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빛깔 동글동글 참외 철이다. 과일트럭에 실려, 과일가게 바구니에 담겨, 길가 노점에 산처럼 쌓인 참외 풍경과 마주치는 때. 지난해 날벼락 '성주 사드'만 아니었다면, 달콤 시원한 '성주 참외'로만 기억할 터였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 13년째 벌 수정으로 유기농참외를 거두는 참살이공동체 농부들을 만났다.
참외꽃에 벌이 찾아오면
"참외는 수꽃이 먼저 피고, 암꽃이 펴요. 벌이 꽃가루 묻혀서 암꽃에 앉으면 수정이 되는 거죠. 사실 시설 한 동에 벌 너덧 마리만 있으면 수정이 다 돼요."
이재동(49세) 님이 작은 열매가 달린 암꽃을 보여준다. 며칠 지나면 새끼손톱만 한 열매가 '툭' 커진다. 참외밭이 양쪽으로 길게 펼쳐있다. 노랗고 푸른 크고 작은 참외들이 넝쿨 사이 달렸다. 선남면 관화리 200평 규모 시설 다섯 동엔 노란 벌통이 한 통씩 놓였다. 벌통 하나에 꿀벌 3000여 마리가 있다. 가까이 가자 '붕붕' 소리가 들린다. 벌통 입구 벌 몇 마리가 보초 서듯 지키고 있다.
"참외가 많이 달리면 벌을 시설 밖에 내놓아요. 참외꽃 피는 상태를 보며 벌통을 들여놨다 뺐다 해요. 열매 맺히는 개수를 조절하는 거죠."
아카시아꽃 필 무렵 벌통을 시설 밖으로 내놓는다. 벌은 돌아다니다가도 집으로 돌아온다. 지금은 찔레꽃이 지고 있다. 곧 밤꽃이 필 것이다.
새벽에 딴 참외는 28상자. 대가면 참살이공동체 공동작업장에서 세척과 포장작업을 같이 한다. 행복중심 생협, 우리농, 한살림, 전남 지역 친환경 급식용으로 나간다. 3월부터 7월까지 토요일만 빼고 날마다 참외를 딴다. 작업장 한 쪽 선반에 이름표가 하나씩 붙어 있다.
참살이공동체는 2003년 성주 5개면 농민회 회원 8명이 모여 꾸렸다. 류지용(58세) 대표는 사드 배치 예정지와 직선거리 10킬로미터인 초저면에 산다.
"우리는 초물첫참외부터 벌 수정하지만, 관행하는 분도 두 번째 참외부터 벌 수정을 시켜요. 거기에 인공수정도 또 하고… 지금 성주 참외하우스에 가보면 벌통이 다 있어요. 벌이 수정할 때 보면, 저공 비행하는데 벌 다리에 꽃가루가 소복해요. 벌 수정은 햇빛과 온도가 좋아야 해요. 날씨가 흐리고 비 오면 수정이 안 돼요."
참살이 농부들은 참외 씨를 11월 초·중순에 뿌리고, 1월 10일경 접목한 모종을 옮겨 심으면 3월에 첫 참외를 딴다. 일조량이 지역마다 달라 빠르면 11월 시작해 2월 수확하는 곳도 있다. 벌은 여섯 마디 순을 키워 암꽃이 한두 개 필 때 '투입'된다.
"열흘 지나 암꽃 열매가 진녹색에서 보얗고 투명한 녹색으로 변하고 참외 골이 하얗게 바뀌면 수정된 거예요."
보름이 지나 생선액비 같은 영양분을 주면 보름 사이 '벼락같이' 참외가 커진다. 벌이 수정해 열매가 익을 때까지 40~45일이 걸린다. 벌 수정 참외는 당도도 높고 육질도 좋다. 수확량도 많고 저장성도 낫다. 반면에 인공수정은 호르몬제를 분무기로 일일이 뿌리는 탓에 한 번에 참외가 '왕창' 나온다. 사흘 만에 열매가 크지만, 늦게 익는다.
"첫 참외가 나올 때 보면 참외 씨가 탱탱하니 살아있어요. 인공수정은 씨가 죽정이에요."
20여 년 전 최진국(59세) 님 아내 윤금순 님이 칠곡 꿀벌작목반 회원 세 명과 벌 수정을 실험하며 시작했다. 여러 번 실패를 겪었다. 벌은 날씨에 따라 활동하는 시기가 달랐다. 참외꽃이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면 시들었다. 벌 수정 첫해엔 벌이 진딧물을 옮겨 참외밭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여성민우회생협현재 행복중심 생협에 참외를 보내지 못한 적도 있다.
