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시장경제에서는 자유경쟁 시장 또는 수직적 위계조직을 통한 경제과정의 조정이 중심적 역할을 맡는다. 미국과 영국이 그 대표적인 예다. 반면 조정시장경제에서는 시장 또는 위계조직뿐만 아니라 '비시장적 조정' 또한 중요한 경제 조정의 역할을 수행한다.
경제과정의 비시장적 조정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하지만 공통적인 특성은 하나의 네트워크 내에서 정보를 교환하고 협동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정이 이루어지는 그 영역과 단위는 다르지만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조정시장경제에 속한다.
자유시장경제와 조정시장경제는 노사관계, 직업훈련, 기업지배구조, 기업 간 관계 등 여러 제도에 있어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또 자유시장경제에 비해 조정시장경제는 장기적인 고용과 국민과의 신뢰가 존재한다.
버블경제를 이겨낸 이들은 '조정시장경제'를 택한 나라
버블이 붕괴된 1990년대 이후 일본경제의 장기불황 또는 장기정체는 정부가 규제와 행정지도 등 비시장적 경제조정을 과다하게 사용한 것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상당히 많다. 이는 지금 이명박 정부 주위의 경제학자들의 논리와 유사한 것이다.
즉 모든 경제과정을 '시장'에만 맡겨 두었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왜 하필 큰 정부를 지향해서 국가가 경제에 개입했느냐는 논리다. 즉 신자유주의적 견해인 셈이다. 이들은 일본경제가 정체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 '구조개혁', 즉 규제완화와 규제철폐에 의해 시장 본래의 '자연적 자유의 질서'에 입각한 경제조정기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 정치적으로 곤혹을 치루고 있는 고이즈미 이후의 집권여당 자민당과 다케나카 헤이조 등과 같은 시장주의 경제학자들이 그 대표적인 그룹이다.
우리도 한국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빠지게 되었을 때 이러한 주장이 일시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제기된 바 있다. 이는 IMF의 권고에 따른 것이어서 다소 외생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현 정부 하에서 이 논리는 '완장'을 찬 것처럼 득세하고 있다. 이번엔 미국에서 시장주의 경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한국의 경제학 강단을 지배하고 있는 시장원리주의자들이 꼭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신을 믿고 있는 맹신도처럼 미친 듯이 외쳐대고 있는 만큼 지극히 자생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는 이러한 시장원리주의 또는 규제완화론이 매우 거대한 담론체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러한 주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 지금 현재의 정권과 한나라당이다. 결국 이러한 주장과 견해들은 오로지 시장에 의한 경제조정만이 가장 효율적이고 공정한 결과를 초래하는 경제조정 방법이라고 맹신한 나머지 자유시장경제를 가장 이상적인 자본주의 형태라며 광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에 속하지 않고 조정시장경제에 속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버블경제붕괴 이후 경제 회생을 단기간에 성공리에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공적자금의 투입과 은행국유화, '적극적노동시장정책'에 의한 노동자의 숙련·기능 형성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연대임금정책을 통해 저부가가치 부문에서 고부가가치 부문으로 순조롭게 노동력을 이동하는 등 비시장적 경제조정을 집중적으로 채택·실시했다. 비시장적 경제조정 일반을 무용하고 유해하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학자들의 견해는 그들이 엉터리임을 폭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본 장기침체 원인은 기업 차원의 구조조정
▲ 일본의 신자유주의적 조정정책은 장기불황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로이터=뉴시스 |
버블경제 붕괴 이후부터 지금까지 일본경제가 정체에 허덕이고 있는 것은 비시장적 경제조정 그 자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비시장적 경제조정의 매우 특수한 형태, 즉 비시장적 조정의 '일본적' 형태에서부터 기인되었다. 스웨덴, 노르웨이의 경제에 대한 조정은 주로 산업 차원과 사회 차원에서 이뤄진 것과 반대로 일본의 경제조정은 주로 기업 차원과 기업그룹(이른바 기업집단) 차원에서 이뤄졌다.
