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우 선배가 오래 전부터 써놓았던 글들을 묶어서 <촛불철학>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그는 알만한 사람들은 알듯이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민중민주계열(PD) 운동권의 대표적 이데올로그 중 한 사람이다. 어려운 이론을 펼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대중적인 문필가였는데, 경제학, 역사학, 정치이론, 문학을 넘나들며 바로 당대의 한국 상황을 고발하고 사람들을 분기시키는 많은 글을 썼고 책을 냈다. 이 책의 후기에서 그가 처음 밝히는 바처럼, 그는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의 편저자 '정인'이었을 뿐 아니라, 박현채 선생 이름으로 출간된 <경제학 사전>의 번역자였고, 황인평, 김제민 같은 필명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그가 이런 사실을 굳이 밝히는 것은 활자로서만이 아니라 더욱 사람으로서 독자들과 만나고 싶다는 의사 표현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 스스로 책의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제 그도 나이를 먹었기 때문이다. 수해 전 깊은 병고를 치르기도 했거니와, 호방하게 펜을 칼삼아 휘두르며 지배계급과 운동권 내의 적들을 윽박지르던 시절을 지나 보내고 이제 촛불을 든 청년들에게 몇 가지 도움되는 말이나마 전하고 싶은 바람이 더욱 커진 것이 느껴진다. 내가 그와 활동을 직접 같이 한 것은 민주노동당 이론지 편집위원회 시기가 다였고 그가 글을 쓰고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이 내게는 다소 불편하기도 했던지라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가 더 좋거나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관계와 시간의 간격만큼 <촛불철학>을 거리를 두고 일독할 수 있었다.
<촛불철학>은 단정하게 구성된 책이 아니다. 에세이와 강연록, 소크라테스와 서양 근대 철학, 동양의 고전이 뒤섞여서 등장하는데, 막걸리 몇 사발이나 차 몇 잔이 돌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필시 그렇게 주제와 장르를 옮겨 다닐 것 같다. 그런 고로 장마다 흩어져 있는 메시지와 비유 중 인상적인 것을 받아먹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나의 구미를 당기게 한 식재료는 단연 성장주의 비판에 관한 장들이었다.
그가 성장주의 비판, 더 넗게 말해서 생태주의에 갖는 관심이 낯설 것은 없다. 민주노동당의 남원 중앙연수원과 지리산 초록배움터 만들고 책임졌던 핵심 인물도 그였고, 이전의 저서들에서도 에너지 전환과 농업 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더욱 심각하고 진지해졌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와 사회가 봉착한 어떤 큰 장벽에 대한 인식과 관련된다. 1980년대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며 반독재의 정언명령에 충실했고, 1990년대에는 진보정당운동과 함께 반부패의 목소리를 높여온 그였다. 이를 관통하는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놓지 않았지만 그 깃발의 현실태는 반독재와 반부패였고, 이를 통하여 진보와 변혁의 길을 만들고 넓히는 것이 유력한 방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던 김대중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좌절은 그마저 일종의 좌절을 겪게 한 것인데, 그토록 민주적이고 헌신적이며 서민을 위해 준비된 대통령이었던 그들이 IMF구제금융과 시장 권력에 굴복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죽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훼손하게 되었는지를 묻게 된 것이다. 두 대통령이 걸려 넘어진 돌부리의 실체는 20세기 내내 한국의 모든 계급과 집단을 속박한 성장주의였다. 성장이 안 되면 민주주의도 복지도 평화도 불가능하니, 성장을 위해서라면 독재, 재벌체제, 부패, 억압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청년들의 희생과 희망의 유보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취업의 무한경쟁 속에 암울한 시절을 보내게 된 청년 세대가 촛불의 주역으로 나선 것을 보고 그는 한 편으로는 큰 미안함을 또 한편으로는 강력한 희망을 느꼈던 것 같다.
황광우는 한국인에게 성장주의는 일종의 모태신앙이라고 말한다. 초등학교부터 주입받은 반공주의와 성장주의가 가위의 두 날이 되어 우리의 의식을 재단했으며, 반공주의는 북한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각인시켜놓았고, 성장주의는 재벌을 우리의 구세주로 각인시켜놓았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성공하고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구조적인 장애물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그 해법은 철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책으로도 제시되어야 한다. 그는 재벌해체와 노동자 경영참여, 독일식 정당명부제, 입시 폐지, 공공주택, 동일노동 동일임금 준수 같은 진보정당의 전통적인 정책들도 제안하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주 3일 노동제'다.
그의 주 3일 노동제는 '주 4일 노동과 주 2일 노동'이 공존하는 사회다. 주 4일 노동은 정규직이고 주 2일 노동은 파트타임 노동이다. 동일시간 노동에 동일임금 그리고 주택 구입비와 사교육비 부담이 없는 것이 전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주 4일과 주 2일 노동을 자유로이 선택하게 될 것이고, 생태문화사회의 문도 활짝 열릴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세계사적 법칙에 순응하면 청년 실업의 문제도 간단히 해결된다.
물론 이러한 제안이 그다지 새롭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거인들의 어깨와 손발을 통해 도달한 노철학도의 결론은 값지다. 황광우와 비슷한 시기에 민족해방(NL) 진영의 유력한 이데올로그였던 박세길이 수년 전부터 평등을 넘어 청년, 생태, 평화의 키워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결이 여전히 다름에도 서로 공유하는 부분 적지 않아진 듯도 하다. 그것 역시도 반가운 일이고, 곱씹어 볼 장면이기도 하다.
황광우는 그렇게 탈성장이라는 정거장에 다다랐다. 거기서 문재인 정부에게도 말을 건내고 촛불 청년뿐 아니라 반공주의와 성장주의를 어떻게든 내면화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머리와 가슴에도 돌을 던져보려 하고 있다. 이 정거장 말고도 많은 정거장이 있고, 이 정거장에도 수많은 차편이 있을 것이며, 황광우 역시 또 다른 정거장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생태문화사회로 가는 주 3일 노동제라는 티켓은 이 정거장에서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