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에서 '극일의 상징'으로 부활
하지만 2년 뒤, 그는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부활의 원동력은 고된 훈련. 하루 15000m를 역영하며 그는 자신감을 되찾았다. 자유형 400m에 이어 1500m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1974년 제7회 테헤란 아시안게임 수영 자유형 1500m에서 우승한 조오련 선수가 환호하는 관중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연합뉴스 |
400m 우승 뒤에 열린 시상식에서 조오련은 미리 준비해 갔던 한복 베옷에 태극 문양이 새겨진 머리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응시했다.
2,3위에 그쳐 어깨가 축 늘어진 일본 선수들의 모습과 함께 조오련이 남긴 이 한 장면은 그에게 '아시아의 물개'라는 타이틀을 주기에 충분했다.
일본 수영팀은 이 대회에서 경영 부문 '싹쓸이'를 목표로 했었다. 하지만 조오련에 의해 이 목표가 깨지자 충격에 빠졌다. 일본 언론은 앞다퉈 조오련의 한복 시상식을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했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도 '수영 왕국 일본에 일격' 등의 일본을 겨냥한 제목을 뽑아 조오련의 위업을 높게 평가했다. 북한과 함께 일본은 당시 한국 스포츠 발전에 가장 큰 자극을 줬던 외부 세력. 국제 수영계에서도 한목소리를 내던 '아시아 최강' 일본을 넘어선 조오련은 극일의 상징이기도 했다.
'세계의 물개'가 되고파 했던 조오련
그랬던 그가 4일 돌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년 대한해협을 30년 만에 다시 횡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이 계획을 달성하는 데 필요했던 후원이 수포로 돌아가자 우울증이 재발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그가 다시 대한해협을 횡단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도 그렇지만 사실 그가 '세계의 물개'가 되지 못했던 현실에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도 꽤 많을 것이다. 실제로 조오련은 그의 아들 성모가 '세계의 물개'가 되어 주기를 원했다.
고(故) 조오련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70년대 한국 스포츠는 '헝그리 시대'였다. 선진국형 스포츠인 수영에서 월드 클래스에 접근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한국은 당시 아시안 게임에서 북한에 우위를 보이기 위해 격투기를 위주로 한 전략 종목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수영의 자리는 거의 없었다.
그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너무 늦게 받았다. 일반인 두 배에 달하는 폐활량 6000cc와 가난을 이기기 위해 자연스럽게 체득한 인내력과 투지를 담보로 아시아 정상에 만족해야 했다.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태릉선수촌 내에 있었던 국제 규격 수영장만이 그에게 제공된 나름의 세계적 수준의 지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그는 늘 올림픽 금메달을 거머쥔 박태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인터뷰를 통해 세계의 벽을 넘지 못한 자신과 비교하며 부러움도 동시에 나타냈다. 82년 도버해협을 횡단하고 나서도 세계 신기록을 깨지 못한 것에 큰 아쉬움을 보인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세계 최강이지만 올림픽과 인연 없던 후루하시
▲ 1949년 미국 수영 선수권대회 1500m 자유형에서 우승한 후루하시 히로노신이 2위로 들어온 팀 동료 시로 하시즈메와 악수를 나누며 축하하고 있다. |
'아시아의 물개'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일본의 수영 전설 후루하시 히로노신도 사망했다.
전후 복구과정에서 일본에 가장 필요했던 존재는 일본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영웅. 후루하시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자유형 400m와 1500m 등에서 무려 33번의 세계 신기록을 냈던 것으로 알려진 일본 수영의 황제였다.
하지만 후루하시가 절정기에 있던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전범 국가였던 일본은 참가할 수가 없었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건 1년 뒤. LA에서 열린 미국 수영 선수권에서 자유형 400m, 800m, 1500m를 석권했다. 미국 신문기자들은 그에게 '후지산의 날치'라는 별명을 붙여줬을 정도.
후루하시가 세계 신기록을 세운 1500m 경기는 전후 최초로 일본에 해외 경기 생중계됐다.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후루하시의 대활약을 더욱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다.
더욱이 2차 대전의 승전국 미국 선수들을 상대로 거둔 성과라 일본인들의 기쁨은 배가됐다. 같은 해 유카와 히데키 박사가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아 1949년은 일본 재도약의 해로 지금까지 기록되고 있다.
올림픽과 유달리 인연이 없던 후루하시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참가했지만 이질에 걸려 메달권 진입에 실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에 유명을 달리한 한국과 일본의 수영 전설은 이처럼 모두 '헝그리 시대'를 살면서 양국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줬다.
세계 수영 경영 부문에서 아시아 시대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 두 영웅은 아시아 수영의 스승으로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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