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불타고 있다. 방안 가득 자욱한 연기 속에서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살려 달라'는 말도 할 기운 없는 아이는 '살점이 타는' 고통 끝에 죽어갔다. 일하러 간 부모들은 밖에서 방문을 잠갔다. 자물쇠가 채워진 방을 빠져 나올 수 없었던 아이들은 죽음의 순간을 그저 감내해야만 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난 달동네 아이들의 짧은 생은 이렇게 끝났다.
80·90년대 시골은 정부의 저(低)곡가정책으로 피폐해져 갔다. 도시노동자의 임금을 낮추기 위해서 정부는 저곡가정책을 실시했고, 이는 농촌 경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시골의 가난한 농민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그들은 도시의 빈곤층 노동자가 되었다. 도시라는 삭막한 공간에서 스스로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맨몸 하나가 전부였다. 도시 자본주의에 이들이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었다. 이들은 부부 모두가 일터로 나가야했다.
부부의 노동력만이 낯선 환경에서 자신들을 쓰러지지 않게 유지시키는 끈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부부들은 일하러 나가야 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서너 살, 때로는 대여섯 살 먹은 아이들이 있었다. 돌봐줄 그 누구도 없는 상황에서 젊은 부모에게 남은 유일한 해결책은 아이들을 방에 둔 채 밖에서 문을 잠그는 것이었다.
어두컴컴한 반지하 방에 갇힌 아이들은 자신들끼리 빵 등으로 끼니를 때운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시간은 더디게 간다. 한창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심심함은 친숙한 단어가 아니다. 심심함은 방안의 어둠과 포개져 아이들을 더욱 무료하게 만든다. 배가 고파 "엄마"를 부르지만, 엄마는 답이 없다. 갇힌 아이들은 엄마의 무응답에 절망한다. 아이는 고단함에 겨워 주위를 둘러본다. 전깃불이 꺼졌을 때를 대비해 마련해 둔 양초가 보인다. 지친 아이는 촛불놀이를 생각해 낸다. 불은 아이에게 잠시나마 절망을 완화시켜 줄 장난감이다. 아이는 성냥을 꺼내 양초에 불을 붙인다. 아이의 서툰 손놀림에 불은 방안 전체로 번진다.
이 가슴 아픈 이야기는 1990년도 '혜영 용철 사건'으로 알려진 실제 사건이다. 나는 이 뉴스를 듣고, 한동안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어린이들이 즐겁게 장난치는 모습을 볼 때면 이 뉴스가 생각나곤 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온 국민이 우울증을 앓았듯이 당시 비슷한 감정 상태에 빠졌다. 문제는 이 사건 이후로도 유사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젊은 직장맘(워킹맘)에게 가장 큰 애로는 육아 문제다. 젊은 아빠도 아니고,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 아이도 없지만, 젊은 부부의 육아 문제는 사회복지문제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핵심 안건이다.
육아·보육문제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활발해졌고,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함에 따라 경제 활동의 구성도 변했다. 홑벌이 가구에서 맞벌이 가구로 변화해갔다.
한국 사회에서 육아 문제는 하위계층의 빈곤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계급 문제 전문가인 한국노동연구원의 장지연 연구위원의 논문 '다양한 층위의 소득정의와 구성요소에 따른 불평등수준'에 따르면, 한국의 개인별 소득 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수준이다.
이런 혹독한 격차 사회에서 한국의 하위계층은 어떻게 생존하고 있을까. 장지연 연구위원의 연구는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다. 살아가기 버거운 하위계층일수록 더욱 많은 가족 구성원들이 경제 활동을 한다는 것. 비록 최저임금 수준일지라도 하위가구는 아빠와 엄마가, 그것도 부족하면 그들의 성인 자녀가 노동시장에 참여함으로써 생존을 이어간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소득분위가 올라갈수록 가구당 근로소득자(취업자)의 수가 많아진다. 대체로 소득 5분위 가구의 경우는 소득자의 수가 거의 2명에 근접하거나, 덴마크, 노르웨이 등 몇몇 국가에서는 평균 2명이다. 반대로 소득 하위 20%에 속하는 가구의 경우 소득자의 수는 평균 0.5명이다. 즉 저소득층 가구에서는 소득자가 1명이 있거나, 혹은 없는 경우도 절반가량 된다는 뜻이다. 가난한 가구는 일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고, 부유한 가구는 취업한 사람이 많아서 부유하게 사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에 장지연 연구위원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우리나라에서 가구별 시장소득의 분포가 비교적 평등한 이유는 가구주의 근로소득이 낮은 가구에서 2차소득자의 경제활동참여가 활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달리 말하자면 국가에 의한 소득보장이나 재분배정책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 환경조건 하에서 가구원의 노동공급을 늘리는 방식으로 대응한 결과라고 하겠다."
