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이 있는 섬, 섬 곳곳에 조개껍질과 부표, 로프, 폐목들을 활용한 정크 아트 부조 작품 등 60여 점의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여행자들을 반기는 섬. 지난 4월에 개장한 전남 고흥군 연홍도(蓮洪島)는 한국 최초의 예술섬입니다. 작은 섬마을 안길과 해변을 거닐며 예술작품들을 감상하는 느낌은 새롭습니다. 그야말로 지붕 없는 미술관, 에코뮤지엄이지요.
7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제61강으로 7월 1(토)-2(일), 한반도 남쪽 끝 고흥의 예술섬 연홍도와 한센인의 한이 서린 애환의 섬, 소록도로 갑니다. 사슴섬, 소록도(小鹿島)는 한센인들을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습니다. 지금도 700여 명의 한센인들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갑니다. 울창한 해송숲과 백사장이 있어 아름다운 섬으로 손꼽혔지만 일제강점기 끌려와 강제 수용되었던 한센인 환우들의 고통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한센인들이 가꾼 중앙공원과 옛날 한센인 환우들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생활자료관, 한센인이었던 한하운 시인의 시비,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추앙받는 하나이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순록탑 등 다양한 유물들을 탐방합니다. 예술섬 연홍도와 사슴섬 소록도, 참으로 의미있는 기행이 될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답사지인 <연홍도와 소록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연홍아, 연홍아!
2017년 4월 8일, 고흥반도 끝자락의 작은 섬에서 한국 최초의 예술섬이 탄생했다. 이날은 1000개의 티셔츠가 장대에 매달려 바다를 향해 휘날리는 장관이 연출됐다. 예술섬 연홍도 마을 곳곳에는 60여 점의 각종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마을 입구에서 방문객들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연홍주민전> 전시작품인데 연홍도 주민들의 옛날 모습을 담은 2백여 점의 사진들이다. 선창가에 전시된 조각품 쌍둥이 소라는 연홍도의 상징물이다. 연홍도 마을 두 개의 메인 골목에는 해변 쓰레기들이 예술품으로 재탄생해 있다.
버려진 조개껍질과 부표, 로프, 폐목들을 활용한 정크 아트 부조 작품들 수십 점이 상설 전시중이다. 섬 뒤 안 연홍미술관 앞 바다에는 물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작품 <은빛 물고기>가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관람객들을 반긴다. 이 해변의 철거예정인 폐건물에서는 대형 점묘화인 <탈출>을 만날 수 있는데 프랑스의 벽화작가 sp38이 연홍도에 와서 그린 작품이다.
전남 고흥군 금산면 연홍도는 면적 0.55㎢, 해안선 길이 4㎞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섬이다. 고흥반도 녹동과 다리로 연결된 소록도를 지나면 거금도가 나오는데 거금도 역시 소록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내륙으로 편입됐다. 덕분에 연홍도로 가는 길이 가까워졌다. 연홍도는 고흥의 거금도와 완도의 금당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한때 폐교를 활용한 섬마을 미술관으로 유명해졌지만 볼라벤 태풍에 정원이 초토화돼 미술관은 오랫동안 휴관 중이었다. 그런데 연홍도가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을 통해 본격적인 예술섬으로 탈바꿈했다. 한국 최초의 예술섬이다.
봄날 연홍도의 들녘에서는 아직도 소의 힘을 빌려 밭을 가는 농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섬은 그 자체로 농업박물관이다. 한때 김 양식으로 명성을 떨치던 섬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135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52가구 82여 명만 남았다. 주민들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김 양식이 쇠퇴하고 고대구리(저인망) 어업이 불법화되면서 젊은 사람들은 모두 섬을 떠났다.
연홍도의 원래 이름은 맛도[馬島]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연홍도(蓮洪島)로 바뀌었다. 맛도 혹은 마도란 이름은 섬의 형상이 말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연홍도와 주변 해역에는 말머리, 말꼬리, 말풍경, 말붕알, 말먹이 등 말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산책로처럼 평탄한 4㎞의 섬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말과 관련된 지명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다. 이 길에서는 득량만과 여자만의 그림 같은 바다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다.
