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한미정상회담 직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을 시험 발사하면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이 시험대에 오른 가운데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 핵‧미사일 실험 동결과 한미 군사훈련 축소'라는 핵 문제 해결 입구로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전 장관은 4일 <프레시안>과 인터뷰에서 "북한의 ICBM 발사를 본 미국은 북한 핵‧미사일 동결과 한미 군사훈련 규모 축소 혹은 중단이라는 문제 해결 입구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이번에 시험 발사한 ICBM은 정상 각도로 발사할 경우 사거리 5500km를 넘게 된다. 이렇게 되면 6000, 7000km로 사거리가 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미국 본토에 위협이 되는 수준까지 가지 않기 위해 미국은 중국이 주장하는 '쌍중단'(雙中斷·북한의 핵실험 및 미사일 발사 중단과 한미 연합 군사 훈련 중단)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그는 "지난해 9월 미국 외교협회(CFR)에서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는 실패했다면서 초기 단계에서 북한의 핵 능력 동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고, 존 케리 당시 국무장관 역시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의 모두 발언에서 북한 핵 동결을 이야기한 바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30일(현지 시각) 미국 워싱턴 D.C에서 가진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초청 연설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은 국제법 위반이자 안보리 결의에 위반되는 것으로, 합법적인 한미 군사훈련과 교환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에 정 전 장관은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정책 변화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국이 그동안 정책 방향을 틀었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라면서 "'코리아 패싱'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변화 가능성에 준비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북한의 이번 발사가 미국과 협상을 벌이기 위한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이기 때문에 미국도 쌍중단 해법을 신중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주장이다.
그는 "북한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새벽에 맞춰서 미사일 실험 발사를 공개한 것은 미국을 다급하게 해서 직접 협상에 나오게 하는 일종의 '벼랑 끝 전술'일 수 있다"며 "대미용인 ICBM을 발사하면서 미국에 직접 나서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정 전 장관은 "7월 4일이라는 날짜를 택한 것은 미국 사람들을 세게 자극한 것"이라며 "북한은 과거 미국을 세게 자극했을 때 오히려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왔던 성공의 추억이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 재무부가 지난 6월 29일(현지 시각) 중국 단둥은행을 제재하면서 북한 정권의 자금줄에 대한 강한 압박을 펼친 것도 이번 ICBM 발사의 배경이 됐다는 해석도 나왔다. 정 전 장관은 "지난 2005년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 이후 북한은 핵 활동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며 "그때와는 달리 지금 북한은 핵이 있다고 간주되고 있고 미사일도 고도화됐다. 그래서 미국을 상대로 ICBM 발사라는 전술적 선택을 한 것으로 본다"고 풀이했다.
남북관계 채널은 열어둬야 한다
북한이 ICBM 발사라는 중대한 군사적 조치를 감행하면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 추가 도발을 중단한다면, 북한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설 수 있다"고 밝힌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도 차질이 빚어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은 한반도 안보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오히려 이럴수록 판문점 채널 복원 등 남북 간 대화 통로를 여는 노력은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핵 문제는 미국과 긴밀히 협의하는 한편 남북관계가 반발짝 앞서가면서 북핵 문제 해결에 소위 말하는 '디딤돌'을 놓는다는 생각으로 가려면 판문점 채널 복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 전 장관은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군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권이 없는 상황에서는 우회하는 방식으로라도 북핵 문제 해결에 노력해야 한다"며 "북한이 미사일 발사하는데 무슨 판문점 채널 복원이냐며 비난 여론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남북관계 돌파구를 여는 것도 북핵 문제 해결의 중요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이번 ICBM 발사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가 확고해지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왔다. 정 전 장관은 "북한 미사일을 막기 위해서 사드를 도입한다는 기존 명분을 이번 ICBM이 확고하게 다져준 셈"이라고 말했다.
그는 "결국 사드 배치도 중국으로부터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강행할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한미일 3각 군사 동맹이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며 "동북아에 한미일 대 북중러의 신(新)냉전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함께 지난해 체결된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도 유지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정 전 장관은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이 한미일 3각 동맹을 위한 기반조성 아닌가?"라며 "이번 발사가 이 협정의 필요성 및 유용성을 증대시켜주는 결과가 됐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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