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밥 좀 먹고 예술하자"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밥 좀 먹고 예술하자"

[작은책] 노동조합, 건강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위해 필요하다

나는 강원도 탄광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생이던 1988년 8월 서울에 왔다. 지하철 1호선 석계역 근처 봉제공장에서 보조(시다)부터 시작해 안 해본 일이 없는 노동자이다. 당시 근처 '참빛야학에서 '전태일'을 하며 처음 연극을 접했고, 20살이던 1993년 극단에 들어갔다. 거의 돈은 받지 못하는데도 대표와 선배들의 '원래 그런 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당연하게 생각하고 '내가 좋아서 하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했었다. 혼자 서울에서 생활하다 보니 생활이 힘들어지면 다른 일을 찾아서 돈을 벌고, 돈이 좀 생기면 다시 연극을 하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지금도 대다수의 2,30대 연극하는 친구들은 그렇게 생활한다.) '내가 못 배워서 돈을 제대로 안 주는 건가?' '공부를 더 하면 좀 더 좋은 조건에서 연극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고, 연극 동아리가 있다는 이유로 한국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갔다. 공부는 안 하고 직장을 다니며 연극만 했다. 나아지는 건 없었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공부해 보자 해서 전문대, 4년제 편입, 대학원까지 졸업했다. 그래도 나아진 건 없었다. 공부하면서도 항상 일을 해야 했고, 대학원 갈 학비 벌려고 배도 탔었다. 난 항상 노동자였다.

▲ 2017 세계 노동절 집회에 참석한 공연예술인노동조합. ⓒ이종승

그런데 난 어디에도 속한 것 같지 않고 떠돌이 혹은 박쥐 같은 느낌으로 어느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소속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변의 직장 동료, 학교 동문들, 현장의 연극 선후배 등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이야기해 봐도 항상 미래에 대한 불안, 생활고, 직업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보장제도 밖에 있는 투명인간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천덕꾸러기로 취급받고 천대받는 느낌이었다.

분명히 선배들은 옛날보다 좋아진 환경이라는데, 현실에서는 체감되지 않았다. 오히려 옛날보다 목숨을 잃거나 스스로 끊는 사람이 많아졌다. 무엇이 좋아진 걸까? 그 많은 협회와 단체는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정부는 긴급지원금이나 창작지원금 등 당장 밥값을 주는 생색내기식 임기응변 지원제도를 만들어 냈다. 그것도 당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지 증명해라, 그러면 주겠다라는 심사기준으로.

ⓒ이종승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마로니에에서 몇몇 연극인들이 모여 추모를 하기 시작하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몇몇이 모여 서명을 받고 잊지 않으려 지금도 주말마다 촛불을 밝힌다. 그렇게 예술하는 사람들이 광화문 단식 텐트를 지키며 릴레이 단식을 이어 갔고, 거리로 나가 이것은 잘못된 거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인연들과 이야기 나누다 우리의 환경개선을 위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동료들과 만났다. 그러나 노동조합에 대해 잘 모르고, 우리가 노동자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정체성 문제부터 혼란스러웠다. 그럼 조합에 대해 공부를 해 보자 해서 책을 읽고 토론하고 노동조합의 경험이 있는 분들과 함께 2년여간 스터디를 했다. 그러면서 '연극인유니온준비위'라는 이름으로 인터뷰도 하자 주변에 이런 것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도 났다.

검열, 블랙리스트 등 공연예술계의 문제가 탄핵의 사유가 되고, 특검의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올바른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연극이, 예술이 침묵하고 있을 수 없었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의 권리를 찾고, 건강한 사회, 건강한 문화예술 생태계를 위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하는 선후배님들과 토론회를 갖고 공연예술인 노동조합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일단 조합원 100명을 모아 창립하자고 했지만, 3월 27일 창립식까지 100명은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계속 조합 신청자들은 늘어나고 있다.) 지난 4월 28일 서울시에서 설립신고증을 발급받아 정식 단위 노동조합이 되었다. 이상이 대략적 설립 과정이다.

1993년에 극단에 들어갔지만 일하고 학교 다니는 기간을 경력단절로 보면 내 경력은 15년 정도라 할 수 있다. 30여 년간의 사회생활로 정말 다양한 분야의 일을 경험한 노동자였던 나이기에 다른 노동환경과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과 최저임금 인상들처럼 시급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누가 나서서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된다고 해도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릴 것이다.

ⓒ이종승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은 나의 일을 내가 나서서 그것에 공감하는 우리가 되어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단결된 목소리로 요구하는 단체다. 우리 스스로의 권리와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보편적 복지를 요구하는 것이지 예술인으로서의 특권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공연예술에 대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다. 기초예술인 생존권 보장(기본소득법 제정), 기초공연예술진흥법 제정,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관련자 처벌. 이것이 노동조합을 출범하며 요구한 것들이다. 앞으로 이를 위해 공연예술인노동조합은 노력할 것이며 예술계 문제뿐 아니라 사회의 적폐와 부당함에 대해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현장에 함께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작은책

월간 <작은책>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부터 시사, 정치, 경제 문제까지 우리말로 쉽게 풀어쓴 월간지입니다. 일하면서 깨달은 지혜를 함께 나누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찾아 나가는 잡지입니다. <작은책>을 읽으면 올바른 역사의식과 세상을 보는 지혜가 생깁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