예를 들어 직업훈련과 임금교섭이 이루어지는 그 영역과 단위가 일본에서는 기업인 반면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는 산업 또는 사회전체이다. 일본에서도 산업 및 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조정이 몇 가지 존재하기는 하지만 제도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 많고 조정능력도 매우 약하다. 결국 기업, 기업그룹 차원의 경제조정은 버블경제 붕괴 후의 일본 경제를 순조롭게 처리할 수 없었다.
버블경제 후의 처리는 기본적으로 부동산 등의 자산 가격이 하락해 수익성을 상실한 사업을 도태시키고 그 곳에 투입되었던 자본과 노동 등 핵심 생산요소들을 수익성이 유망한 다른 사업부문·기업·산업에 이행시키는 것이다. 사회전체에 걸쳐 형성된 거대한 버블 국면의 경우 일개 기업 사이에 그치지 않고 축소되는 산업에서 확대가 예측되는 산업으로의 이동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는 일시적인 경제활동 수준의 저하와 실업 또한 일어날 수 있다. 실업 후의 직업훈련, 재취직을 지원하는 제도와 시설이 불충분할 경우 해고 조치는 정당성을 얻을 수 없으며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경우 은행의 측면에서 보면 불량 기업에 대한 융자 정지와 담보자산의 회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대기업의 경우는 해고의 대량 발생을 동반하게 된다. 또 중소기업의 경우 그 영향은 경영자가 개인 재산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은행이 부실채권 처리라는 조치를 취하게 되면 대출처였던 중소기업이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건전사업의 수행능력과 신규 사업에 대한 진입능력은 거의 상실해 버리기 때문에 부실채권의 처리에 대해서는 강력한 저항이 존재하게 된다. 즉 손실과 고통의 분배는 성과의 분배에 비해 이해 대립이 격해지기 마련이다.
결국 사회 전체 차원에서 조정이 필요하고 소득 저하와 실업 등 손실과 고통의 분배를 동반하게 되는 경제 문제 처리에서 기업과 기업그룹을 기준단위로 하는 조정은 그 유효성이 매우 낮을 수밖에 없다. 사회 차원의 조정이 충분히 기능하지 못하고 이를 배후에서 지원하는 제도와 조직이 없는 일본에서는 버블경제 후의 사후 처리에 관한 많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한때 'Japan as Number 1'으로까지 불리던 일본경제가 199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장기 정체에 허덕이는 기본적 원인은 기업과 기업그룹 차원의 조정이 갖는 이같은 특징에 있다. 부실채권 문제의 미해결과 산업구조 및 고용구조 변화의 정체, 그리고 기업의 저수익성이 지속되된 현상은 바로 '일본적 조정'의 귀결인 셈이다. 이러한 일본적 조정의 토양 위에서 사회체제를 지배하며 모든 것들을 향유했던 정치그룹이 바로 집권여당 자민당이다.
일본의 잘못된 시장 조정 방식이 정권교체 국면 맞아
필자처럼 기업과 기업그룹 차원의 조정에 장기정체의 근본적 원인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일본경제가 장기정체 국면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방법이 필요하다. 하나는 미국과 영국과 같은 자유시장경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다. 즉 시장과 위계조직에 의한 경제조정 기능을 더욱 고조시키는 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스웨덴과 노르웨이같이 산업과 사회 전체 영역과 단위를 전제조건으로 한 조정시장경제를 향한 돛을 올리는 것, 즉 조정의 범위를 더욱 더 넓히는 길이다.
전자의 길을 걷게 될 경우 현재 문제시되고 있는 토목건설업같은 저수익 부문에서 고수익 부문으로 자본과 노동을 이동시킬 때 시장 메커니즘에 의존하는 조정이 그 중심에 설 수 밖에 없다.
