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 끝나고 한 달이 흘렀다. 대선 전부터 직업이 대통령이었나 싶을 정도로 문재인 대통령은 막힘없이 국정수행을 펼치고 있다. 당분간 문재인 정부는 산적한 적폐뿐만 아니라 당면과제들과 마주해야 하고, 꼬인 실타래를 풀어가야 한다. 촛불정국과 대선과정의 역동성 못지않게 대선 이후도 다이내믹 코리아가 될 것 같다.
그 중에서 폭발력을 지닌 사회의제 중 으뜸은 개헌이다. 지난 뜨거웠던 탄핵정국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국회는 '헌법개정특별위원회'(이하 개헌특위)를 구성했고, 벌써 활동 종료시한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달 6월까지 활동하는 국회 개헌특위는 여야의원 36명이 참여하고, 각 분야에서 추천받은 전문가 53명이 활동하고 있다. 국회 속기록을 확인해보니 13차례 개헌특위 회의를 가졌고 십여 차례 이상 세미나를 진행하기도 했다.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는 분위기다. 시대적 가치와 철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3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헌법은 국민들 간의 약속이라서 국민이면 누구나 한 줄 헌법을 쓸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절반인 여성의 목소리, 노동자와 농민, 청년과 소상공인, 우리 사회 여러 소수자의 목소리가 한 줄 헌법에 녹여져야 한다. 심지어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생명존중으로서 동물권 의제도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기후변화협약을 내팽개쳤다 하더라도, 우리는 지구 공동의 미래를 세계인과 함께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헌법 한 줄에 반영시켜야 한다. 생각의 지평을 지구환경문제까지 넓혀야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은 계속해서 생존하고 번식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국가가 이와 관련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해당 생물을 대신해 시민들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2008년 7월, 에콰도르가 통과시킨 헌법 내용의 일부다. 소위 자연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자연권(Right of Nature)'이 세계 최초로 헌법에 명시되는 순간이다.
헌법은 아니지만, 지구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규정하며 자연을 보호하지 않으면 인류도 보호받을 수 없다는, 일명 볼리비아의 '어머니 지구법'도 현실의 법체계 안에 들어와 있다. 엄연히 생명을 지닌 동물을 '물건'으로 규정하는 우리나라 '동물보호법'이 위헌이 될 수 있도록 헌법에 녹색가치가 스며들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회는 누구나 한 줄 헌법을 쓸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누가 개헌 논의를 주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주영 국회개헌특위 위원장은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개헌안 논의와 발의주체는 국회가 되어야 한다. (…) 정치적 의도를 배제한 상태에서 순수하게 개헌논의를 해야 합의를 이룰 수 있다."(<주간조선>, 2459호)
이주영 위원장은 단호하게 국회가 개헌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국회가 다양한 민의를 반영할 만큼 대표성을 지니고 있을까? 20대 국회의원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은 17%다(51명). 20~30대 청년 국회의원은 1%에 불과하다(3명). 50대 이상의 국회의원이 82.3%를 차지한다(247명). 국회의원 1인당 평균 재산은 40억2000만 원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우리나라 정치는 '돈 많은 50대 이상의 남성들'이 지배하는 구조다. 이런 사람들이 주도하는 헌법 개정이 과연 여성, 청년,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 장애인, 그리고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할지 의심스럽다.
시민들이 참여한 헌법 개정은 낭만적인 환상이 아니다. 아이슬란드는 무작위로 뽑힌 시민들로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개헌논의를 주도하였고, 아일랜드는 일반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의회'로 개헌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시민이 주도하는 개헌논의는 현실정치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국회 외 여러 분야에서도 개헌논의가 활발했고, 개정안이 제안되기도 했다. 시도지사협의회가 헌법학회에 의뢰하여 내놓은 지방분권형 헌법개정안(2015년)이 있고, 대화문화아카데미가 몇 년간 토론을 거쳐 내놓은 개정안(2011년), 지방분권개헌국민행동이 내놓은 개정안(2016년)도 있다. 녹색전환연구소가 '생태적 지혜'를 중심으로 준비하고 있는 '녹색헌법'도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이런 노력들이 '국회만이 주도한다'는 불필요한 권위 앞에 배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을 지킨다면, 내년 지방선거와 동시에 '헌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국민투표가 실시된다. 남은 시간은 1년이다. 엄밀히 말한다면 개헌안 공고, 국회의결 등의 절차를 감안하면 채 10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다. 소수의 엘리트만이 참여했던 1987년 개헌 과정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채비가 필요하다.
그 채비는 30년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생태·환경 등의 다양한 가치의 반영과 시민들이 주도하는 개헌논의를 설계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적어도 한 세대의 방향타가 될 헌법이 30년 전의 전철을 되풀이 하지 않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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