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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대한민국? 우리 안의 '가스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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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대한민국? 우리 안의 '가스통'

[법치의 표리(表裏)] 이제 '문명국'으로 자리매김하자

2009년 9월 24일 헌재는 집시법 제10조등 야간집회금지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림으로써 한국 집시법의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다만 이 결정에서 아쉬웠던 것은 야간집회 금지규정의 효력을 즉시 상실시키는 단순위헌결정이 아니라 2010년 6월 30일까지 잠정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건부 위헌결정이었다는 점이다.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헌재가 설정한 입법기한이 드디어 만료됨으로써 7월 1일부터 야간집회가 전면적으로 허용되게 되었다. 야간집회가 1963년 집시법 제정이후 일관되게 금지되어 왔던 연혁을 감안하면 실로 중요한 법적 변화라고 할 것이다.

집시법, 성급한 기대는 말자

사실 그동안 논란이 되었던 야간집회란 정치적 목적의 집회이다. 기타 문화, 예술, 종교적 목적의 야간집회는 허용되어 왔다. 그러나 헌법상 보장되는 집회의 자유의 핵심영역이 민주적 여론형성을 위한 정치적 집회라는 점에서 야간정치집회의 전면적 금지규정이 효력을 상실하게 된 것은 비정치적 집회의 허용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특히 야간집회금지의 법적 근거가 소멸된 것은 2008년 촛불집회를 계기로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색깔론에 기초한 억압기조를 고집해 온 이명박정부의 편집증적 법집행경향이 중대기로를 맞게 됨을 뜻한다.

그렇다고 너무 성급한 기대를 가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경찰이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현행 집시법상에는 신고제 및 집회금지통고제, 소음규제, 장소규제를 비롯하여 집회를 통제하기 위한 다양하고도 포괄적인 규제장치들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어서 야간집회가 아무런 제약없이 이루어진다고 속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2년 여의 경험에 비추어 이명박 정부가 이 정도의 제도변화에 그리 개의할 것 같지도 않다. 미네르바의 무죄, 정연주 KBS사장 무죄 등 정부의 무모한 법집행으로 인한 폐해가 다양한 비판에 직면하여 왔지만 국민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이 정부의 반헌법적 사고방식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 않았는가?

이명박 정부의 출범이후 법치국가를 표방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밝고 환한 모습이라기 보다는 일그러진 모습으로 얼룩져 왔다. 지금도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이 백주에 진행되고 있다. 시민단체를 위협하는 우익단체의 가스통, 경찰의 고문 그리고 국무총리실의 민간사찰 등 일그러진 대한민국 법치의 자화상은 도처에 널려있다.

동기와 발상이 가공스러운 가스통의 등장

▲ 참여연대 앞 도로를 점거한 보수단체 회원들ⓒ프레시안(김하영)

무엇보다 가스통의 상징성에 주목해 보자. 폭발력이 가공한 이 위험물이 한 시민단체의 건물을 목표로 한 무기로 등장하였다. 참여연대가 천안함 사태에 대한 정부의 진상발표가 내포한 의혹들을 제기하는 서한을 유엔에 보냈다는 이유로 국가보위의 사명을 자임한 일부 민간단체가 백주대낮에 테러를 감행하려 한 것이다. 명박산성과 같이 원천봉쇄술에 탄탄한 노하우를 자랑하는 경찰이 폭발사고는 막았다고 하지만 그 동기나 발상이 가공스럽다. 폭력을 규탄하기 위해 폭력을 동원하는 그 천박한 발상과 그 발상을 조장하는 메카시즘이 혐오스럽다.

정부발표대로라면 천안함은 어뢰폭발로 애꿎은 46명의 장병들이 전사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 가운데 정부발표가 보여준 여러 의혹들에 대해 공감하는 경우가 다수는 못되어도 무시못할 수준은 된다. 이 무시못할 소수의 의견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자유민주국가와 전체국가를 구별짓는다. 다수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의 이름으로 진실을 독점하거나 강조하는 체제가 우리가 그토록 혐오하는 전체국가의 본모습이다. 이런 기본원칙을 고려한다면 무시못할 의혹의 존재에 대한 자유민주국가의 해법은 끊임없는 조사와 설명의 과정이다. 의혹을 제기하는 입을 틀어막는 것도 모자라 또 다른 폭발을 촉발할 수 있는 폭력을 동원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가스통의 폭력성에 못지않은 위험을 가진 것이 우리 내면에 체화된 전체주의적 안보나 외교관이다. 독재체제를 거치면서 음으로 양으로 조장된 왜곡된 세계관이나 가치관이 민주화 이후에도 버젓이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적지 않은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안보나 외교문제에서의 행동통일과 사고의 일사분란함을 조장하는 논리다. 안보에는 여야가 없다거나 외교문제에서의 이견은 적전분열이라는 단순논리가 그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단순논리의 전제는 사실판단에서 이견이 없는 경우라야 한다.

이젠 우리도 '문명국'이 되자

애당초 여와 야를 초월하는 안보문제나 적전분열이 되는 외교사안이란 성립할 수 없다. 참여연대가 의혹을 제기한 천안함 사건은 감사원의 발표나 합동조사단의 계속된 설명번복에서 확인되었듯 안보사안을 다루는 과정에서 숱한 절차위반과 실체적 조작의 의혹을 유포하기에 충분한 사실관계들을 내포하고 있다. 사건의 정확한 발발시각의 수정발표, TOD존재여부에 대한 번복, 초병 증언의 신빙성, 어뢰설계도의 진위에 대한 번복, 어뢰의 실체 및 사건상황에 대한 설명의 계속된 수정 등이 그런 정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의혹을 가진 안보관련 사건이 정부 여당에 의해 원래 의도한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임박한 선거에 정략적으로 이용된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천안함사건이 인천 앞바다에서 터지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하였냐는 여당중진의원의 망언보다 더 적나라하게 이 점을 보여주는 사례를 찾기 어렵다. 여와 야가 서로의 정치상품을 두고 경쟁하는 과정인 선거에서 한쪽 편에 유리하게 편의적으로 활용된 사안에 대해 여와 야가 따로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이 가능한가? 더더구나 무시못할 숫자의 국민들이 사실관계 자체에 대해 의혹을 가진 것이라면.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회부하는 사안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완전히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는 사안에 대하여, 그리고 그 외교적 효과마저도 불투명한 정책에 대하여 외교문제이므로 입을 닫고 있어야 하는게 합당한가? 외교적 사안이 항상 공정하고 진실에 입각하여 처리되는 사안이 아니라 강대국들의 힘과 이익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는 것이 현실임은 국제관계나 국제법 교과서의 기본적인 전제임을 감안하면 이런 논리의 허구성이 쉽게 드러난다. 천안함사건에 못지 않은 KAL기 폭파사건, 아웅산테러사건 등에 대한 국제외교적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이번 사태의 성급한 외교적 접근이 초래할 위험성을 이해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로 표상되는 문명사회의 전제는 모두가 스스로의 책임하에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가운데 공동체의 공동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개별적인 생각과 의견이 항상 옳을 수는 없으나 그 옳지 못함을 증명하는 것은 가스통이나 마녀사냥과 같은 반문명적이거나 전체주의적 수단이 아니라 '사상의 자유시장'에서의 끊임없는 공론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제 야간집회의 원칙적 허용이라는 헌법정신이 제 자리를 찾게 된 뜻깊은 시점을 맞아 대한민국 법치의 자화상이 문명국의 모습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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