남편이 비정규직과 같은 불안정 노동자면, 이들의 아내는 필연적으로 노동시장의 신규 노동자로(대개의 경우 비정규직으로) 진입한다. 개인별 세계 최고 수준의 불평등이 가구별 불평등 조사에서는 많이 완화된다. 불평등만을 보면, 혁명이 언제 발생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가난한 집의 생계를 이어가는 엄마의 헌신 덕에 혁명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엄마의 헌신은 또 다른 피해자를 전제한다. 바로, 아이들이다.
80·90년대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와 달동네에서 분투한 가족이 직면한 상황은 신자유주의 광풍이 휘몰아쳐 불평등이 고착화된 현재 하위계층 가구가 마주한 상황과 유사하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아이 보육은 오롯이 부모의 몫이다. 육아를 포함한 복지는 여전히 부족하고, 가질 수 있는 일자리는 저임금 일자리뿐이다. 남편 월급으로는 한 가정을 온전히 꾸려가기 버겁다. 생계를 위해 엄마가 나선다. 하위계층 여성의 경제 활동은 그대로 아이들에게 전가된다. 육아·보육 복지시스템이 충분하지 않은 조건에서 여성의 경제 활동 참가율 증가는 그대로 아동 방치로 이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국민소득으로 본다면 상당한 수준의 선진국이다. 좋은 공공보육시스템이 없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준의 선진국이다. 도대체 왜 공공보육·육아를 해결하지 못한 것일까.
답은 엉뚱한 곳에 있다. 반공 이데올로기 때문이다. 정병호 한양대 교수는 한국에서 공동육아의 초기 주체 중 한 사람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온라인 강의를 들었다.
정 교수는 70/80년대 서울의 달동네에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을 운영하던 시절, 공안분야 형사들이 자주 방문하고 감시했던 일을 강의에서 밝혔다. 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 '빨갱이'임을 드러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 교수는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도 불구하고 육아를 포함한 복지 시스템이 따라가지 못한 것은 경제 발전 시기의 정부가 반공을 내세운 독재정권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국가의 영역인 '공공'을 개인의 영역인 양 방치했다. 방치한 주체는 반공을 앞세운 지배세력이었지만, 방치의 피해는 어린이나 여성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특히 가난한 집안의 어린이나 여성에게 그 피해란, 정말 가혹한 것이었다. 정글 자본주의가 만든 불평등의 가장 큰 피해자인 가난한 여성들은 집안을 꾸리기 위해 나섰고, 이들의 노력은 한국을 가구별 불평등에서 심각하지 않은 나라로 만드는데 기여했다.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가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기여자가 된 셈이다. 그러나 '직장', '가정', '아이'라는 3중의 굴레는 오로지 이들 여성의 몫으로 남았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지식인의 입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한 사회의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는 모든 움직임에 태클을 건다. 노골적인 반공 이데올로기가 겸연쩍을 때는 시장주의나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대체한다. 그들이 말하는 시장주의는 시장주의가 아니라, 시장 근본주의(libertarianism)인 것을, 자유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인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시장 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반공을 목표로 하는 네오콘의 슬로건이다.
불평등 국가 한국을 그나마 떠받쳐온 것은 저소득 가정의 여성들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를 우리 사회가 외면하도록 만들었다. 물론 복지정책면에서 일정 정도의 진전은 있었지만, 이 정도로는 절망하는 약자를 보듬기에 많이 부족하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복지정책과 사회 시스템의 진전을 제한해왔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반공 콤플렉스라는 족쇄에서 벗어날 때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국가의 비전은 비로소 시작될 것이다. 약자를 위한 정책은 가끔은 불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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