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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강우석 감독은 탈근대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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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강우석 감독은 탈근대인인가?

[장시기의 '영화로 읽는 세상']만화 <이끼>와 영화 <이끼>

I. 근대적 장소와 탈근대적 공간

영화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사유하도록 만든다. 영화의 텅 비어 있는 스크린의 공간은 카메라의 눈을 통하여 시와 소설뿐만 음악과 미술, 그리고 건축과 만화를 모두 흡수한다. 영화가 만드는 모든 예술 장르들의 혼합을 통하여 영화 관객들은 스크린에 펼쳐지는 공간의 이미지들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어떤 장소로 변화되는지 사유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적 사유의 가장 큰 첫 발자국은 영화의 스크린에 등장하는 장소들의 지도를 그리면서 시작한다. 지리적인 지도를 인식적인 지도로 이동시키는 것이 곧 사유하는 것이다. 인터넷 웹툰 만화로 인터넷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윤태호의 만화, <이끼>는 경상도 농촌의 한 작은 마을에 관한 지리적인 지도를 인식적인 지도로 전환하는 이야기이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이끼>로 인하여 우리는 그 지도를 더욱 더 상세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 지도는 마을에서 읍면으로, 그리고 소도시에서 대구와 부산, 그리고 광주와 대전을 비롯하여 마침내 서울까지 다다르는 대한민국 전체의 근대적 지도그리기이다.

ⓒ영화 <이끼>
그러나 마을과 읍면, 그리고 소도시와 대도시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전체의 근대적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영화, <이끼>에 등장하는 김덕천(유해진 분)과 전석만(김상호 분), 그리고 하성규(김준배 분)는 지도를 그리지 않는다. 그들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냥 산다. 그들이 만약 자신들이 살게 될 마을의 지도를 그리면서 형사 출신의 천용덕(정재영 분)이 아니라 유목형(허준호 분)을 이장으로 선출하여 새롭게 마을을 가꾸었다면 그들의 삶은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운 영혼을 가꾸는 삶이 되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마을, 읍면과 소도시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들은 그런 삶의 가능성들로 넘쳐흐른다. 그 가능성들을 파괴성과 폭력성으로 바꾼 사람들이 바로 천용덕과 같이 근대 식민지 권력을 가지고 마을을 자신의 자본에 대한 욕망의 도구로 삼은 사람들이다. 일제 식민지와 미군정과 한국전쟁, 그리고 오늘날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베트남 파병으로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대부분 마을들의 근대적인 부와 권력은 이러한 근대 식민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였다.

근대 식민지 권력의 도구로 전락한 마을과 도시에서 근대적 지도를 그리는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이장 천용덕처럼 지도를 그릴 수 있는 인식의 지식을 지배의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목형과 같이 일제식민지에서, 미군정 치하에서, 한국전쟁에서, 베트남 파병에서, 혹은 광주 민주항쟁에서 근대적 마을과 도시의 파괴성과 폭력성을 인식하고 그러한 근대적 마을과 도시라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장소들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탈근대적 마을과 도시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19세기 구한말부터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 이전까지는 유목형과 같은 사람들이 항상 이전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천용덕과 같은 사람들에게 패배하는 근대의 역사였다. 그 패배의 역사 속에서 마을과 도시를 구성하는 우리 자신들, 즉 김덕천(유해진 분)과 천석만(김상호 분), 그리고 하성규(김준배 분)와 이영지(유선 분)는 파괴성과 폭력성의 부스러기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자본과 권력을 가지고 대한민국의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근대적 장소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II. 탈근대인의 탄생

ⓒ영화 <이끼>
이장 천용덕의 근대적 자본과 권력에 대한 욕망의 지도그리기와 그러한 권력과 폭력을 아무런 반성 없이 추종하는 김덕천과 천석만, 그리고 하성규의 근대 식민지성은 항상 자기 파괴성과 폭력성으로 종결된다. 이와는 달리 유목형이 지니는 삶의 근원적 욕망의 생산성과 마을과 도시의 상호관계가 지니는 창조성을 추구하는 생산적 욕망의 지도그리기는 대한민국의 근대적 파괴와 폭력의 장소들을 탈근대적 생산의 공간들로 재구성한다. 이들이 바로 윤태호의 만화와 강우석의 영화, <이끼>에 등장하는 이영지와 유해국(박해일 분), 그리고 박민욱(유준상 분) 검사이다. 전석만과 하성규는 차치하고라도 김덕천과 이영지의 차이는 바로 자신들 스스로가 천용덕이 만든 근대적 마을의 지도를 그리느냐 아니냐의 차이이다. 김덕천은 근대적 마을의 지도그리기의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에 베트남 파병이나 이라크 혹은 아프가니스탄 파병과 같은 근대적 개죽음을 당하지만, 근대적 마을의 지도그리기의 능력을 습득한 이영지는 근대적 마을의 장소를 탈근대적 마을의 공간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영지가 탈근대인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계기는 유목형이 베트남 전쟁을 통하여 스스로 터득한 "나를 구원하는 자는 (신이나 목사가 아니라, 교회나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더더욱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라는 역설적인 근대적 기독교의 깨달음을 그녀도 스스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박민욱 검사도 마찬가지이다. 우연히도 유해국이라는 특이한 인간을 만나서 "검사"라는 근대적 권력의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습관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힘으로 승화시키는 박민욱 검사의 탈근대적 재탄생은 근대적 가족주의와 국가주의에서 스스로 탈영토화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살듯이 우리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근대인이 되느냐, 아니면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탈근대인이 되느냐의 조건은 근대적 과거가 무엇이든지간에 "지금 바로 여기"에서 스스로 "나를 구원하는 자는 (신이나 목사가 아니라, 교회나 가족이나 국가가 아니라, 더더욱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라는 깨달음을 얻느냐 못 얻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이영지와 박민욱 검사와는 달리 유해국은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다. 유해국이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근대적 국가구조를 깨트렸던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 이후에 청소년기와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하는 유해국과 같은 이 시대의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근원적으로 탈근대인들이다. 유형목과 같은 1987년 이전의 기나긴 민주화 투쟁의 인물들이 1987년 민주화 항쟁의 승리를 계기로 유해국과 같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탈근대인들을 탄생시킨 것이다. 따라서 윤태호 작가의 만화 독자들과 강우석 감독의 영화 관객들은 유해국이나 이영지, 혹은 탈근대적 깨달음 이후의 박민욱 검사와는 달리 "나는 누구누구의 아들(혹은 딸)이다, 나는 이러저러한 교회의 교인이다, 혹은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라는 자본과 권력에 대한 욕망의 인식이 우리를 근대인으로 만드는 조건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 이장 천용덕과 그의 아들, 혹은 마을사람들의 관계처럼 나와 나의 아버지, 나와 그(혹은 그녀),나와 학교, 나와 의사, 혹은 나와 대한민국의 관계는 상호생성적인가, 아니면 파괴적인가?

