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쪽 진영 모두 이겨야할 이유는 충분한데 이기기 위한 과정은 녹록치 않다. 정치권의 숨겨진 갈등과 대립지점이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은평을 선거에서 나타나는 모순은 정치지형이 크게 변화하지 않는 한 2012년 총선까지 계속될 문제들이라는 점에서 이번 선거판이 어떻게 정리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일 현재까지 '정권 실세'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가 안정적으로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지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지지자들은 은평을에 나타나 이재오 낙선 운동을 벌였다. 친이계와 친박계의 고질적 갈등의 결정판이다.
이에 맞선 야3당은 단일화 협상 개시를 선언했다. "전국적인 단일화 협상만이 의미가 있다"던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은 정세균 민주당 대표의 '단일화 협상' 제안을 돌연 받아들였다. "단일화를 원하는 민의에 따라서"라지만 민노당은 같은 진보정당인 사회당이 먼저 내민 손을 잡지는 않았다. 사회당은 어렵사리 진보신당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하지만 과정이 깔끔하지 못했다.
'이재오 낙선운동'하는 박사모…민주당은 '박사모 보호'
공식 선거운동 사흘째였던 지난 17일, 서울 은평구 연신내역에는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회원 100여 명이 나타났다. 표면적으로는 "투표에 참여하고 휴가 가자"는 선거 참여 독려를 위한 캠페인이었지만 진짜 목표는 이재오 후보의 낙선 운동이었다. 이 후보 측이 반발하자 박사모는 하루 뒤 "박사모가 그렇게 무서우면 정치하지 마라"고 이 후보를 정면 겨냥했다.
이재오 후보가 모든 중앙당의 지원을 고사하고 '나홀로 선거'를 치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권 실세이면서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사실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재오 후보는 박 전 대표를 향해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친 언사를 쏟아냈었고, 지난 2008년 총선에서는 친박 인사를 대량 공천에서 탈락시킨, 일명 '친박계 대량학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처럼 박사모의 이재오 낙선 운동의 배경에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친이-친박의 감정적 갈등이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민주당도 갈등을 부추기는 모양새다. 장상 후보 캠프는 18일 "이재오 후보는 박근혜 전 대표를 제거하기 위해 MB가 보낸 '박근혜 자객'"이라고 주장했다. 장상 캠프는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한나라당 권력투쟁의 장으로 변해버린 난장판의 발단은 이 후보가 애초 약속과 달리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출마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장상 후보 캠프는 나아가 19일에는 "이재오 후보는 옹졸하기 짝이 없는 '박사모'에 대한 선관위 고발을 즉각 취하하라"며 박사모 보호에 나섰다. 목표는 분명한 선거 구도를 형성해 이재오 후보를 흠집 내는 것이지만, 한나라당의 당 대표를 지낸 박근혜 의원의 지지자와 민주당 후보가 한 목소리를 내는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 7.28 재보궐선거에서 가장 관심을 모으는 지역은 서울 은평을이다. 이명박 정권의 '2인자'이자 '4대강 사업의 전도사'를 자임했던 이재오 한나라당 후보의 국회 재입성이 결정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연합뉴스 |
제1야당 민주당이 '야권 연대'와 만나 생기는 모순
박사모의 손을 잡은 민주당은 정작 '야권 연대'에서는 머뭇거리고 있다. 후보 인지도, 지지율 등 제1야당으로서의 힘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간 비공식적으로만 이뤄지던 야권의 단일화 협상은 이날 비로소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하지만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민주당은 은평을에서의 단일화를 원하는데, 민노당은 양보의 '대가'를 원하고 있고, 국참당은 '천호선 후보로의 단일화'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민주당은 내주기가 쉽지 않다. "아름다운 연대가 아니라 이기는 연대를 해야 한다"는 그간의 입장을 하루아침에 뒤바꿀 수는 없다.
더욱이 이는 당 지도부의 리더십과도 연관돼 있다. 자신들이 공천한 특정 지역 후보를 중도 포기시킬 수 있는 지도력이 있느냐의 문제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중앙당 차원의 '야권 연대' 협상은 끝내 성사되지 못하고 지역 차원의 협상으로 단일화를 이뤄낸 것은 단적인 예다.
이번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영입에 공을 들였던 신경민 문화방송 선임기자가 "분란은 잦아들지 않고 최소 기본에 들지 못했다"며 불출마를 선언한 것도 당내 예비 후보들의 반발을 민주당이 정리하지 못했던 탓으로 알려져 있다.
"이기는 연대가 되야 한다"며 민노당에 내줄 것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과 별도로, 국민참여당과의 관계 설정도 문제다. "이번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가장 원하지 않는 게 국민참여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분석까지 나온다.
민주당에 집중하는 '진보정당' 민노당…진보신당의 우회 '금민 지지'
진보정당은 더 어지럽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연대의 달콤함을 맛 본 민노당은 정체성만 놓고 보면 진보신당과 비슷하지만, 정치적 행보는 이미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다. 재보궐 선거 초반 '은평을 포기'의 댓가로 '광주 남구'를 요구하던 민노당의 시선은 진보연합에서 어느덧 더 멀리 가 있다.
민노당은 민주당 상대의 협상에만 관심이 가 있다. 우위영 민노당 대변인은 19일 "이제와 민주당이 광주 남구를 양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무색하고 민망하다"며 "역시 지지율이 상승하고 있는 박승흡 후보가 있는 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나 인천 계양 등 민주당이 (양보할 수 있는 지역을) 더 열어 놓고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지방선거에서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와 완주한 노회찬 대표가 각각 안팎에서 비난을 받으면서 여러 고초를 겪고 있는 진보신당은 이번 재보선에서 단 한 곳도 후보를 내지 못했다. 자리 잡기도 어정쩡하다. 사회당의 '러브콜'에 진보신당은 "은평을 선거구에서 진보정치의 단결과 연합의 정신이 실현되기를 바란다"는 하나마나한 결론만 내고 지지 후보 결정 권한을 서울시당으로 떠넘겼다.
결국 진보신당 서울시당은 19일 금민 사회당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같은 날 금민 후보 측은 "장상 후보는 한손으로는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와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 등과 손을 잡는 신묘한 재주를 지녔다"며 "말 그대로 묻지 마 반MB 연대로 박근혜-장상-천호선-강기갑으로 이어지는 러브 라인이 형성됐다"고 비꼬으며 다른 야당과 확실히 선을 그었다.
꼭 2년 전 서울 은평을에서 정권 실세와 맞붙어 엄청난 격차로 승리를 거머쥔 드라마의 주인공 창조한국당은 이 모든 과정에서 소외됐다. 단일화 협상을 시작한 야3당은 물론 "창조한국당과도 접촉할 것"이라 했지만, 왕길남 대변인은 이날 "나눠 먹기식 야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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