"인공수정으로 농사짓는 것이 싫었어요. 사람 몸에도 안 좋고. 벌 수정을 하다 보니 벌의 역할과 살아 있는 씨앗을 품은, 다음 세대를 잉태할 수 있는 농산물이 나온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생겼어요."
성주는 참외, 참외는 평화
2005년 성주에서 무농약 참외연합회가 꾸려졌다. 주변은 반신반의였지만 공동체 회원 모두 벌 수정에 참여했다. 지금은 성주 대부분 참외 농가도 벌 수정을 함께하고 있다. 벌은 양봉가에게 빌리는 '임대 벌'이 많다.
"남한에서 인구밀도당 벌 개체수가 가장 많은 곳이 성주일 거에요. 4월이면 전국에서 수정하기 위해 벌을 가져와요. 양봉가들도 '임대 벌'로 먹고 살아요. 최근 7~8년 사이 벌어진 현상이죠."
참살이공동체는 한살림 꿀 생산자 '봉봉공동체'에서 벌을 빌려오거나 사온다. 친환경 농사짓는 곳엔 벌 개체 수가 계속 불어난다. 농약 탓에 벌이 많이 죽는 관행농가에 벌을 보충해주기도 한다. 벌을 시설에 넣는 시기도 한 달 정도 빨라졌다. 온난화로 2월에도 꽃이 피고 자연수정이 돼 참외 출하 시기도 앞당겨진 것.
"땅심이 좋아야 참외도 많이 나오고 품질도 좋아요. 관행하는 분들도 화학비료를 써보니 땅심이 떨어지고 수확량이 안 나오니까 거름도 넣어요. 옛날과는 많이 바뀌었어요."
성주에서 나룻배 타고 낙동강 건너 대구로 갔던 1980년대, 하우스참외 한 동 팔면 대구에 집 한 채를 샀다는 사람도 있었다. 1991년 성주는 시설채소 시범단지 지정 뒤 1997년 하우스 보온덮개 자동개폐 장치가 나온 뒤 '하우스 참외'가 더욱 빠르게 퍼졌다. 농가 하나에 성주 시설하우스는 평균 14동, 자연 수분하는 노지와 달리 시설농사엔 수분이 문제였다. 진딧물도 참외 농사를 힘들게 했다. 관행 농가에선 농약 칠 때는 벌은 시설 밖에 내놓는다. 참살이농부들은 제초제와 살충제 대신 천적인 진디벌과 무당벌레로 잡고 있다. 시설 주변 온갖 풀꽃들이 피는 이유다. 관행농 사람들도 봄나물 뜯으러 참살이 농부 밭으로 온다.
"농약 가운데 가장 독한 것이 제초제예요. 꿀벌이 많이 죽어요. 토양과 물에 지속해 영향을 미치죠. 벌들이 나락 논에 물 먹으러 가거든요. 사과 과수원에 하는 항공방제도 벌에 안 좋아요."
한 다국적 종자농약회사는 사과 농가 지역에서 '밀원식물심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은 자기들 종자와 농약을 계속 팔기 위해서예요. 종자는 팔았는데, 노지에서 수분이 잘 안 되니 자기네들이 만든 노지용 새까만 호박벌 50여 마리를 작은 통에 넣어 공급했어요."
이재동 님도 호박벌을 받아 시설에 넣어봤더니 참외와는 안 맞았다.
"자연수정은 나비도 하고 바람으로도 수정하지만, 벌이 꽃을 찾아다니면서 하는 역할은 지구생태계의 순환 논리로 본다면 엄청나게 중요해요. 결국 꿀벌이 다 죽으면 인간은 멸종되는 거죠."
최진국 님도 농사짓다 보니 화학물질, 화석연료, 기계농업, 기후변화 속에서 종자와 환경을 지키면서 토종을 키우지 않으면 머지않아 농업이 힘들어지겠다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한다.
"옛날 우리 어른들이 전통농업을 수천 년 해왔잖아요. 참살이공동체는 다품종 지역순환농업을 복원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뒤 따라 오는 사람들은 쉬워지겠죠."
성주 4300여 개 농가 가운데 유기농 참외 농가는 19가구. 성주엔 올해 같은 날씨가 없었다. 참살이공동체 참외 수확량이 지난해에 비해 1.5배나 늘었다.
"참외 농사는 95퍼센트가 하늘이 짓는 거예요. 허허."
부지깽이도 거든다는 농사철, "새 대통령이 되었으니 사드 문제도 달라지겠죠?" 껍질째 먹는 유기농참외 하나를 쪼갰다. 달고 진한 참외 향이 퍼진다. 성주 농부들에게 꿀참외 같은 평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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