자본시장에서는 이윤율과 주가 등 단기 지표에 입각해서 투자자금의 제공과 회수가 행해지는 형태로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도록 메커니즘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은행과 대출 기업과의 장기적 관계를 현 시점의 수익성을 중시하는 단기적 관계로 변경하고, 자금조달방식을 간접금융에서 직접금융으로 전환하면서 정보공개제도를 확충하는 등 정보증권거래제도 정비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노동시장에서는 경영자가 가지는 해고의 자유를 기본적으로 인정하여 경기의 변동에 따른 유연한 고용조정, 이른바 해고의 유동화를 실현하게 된다. 따라서 현재의 고용보장과 해고억제를 위한 법 규제와 노사협약에 의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해야 한다. 또 연공임금, 신입사원 채용의 중시, 연령제한 등 기업의 임금체계와 인사제도를 변경해서 중도 전직으로 노동자가 입게 되는 불이익을 축소시키는 방안도 필요하다.
이러한 처방은 1990년대 이래 일본에서 줄곧 시도되어 왔고 고이즈미 정권 이후 더욱 강화된 형태로 단행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의 일본은 전혀 회복되지 않고 있다. 최근 일본의 제1 야당인 민주당이 자민당을 누르고 정권교체에 성공할 것이라고 하는 예측이 지배적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인 것일까? 1990년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민당이 견지해온 일본 사회경제에 대한 입장이야말로 자유시장경제를 향한 질주에 비유될 수 있다.
만약 일본이 스웨덴과 노르웨이, 독일처럼 조정시장경제의 길을 향한 닻을 올린다면 수익성을 상실한 산업 부문에서 고수익 부문으로 자본과 노동을 이동시키기 위한 비시장적 조정이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도록 '합의'에 입각한 전망을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비시장적 조정의 운영주체는 반드시 국가일 필요도 없으며 노동조합과 경영자단체, 그리고 지방자치체 등 여러 가지 주체를 상정할 수 있다. 동시에 세금에서 나온 국가자금의 투입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력 이동의 경우 미래에 필요한 기능 분야에 중점을 둔 본격적인 직업훈련을 위한 제도, 그리고 조직이 필요하다. 재취직을 위한 제도와 조직 역시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실업의 격화를 완화하기 위해 공공부문이 채용자 수를 늘이는 것도 고려되야 한다.
자본 이동의 경우 부실기업이 진행해 온 여러 사업 중 부실한 부문과 건전한 부문을 적절히 분리해 건전사업의 존속과 발전을 가능케 해야한다. 또 부실사업의 정리와 건전사업의 지속적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 공적자금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러한 처방은 1990년 이래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줄곧 시도되었고 이로 인해 양국의 경제회복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절대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양국의 경험을 우리는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 일본의 서툰 모험 답습해선 안돼
그렇다면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에게는 산업 차원과 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조정이 작동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분명코 '한국적인' 기업과 기업그룹 차원의 조정이 장기정체의 근본적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상이 허다하다.
또 지금 정부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는 지난 과거에 얼마나 많은 시장주의적 개혁을 단행해왔는가. 시장주의에 입각해 너무나 많은 개혁을 해온 나머지 지금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이 경쟁으로 얼룩져 무의식적으로 '가난한 사람=나쁜 사람' 그리고 '잘 사는 사람=착한 사람'의 원죄론적 항등식에 속박되어 있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항등식을 이 사회에 심고자 했던 모든 이들이 기득권 타령을 접고 시장과 위계조직이 아닌 산업과 사회 전체 영역과 단위를 전제조건으로 한 조정시장경제를 향해 돛을 올려봄이 어떻겠는가. 적어도 일본의 서툰 자유시장경제를 위한 모험은 절대로 답습되어서는 안 된다. '오합지중'으로 불리던, 자민당을 누르고 제1당이 되기 직전에 있는 일본의 민주당을 보라. 그들의 메니페스토는 어떻게 되었던지 간에 지금 조정시장경제를 지향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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