응수하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런 양상은 미러 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자칫 북핵 대처를 놓고 강대국간의 무역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해주는 대목이다.
이보다 더 현실화될 위험이 큰 "커다란 지각변동"도 있다. 한미 양국은 북한의 ICBM 발사에 대한 대응 조치로 사드 배치를 가속화하기로 했다. 그러자 중국과 러시아는 "한반도 안정과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을 침해한다"며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은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사드를 겨냥해 무인 공격기와 미사일 시험을 선보였다. 심지어 미국 내에서 군사 옵션이 거론되자 시진핑은 "영웅적인 인민군대는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승리해 나라의 위상과 군의 위엄을 떨쳤다"고 맞받아치기도 했다.
"커다란 지각변동"의 핵심에는 '북핵과 사드의 적대적 동반 성장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 것인가'에 있다. 북핵이 고도화될수록 한미는 사드 배치를 가속화하는 것으로 대응해왔고, 앞으로도 이럴 공산이 커 보인다. 이는 곧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우려를 자극해 이들 나라의 전략적 결속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세기 전에 미국은 유라시아의 거대한 두 나라의 관계를 떼어놓음으로써 세계 패권을 유지·강화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오늘날 사드 배치를 비롯한 미국의 북핵에 대한 대처 방안이 유라시아의 두 대국으로 하여금 더욱 굳건하게 손을 잡게 만들려고 한다. 만약 이러한 악순환이 확대 재생산된다면 중러관계는 사실상의 동맹으로 가게 되고 그 파장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북한의 주장이 과대망상만은 아닌 까닭이다.
북한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조선반도 평화 보장의 조건과 가능성도, 평화협정 체결의 환경도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을 괴롭더라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를 인정하는 미국 내 유력 인사들이 있다. 윌리엄 페리 전 국방 장관,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 국장,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 장관 등이 북한의 제한적인 핵보유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북핵 동결과 평화협정 체결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도 8월 2일 자 사설에서 이러한 협상을 타진하기 위해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평양에 보내야 한다는 요구도 내놨다.
미국은 북핵 '해결'보다는 '이용' 쪽에 더 큰 관심을 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위협론'을 이용해 한국에 대한 무기 판매를 늘리고 MD를 비롯한 전략 무기를 증강하며 중국을 견제하는 데에 주력해왔다. 그런데 여기에는 대전제가 있었다. 북한이 핵탄두를 장착한 ICBM 보유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북한이 그 문턱 위에 올라서서 미국에 외치고 있다. '우리의 핵 능력 강화를 감수하던지, 평화협정을 체결하던지 양자택일하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반세기 만에 낯선 경험에 봉착한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뤄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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