하지만 지도로 본 연홍도의 형상은 말을 닮았다고 할 만한 데가 없다. 연홍도의 실제 형상은 ㄱ자형 꺽쇠 모양에 가깝다. 우도란 이름을 가진 많은 섬들이 언뜻 보면 소처럼 보이는 것과 다른 케이스다. 마도란 이름도 우도만큼이나 흔한데 연홍도 외에도 태안 마도, 사천 마도, 하동 마도 등이 있다. 이중 태안의 마도는 언뜻 보면 말이 발을 들고 서 있는 형상이다. 하지만 연홍도는 말의 형상이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말 섬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말은 ‘마루’의 뜻을 지닌 우리 옛말이다. 으뜸, 머리 등의 뜻이다. 말섬, 마도, 마루섬 등의 이름 또한 이 말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다. 으뜸 섬이란 뜻이다. 하지만 연홍도의 경우 우리의 옛말인 말(마루)보다는 동물 말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연홍도의 본섬인 거금도가 조선시대 국영목장의 하나인 도양목장의 일부였던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 거금도 목장은 1466년 2월 17일 세조 12년 전라도 점마별감 박식이 목장을 만들 것을 건의하면서 만들어졌는데 연홍도 또한 도양목장의 일부였다.
말과 관련된 다양한 지명들 또한 말 목장이던 시절의 기억에서 유래된 것이지 싶다. 현재 300여 년 된 정자나무인 팽나무가 있는 곳의 지명이 사장등(射場登)이란 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사장은 활터다. 이 작은 섬에 활터가 있었다는 것은 섬에 군사가 주둔했다는 뜻이고, 연홍도 또한 군용 말을 기르던 말목장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정확한 유래야 논란이 분분하더라도 연홍도의 지명들은 말과 연관이 깊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말 문화를 잘 알지 못한다. 말이라 하면 제주 정도만 떠올릴 뿐 이 나라의 수많은 섬들이 한때 말을 기르던 국영목장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 공도(空島)정책으로 비워져 있던 섬들은 대체로 말 목장으로 이용됐다. 연홍도 또한 그 목장들 중 하나였다.
연홍도가 근래 들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연홍미술관 때문이다. 연홍미술관은 1998년에 폐교된 연홍분교장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꾸미고, 2006년 11월 개관했다. 정식 명칭은 ‘섬in섬 연홍미술관’이다. 섬 속의 유일한 미술관으로 명성을 얻어가며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던 연홍미술관은 2012년 볼라벤 태풍의 피해를 입으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정원을 다시 꾸밀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에 힘입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했다.
작은 섬이지만 연홍도에는 역사적 유적 유물이나 전설이 많다. 효열비도 그중 하나다. 사장등 가는 길목에는 정부인김해김씨효열비와 열녀 경주김씨를 기리는 비석이 서있다. 김해김씨 부인은 밀양 박씨였던 남편이 사망하자 곡기를 끊고 2개월 후 죽음을 맞이했다. 경주김씨 부인은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칼로 베어내 남편에게 구워서 먹여 병을 고치게 했다고 한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잔혹하고 엽기적인 일들이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효녀와 열녀로 칭송받았다. 효열비 앞에 서면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가치들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가도 가도 천리 길, 소록도 가는 길
가도 가도 붉은 황토 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는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토 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길 전라도 길.
(한하운 <전라도길-소록도 가는 길> 전문)
한센병 환자들의 한과 아픔이 서려있는 섬. 사슴섬 소록도(小鹿島)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다. 지금도 700여 명의 한센인들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간다. 울창한 해송숲과 백사장이 아름답지만 일제강점기 끌려와 강제 수용되었던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면적 3.79㎢, 해안선길이 12㎞.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5월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소록도자혜병원’으로 설립된 뒤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지금에 이르렀다.
소록도에는 일제강점기 한센병 환자들이 가꾼 중앙공원과 옛날 한센병 환자들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생활자료관,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의 시비,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추앙받는 하나이젠키치 원장의 창덕비, 순록탑 등 다양한 유물들이 있다. 이중 소록도의 슬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소록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인 ‘수탄장(愁嘆場)’이다.
수탄장은 과거 직원들이 사는 직원지대와 환자들이 사는 병사지대의 경계선이었다. 두 지대 사이에는 휴전선 같은 철조망이 있었다. 당시 병원에서는 환자의 자녀들을 직원지대의 보육원에 격리시켜 생활하게 했다. 부모로부터 감염을 우려해서였다. 부모와 자녀들은 경계선인 이 수탄장에서 한 달에 단 한 번만 만나는 것이 허락됐다. 하지만 이 만남의 장에서도 부모와 자녀들은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하고 도로에 갈라선 채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만나야 했다. 부모도 자식도, 보는 이들도 모두가 비탄스러웠다. 그래서 이곳을 ‘수탄장’이라 했다.
