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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제압한 섬 압해도와 목포 민어 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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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바다를 제압한 섬 압해도와 목포 민어 맛기행

2017년 9월 섬학교는 <압해도> <가란도> <목포>

강의 마감됐습니다^^

초가을 기운이 가득한 9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3강은 다도해의 해상왕국 압해도로 갑니다. 또 작은 섬의 정취를 만끽하며 느릿느릿 걸을 수 있는 가란도를 걷습니다. 목포에서는 목포의 별미 민어요리를 맛보게 됩니다.

바다를 제압한 섬. 신안의 섬 압해도(押海島)의 이름이 가진 뜻입니다. 지금은 목포와 다리로 연결된 소읍에 불과한 섬이지만 압해도는 고려의 왕건과 궁예에 대적할 정도로 강력한 해상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 고려 말에는 세계 최강의 몽고군이 압해도를 점령하려다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퇴각했는데 몽골군에 대적한 이들은 고려 군사가 아니라 바로 압해도 주민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강력한 해상세력이 살았다는 증거지요.

또 압해도와 인도교로 연결된 작은 섬 가란도가 있습니다. 섬 마을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섬의 초가을 정취도 느끼다 올 예정입니다. 목포에서는 목포의 별미 민어요리도 맛보게 됩니다. 삼복염천 복달임에는 “민어탕이 일품, 보신탕이 하품”이라지만 한 여름의 민어는 너무 고가라 도대체 맛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복이 지나면 민어 가격이 많이 떨어집니다. 9월 섬학교에서는 민어요리도 푸짐하게 맛볼 수 있습니다. 초가을 섬들과 목포 맛기행에 초대합니다.

▲압해도 지주식 김 양식장에 물드는 아침노을Ⓒ섬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 답사지인 <압해도> <가란도> <목포>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이보다 더 큰 이름을 지닌 섬이 있을까

압해도(押海島). 바다를 제압한 섬. 이 나라 섬들 중 이보다 더 큰 이름을 지닌 섬이 또 있을까. 지금은 인구 6천의 소읍인 이 섬이 한때는 바다를 제압하는 섬이었다! 이름은 그저 비유나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한때 압해도가 서남해 해상세력의 근거지였기에 부여된 이름이다. 그 해상세력의 중심에 있는 이가 바로 능창 장군이었다. 후삼국시대 궁예, 왕건과 맞섰던 서남해 해상세력의 수장 능창 장군. 능창은 장보고 암살 후 반세기만에 압해도를 기반으로 서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왕건의 둘째 부인인 장화왕후의 아버지 나주 호족 다련군 오씨 등 서남해 해상세력들 대부분이 왕건에게 투항할 때 마지막까지 왕건에게 저항했던 이들이 능창의 해상세력이었다. <고려사절요>에 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압해현 도적의 우두머리 능창은 섬 출신으로 수전에 능하여 수달(水獺)이라고 불렸다...태조(왕건)가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서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도적의 무리가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승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왕건도 능창과 정면 승부를 피하고 결국 간계를 써서 능창을 포로로 잡았다.

궁예 또한 “해적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느냐”며 큰 소리 쳤다. 능창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았지만 왕건과 궁예에 맞설 정도였다면 능창이 강력한 해상군사집단의 리더였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다. ‘바다를 평정한 섬’이란 뜻의 압해도(壓海島)란 이름 또한 능창의 해상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압해도에는 바다를 제압했던 섬이란 이름 못지않게 압해도를 상징하는 공간이 하나 더 있다. 정승동. 수많은 정승들을 배출한 땅이라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정승동은 신안군 압해도 가룡리에 있는 압해정씨(丁氏) 도선산(시조묘) 일대를 이르는 별칭이다. 정승동의 주인은 정승 출신의 압해정씨 시조 정덕성과 그의 자손들이다. 시조묘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기념식수한 나무들이 호위병처럼 도열해 있고 그 앞에는 후손들의 관직 명패가 줄줄이 서 있다.

국회의장 정세균, 국무총리 정일권, 통일부장관 정세현...전현직 고관 대작들이 수두룩하다. 시조인 정덕성 또한 중국 당나라 때 대승상을 지냈다. 정덕성은 당나라 선종(宣宗) 때 군국사(軍國事)로 바른 말을 간언하다 853년 압해도에 유배되어 왔는데 그 후 사면되었지만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여 정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전한다. 압해정씨는 작은 섬을 본으로 둔 한국의 유일한 성씨다. 과거 은성했던 시절 압해도의 영향력을 짐작케 하는 역사다.

▲압해도 정승동, 압해정씨 도선산 사당Ⓒ섬학교

압해도는 48.95㎢, 해안선 길이 217㎞. 인구 5,900여 명이 살고 있는데 최고점은 송공산(230m)이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섬답게 압해도에는 선사유적들을 비롯한 많은 유물들이 남아있다. 대천리 조개무지와 목교리 등 섬 곳곳에 분포한 40여 기나 되는 고인돌. 또 동서리 도창마을에는 대형 선돌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선돌은 높이 4.5m, 둘레 3m나 되는데 송장수지팡이라고도 불린다. 옛날에 송장군 휘하의 부하 병사가 군사훈련 중에 죽자 석관에 그 시신과 무기를 넣어 안치한 후 그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선돌을 세운 것이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복룡리 해변에는 원시 어로의 유물인 독살도 남아있다.