그러나 아무리 근원적으로 탈근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경상도 산골의 아주 조그마한 마을처럼 아직도 여전히 근대적 장소들이 대한민국의 마을들, 읍면, 학교, 회사, 교회, 그리고 소도시와 대도시들이 존재하고 있는 곳에서 내 삶의 터전을 탈근대적 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결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서울에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살았던 경상도의 조그마한 산골 마을에서 유해국의 탈근대적 삶을 방해하는 것은 아직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근대적 장소들의 폭력성과 파괴성이다. 이러한 폭력성과 파괴성을 생산성과 창조성으로 바꾸는 것은 "나는 나 자신이다"라고 사유하는 수많은 탈근대인들이 나이와 성, 혹은 지위와 공교의 차이를 떠나서 서로서로 친구나 연인같은 상호생성적인 탈근대적 관계들을 구성함으로만 가능하다. 유해국과 이영지, 그리고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는 사로서로 오해하고 의심을 하더라도 근원적으로 서로서로 친구나 연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탈근대적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한 탈근대적 관계가 그들의 힘이고, 탈근대적 관계의 생산성과 창조성이 그들의 미래이며, 그러한 생산성과 창조성이 근대의 대한민국을 탈근대의 대한민국으로 변화시키는 희망이다.

III. 강우석 감독은 근대인인가, 탈근대인인가?

ⓒ영화 <이끼>
강우석 감독은 윤태호 작가의 만화, <이끼>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영화 <이끼>를 만들었다. 특히 만화의 특이한 인물들은 강우석 감독이 발탁한 뛰어난 영화배우들 덕분으로 더욱 뚜렷한 영화 이미지들로 남는다. 더더욱 영화의 말미에서 만화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몇 년 후의 경상도 산골 마을이 탈근대적으로 재구성되는 영화 이미지는 유해국과 이영지의 새로운 관계를 더욱 깊게 사유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여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강우석 감독은 마을을 재구성하는 이영지를 바라다보는 유해국의 얼굴, 이와 반대로 다시 돌아온 유해국을 바라다보는 이영지의 얼굴을 "클로즈 업" 시킨다. 그러나 유해국의 얼굴과는 달리 이영지의 얼굴에서는 과거에 그녀를 지배했던 이장 천용덕의 얼굴이 겹쳐진다. 이영지의 얼굴에서 잔인하고 파괴적인 이장 천용덕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근원적인 탈근대인인 유해국일까, 영화를 만든 강우석 감독일까, 아니면 "지금 바로 여기"에서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일까? 강우석 감독은 2010년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관객들에게 이영지의 얼굴을 더욱 세심하게 사유하라고 강요한다. 영화 관객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에 대한 지도그리기를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2010년 대한민국은 21세기의 탈근대적 지도그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1987년 이전의 근대적 장소들로 퇴행하고 있다. 4대강 죽이기 사업이 그렇고, 천안함 사건 이후의 남북관계가 그렇고, 강원도 원주의 상지대학교를 비롯한 광주의 조선대학교, 대구의 대구대학교, 서울의 동덕여대와 덕성여자대학교가 이명박 정부의 근대적 권력회귀와 더불어 민주화 이전의 대학들로 되돌아가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여 만들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수많은 탈근대적 공간들이 폭력과 파괴가 만연하는 근대적 장소들로 회귀하는 현실에서 강우석 감독은 수많은 영화관객들과 마찬가지로 탈근대인으로 거듭났던 이영지가 근대적으로 퇴행하는 가능성을 "클로즈 업"으로 더욱 세밀하게 사유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 사유의 토대는 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삶의 생명성과 관계의 생산성이다. 유목형 뿐만 아니라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가 없는 상황에서 이영지는 끊임없이 근대적으로 퇴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유해국은 그녀를 바라본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권력과 자본을 욕망하는 근대적 삶의 습관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우리들의 삶은 누가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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