소록도성당과 원불교교당 앞을 지나 병원 건물 앞에 이르면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인 주민 주거지역과 중앙공원의 갈림길이 나온다. 중앙공원으로 가는 길목 오른편에는, 붉은 벽돌담의 감금실 건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병원관리자들의 처우에 항거하던 환자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굶주림에 떨게 만들던 악명 높은 사설 교도소 건물이다. 건물 창은 일반 교도소와 다를 바 없이 쇠창살이 둘러져 있다. 감방 복도에는 김정균이라는 환자가 쓴 시 한 편이 걸려있다.
아무리 죄가 없어도 불문곡직하고 가두어놓고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중략......)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 했지만
저희들은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김정균 <감금실> 중에서)
양심을 지키며 끝내 반성문을 쓰기를 거부했던 김정균도 다른 환자들처럼 단종(斷種)수술이라 불린 강제 정관수술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제 말기에는 병원당국의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항거하던 환자들이 이 감금실에서 무수히 고문 당하고, 단종 당하고, 또 죽어 나갔다.
감금실을 나서면 자료관이다. 거기서 우리는 참으로 놀랄만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이춘상 의사. 자료관에는 한센병 환자였던 이춘상의 소록도 병원장 슈호(周防正季) 살해사건 전말이 기록되어 있다. 일제 말기 소록도 병원장이었던 슈호는 손과 발, 어디 하나 성치 않은 나환자들을 강제노역장으로 내몰아 벽돌을 찍고, 도로 확장공사를 하고, 골재 운반 등을 하게 해 환자들의 피땀으로 직원관사 42동과 물품창고 2동, 소록도 일주도로 등을 완성 시켰다.
슈호는 또 연간 6천kg의 송진 채취와 30만 장의 가마니 짜기, 1500장의 토끼 가죽과 3만 포대의 숯 제조 등, 전쟁 군수물자 조달에 환자들을 동원했다. 그 죽음보다 더한 강제노역과 매질, 고문을 견디다 못한 많은 나환자들이 자살하거나 바다에 뛰어들어 탈출하다 익사했다. 심지어 슈호는 자신의 동상을 세우고 참배까지 시킨 미치광이였다. 1942년 6월20일 슈호 원장의 동상을 참배하는 정례 보은감사일. 식도를 가슴에 품고 있던 이춘상은 직원, 원생 등 약 3천여 명과 함께 동상 앞 광장도로에 서 있다가 동상을 향해 올라가는 슈호를 가로막고 외쳤다.
"너는 환자에 대하여 너무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외침과 동시에 이춘상은 식칼로 슈호의 앞가슴을 힘껏 찔렀다. 슈호는 의무실로 옮겨졌지만 이날 오후 큰 출혈로 사망했다. 이춘상은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춘상은 법정진술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슈호 원장을 죽인 것은 개인의 감정에서가 아니라 의분에 의한 것이다. 원장이 총애하는 사또 간호장이 원장의 앞잡이가 되어 확장공사 등 각종 사업에 동료 원생들을 혹독하게 사역시켰기 때문에 원장을 살해했다. 이것이 여론화되면 이 기회에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폭로 공개하여 시정을 바라고 싶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윤봉길 의사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이춘상 의사의 의거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이름조차 생소한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가 한센병 환자라서 무관심 속에 잊혀졌던 것일까.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다.
섬학교 제61강 7월의 <연홍도와 소록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7월1일(토)
07:00 서울 출발(아침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1강 여는 모임
-고흥 녹동항 도착
-점심식사(녹동에서 장어탕)
-거금도 신양항 출항
-연홍도 도착
-연홍도 산책하기(4km)
미술관-마을회관-마을기업쉼터-아르끝-당산-마을기업식당-당산나무-해안도로-좀바끝-미술관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등)
-자유시간 및 취침(미술관. 다인실)
<7월 2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연홍도 출항
-소록도 탐방
-점심식사(한정식)
-녹동어시장 장보기
14:30 서울 향발. 제61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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