압해도에 남은 또 하나의 소중한 유적은 송공산성이다. 삼한시대 이전에 축조한 산성지라 전해지니 성의 역사가 유구하다. 초기 백제의 주요 거점이었던 풍납토성에 견줄만한 규모이니 압해도 해상세력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산성은 높이 4.8m, 너비 10m, 길이가 2.5㎞에 이른다. 고려 말 몽고군이 70여 척의 함대로 고려의 바닷길을 차단하기 위해서 압해도를 총공격한 적이 있었다. <고려사절요>에는 이때 압해도 사람들이 대포를 장착한 전함과 송공산성 등에 대포를 설치해 몽고군과 맞서 몽고군을 후퇴시켰다고 전해진다.

압해도는 2008년 6월 목포와 다리로 연결되어 더 이상 섬 아닌 섬이 되었다. 압해도가 연륙되면서 목포에 있던 신안군청도 압해도로 옮겨갔다. 바다를 제압하던 섬이 이제는 내륙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다리가 놓아졌다고 섬에 대단한 혜택이 돌아간 것도 없다. 교통의 편리함이야 얻었지만 그 대신 섬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잃었다. 연륙 후 군청을 비롯한 행정관청이 입주하며 인구 증가를 기대했으나 인구는 오히려 줄었고 압해도 고유의 상권도 죽었다. 다리는 압해도의 인구와 부를 목포로 유출시키는 통로가 돼버렸다.

다리 건설로 압해도는 결국 내륙 해안가의 흔한 변두리 중 하나가 된 것이다. 2,000억 원의 공사비를 압해도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섬에 다리가 만능은 아니다. 지금도 수많은 섬들을 잇는 다리공사들이 진행 중이다. 지자체나 정부에서는 장밋빛 청사진을 제시하지만 다리가 놓아졌다고 섬의 미래가 밝을까. 낙후되고 버려진 내륙 해안가 마을들을 보면 그 답이 보이지 않겠는가. 무조건 다리를 놓는 것이 섬의 미래에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그 예산을 섬과 육지를 편리하고 안전하게 오갈 수 있는 전천후 여객선을 도입하고, 야간 운항이 가능하게 해주고, 섬 주민들의 소득과 복지 향상에 투자한다면 어떨까. 섬의 고유성을 지키면서 교통 불편도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섬을 위한 일이 아니겠는가.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란도 마을길Ⓒ섬학교

가난도에서 가란도가 된 섬

가란도는 압해도와 인도교로 연결된 섬이다. 면적 1.612㎢, 해안선 길이 6.5km의 작은 섬에 120여 명의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간다. 섬의 가장 높은 곳이 74.5m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비교적 완만한 경사의 구릉과 평지다. 갯벌이 광활하게 발달되어 있어 갯벌에서 나는 산출이 크다. 인도교가 있지만 섬 남단의 분배나루에서는 여객선이 다닌다. 주민들은 인도교나 여객선을 통해 압해도와 목포를 오간다.

가란도(佳蘭島)란 이름의 유래는 애틋하다. 본래 가난한 섬이라서 가난도라고 불리다가 가란도(佳蘭島)로 개칭하였다고 전해진다. 가난이 저주스러웠던 섬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길 소망하며 자연산 난(蘭)이 많이 자생하는 가란도라고 스토리텔링을 했던 것일까. 가난했던 가란도는 한 때 부자섬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1971년부터 시작한 지주식 김양식 덕분이었다. 지금은 김양식이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낙지잡이와 감태, 굴 등이 주 수입원이 됐다.

▲가란도 갯벌Ⓒ섬학교

민어탕은 일품, 보신탕은 하품

민어(民魚)는 농어목 민어과 민어속의 난류성 어류다. 민어는 개펄 바다에서 산다. 낮에는 깊은 바다 속에 있다가 밤이면 수면으로 이동하는 습성이 있다. 새우류를 특히 좋아한다. 새우어장으로도 유명했던 덕적바다에 민어가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야 워낙 귀한 고급 어종이 됐지만 민어는 이름처럼 옛날에는 백성들이 즐겨먹던 물고기다. 민어 중에서도 여름에 잡히는 것이 가장 기름지고 맛있다. 민어는 지역이나 그 크기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이었다. 전남지방에서는 가장 큰 민어를 개우치라 했고 법성포에서는 30㎝ 내외를 홍치, 완도에서는 작은 것을 불퉁거리라 불렀다. 서울이나 인천에서는 두 뼘 미만의 것을 보굴치, 세 뼘 내외는 어스레기, 네 뼘 이상만을 민어라 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는 민어를 면어(鮸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민어(民魚)라 한다 했다. <자산어보>에는 민어의 특징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큰 놈은 길이가 4~5척에 달한다. 몸은 약간 둥글고 빛깔은 황백색이며 등은 청흑색이다. 비늘과 입이 크고 맛은 담담하면서도 달아서 날 것으로 먹으나 익혀 먹으나 다 좋고 말린 것은 더욱 몸에 좋다. 부레는 아교를 만든다.
(<자산어보> 중에서)

민어는 제사상이나 잔칫상에 가장 많이 오르던 물고기였다. 회나 탕, 구이뿐만 아니라 포, 알포, 알젓으로도 명성이 높았다. <자산어보>의 기록처럼 지방이 적고 단백질 함량이 많아서 맛이 담백하다. 서울, 경기지방에서는 복날 민어탕으로 복달임을 했던 전통이 있었다. 복달임에 민어탕은 일품, 도미찜은 이품, 보신탕은 하품으로 쳤다. 민어는 쓸개를 빼고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민어는 머릿살과 껍질의 맛이 특히 뛰어난데 껍질은 데치거나 날로 먹기도 한다. 민어껍질의 뛰어난 맛은 “민어껍질에 밥 싸먹다 논밭 다 팔았다”는 식담을 만들기도 했다.

옛날 민어 부레는 부레풀을 만드는 재료로 썼다. 지금 남아있는 고가구들은 대부분 민어풀을 접착제로 해서 만들어졌다. 부레는 속에 소를 채워 순대로 만들어 먹기도 했다. 또 부레는 생으로 먹거나 약재로도 이용됐다. 참조기와는 달리 산란철 민어는 알이 찬 암컷보다 수컷을 더 귀하게 친다. 알이 꽉 찬 암컷은 알이 워낙 커서 살이 적고 살 속의 기름기가 빠져 맛이 없다. 하지만 알이 밸락말락 할 무렵에는 암컷의 맛이 최고다. 수컷보다 찰진 맛이 더 깊고 달다.

민어는 대부분 잡히는 대로 피를 빼서 얼음에 저장한 뒤 선어로 먹는다. 민어는 얼리면 민어 특유의 맛이 사라지기 때문에 생물로 먹는 것이 좋다. 민어는 활어보다 선어가 맛이 뛰어나다. 대체로 어류의 맛은 아미노산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어류는 사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 강직도가 떨어졌을 때 아미노산의 양이 가장 많다. 이때가 가장 맛이 좋다. 활어는 바로 잡으면 사후 강직 탓에 맛이 덜하다.

민어는 조기처럼 군단으로 몰려다닌다. 한창 민어가 많이 나던 시절에는 민어떼가 몰려들면 “뻘건 민어의 등이 물에 비쳐서 바다가 온통 뻘갰다”고 한다. 민어는 개구리처럼 우는데 “톱을 갖춰서(떼로 함께) 왁왁왁 울어대니 귀가 아프고 민어소리 때문에 시끄러워서 낮에는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민어의 울음은 산란철에 암수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다. 어부들에게 민어는 성질이 순한 물고기로 알려져 있다. 다른 물고기들은 그물을 걷어 올리면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고 튀어 오르는데 민어는 체념한 듯 가만히 있다. 그래서 어부들은 그런 민어가 "순하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은 민어의 성질이 순해서가 아니다. 부레는 공기의 양을 조절해 부력을 유지하는 기관이다. 다른 어류에 비해 부레가 큰 민어는 그물에 걸리면 부레에 바람이 가득 차 다시 바다 밑으로 내려가지 못한다. 민어가 그물에 많이 걸리면 그물째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부레에 바람이 차서 못 움직이는 것을 민어가 성질이 온순하다고 한 것이다. 바늘로 가스를 빼주면 민어는 활기차게 바다로 도망쳐버린다.

예부터 이름난 여름 민어 어장은 신안의 임자도 앞의 타리도(태이도)와 재원도, 인천의 덕적도, 평안도 신도 바다였다.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1908)에 과거 한국 바다의 민어에 대한 기록이 있다. “민어는 서남해에 많고 동해에 이름에 따라 점차 감소하여 강원·함경도 연해에 이르러서는 거의 볼 수 없다.” 현재는 다른 어장들은 더 이상 여름 민어가 잡히지 않고 임자도 어장에서만 잡힌다. 목포나 인천, 서울 등지로 가는 여름 민어들도 모두 임자도 어장에서 난 것들이다. 이 민어야 말로 진정한 민어라 할만하다.

▲일본영사관이었다가 나중에는 목포시청 청사로도 쓰였던 목포근대역사관Ⓒ섬학교

섬학교 제63강 9월의 섬학교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2일(토요일)

08:00 서울 출발(아침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3강 여는 모임
-점심식사(목포에서 남도식백반)
-가란도 마을 둘레길 걷기(5km)
-압해도 정승동 탐방
-저녁식사 겸 뒤풀이(민어회와 탕 그리고 각종 해산물의 향연)
-휴식 및 취침(다인실)

9월3일(일요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장어탕)
-목포 구도심 걷기(4km)
섬센터-영사부건물(목포근대역사관1관)-성옥미술관-경동성당-보리마당-조선내화옛공장
-국립해양유물전시관 관람
-갓바위 탐방
-점심식사(생선구이백반)
-목포 어판장 장보기
15:00 서울 향발. 제63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9월의 섬학교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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